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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른역사
조선 시대 대로가 아닌 ‘뒷골목’ 풍경은 어떠했을까? 제목이 자못 호기심을 유발하는 <조선의 뒷골목 풍경>(강명관 지음, 푸른역사)은 역사가 기억하지 않는 조선의 민초들의 모습을 끌어내고 있다.

즉 저자는 조선시대 뒷골목 풍경을 보여주기 위해 도둑, 깡패, 왈짜, 탕자 등을 불러내고 도박판과 술집을 찾아낸다.

조선 시대에 대해 제도사적으로 무언가 거창하고 큰 이야기를 논하는 역사책에 비해 이렇게 ‘한심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이 ‘흥미’ 위주의 책인 건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가 기억하지 않는 개똥이, 말똥이의 역사에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이런 작고 시시한 이야기들이야말로 내가 알고 싶었던 과거 인간들의 리얼리티가 아닐까? 이런 것들을 통해 역사를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이런 사소한 코드들이 거대한 이야기에 가려진 또 다른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수단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p-17)

그럼 이 책이 다루는 ‘한심한’(?) 이야기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인가?

민중의사 조광일, 백광현, 피재길, 백범의 탈옥공작을 벌인 불한당의 괴수 김 진사가 풀어놓는 도둑의 무리들, 과거시험에서 최고의 대리시험 전문가로 활약한 류광억, 유흥계를 누빈 거문고의 명인 이원영, 조직폭력배 검계를 일망타진한 포도대장 장붕익 등이다.

이렇게 흥미를 유발하는 소재와 저자의 재치 있는 입담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많지만, 그 중 제일 주목할 만한 것은 엄숙할 것 같은 조선 시대 과거 시험장에 대한 내용이다. 우리의 상식을 여지없이 깨버리는 이야기에 잠시라도 눈을 뗄 수가 없다.

난투가 벌어지고 부정이 판치는 과거 시험장

이 책이 보여주는 조선 시대 과거 시험장은 말 그대로 ‘가관’이다. 알다시피 과거는 양반관료 사회의 중요한 등용문이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난투가 벌어지고 부정이 판친다면 믿겠는가?

저자는 과거에 동원된 부정들을 들춰낸다. 예상 답안지를 만들어가는 일, 시험지를 바꾸는 일, 합격자의 이름을 바꿔치는 일, 채점자를 매수하는 일 등 마치 오늘날과 같은 많은 부정들이 있었다.

게다가 과거 시험장에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답안지를 빨리 내기 위해서 치열한 몸싸움이 벌어지기 일쑤인데, 여기에는 전문 몸싸움꾼인 ‘선접군’이 동원된다. 이쯤 되면 과거 시험장은 신성한 장소가 아니라, 폭력이 난무하는 난장판이다.

또 과거에는 전문적으로 답안지를 대신 지어주는 일을 하는 ‘거벽’과 글씨를 대신 써주는 일을 하는 ‘사수’가 동원된다. 여기에는 돈의 많고 적음에 따라 답안지의 수준을 조절했다고 전해지는 ‘전설적인’ 대리 시험 전문가 류광억의 이야기도 나온다.

혹자는 이러한 일이 말기적 현상으로 소수에 불과하며 과거는 정상적으로 치러졌을 거라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당시 이러한 일들은 그것이 부정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보편화되어 있던 일이다.

<북학의>의 저자 박제가(1750~1805)는 그의 저서에서 난장판이 된 과거 시험장을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다.

“심한 경우에는 마치로 상대를 치고, 막대기로 상대를 찌르고 싸우며, 문에서 횡액을 당하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욕을 얻어먹기도 하며, 변소에서 구걸을 요구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하루 안에 치르는 과거를 보게 되면 머리털이 허옇게 세고, 심지어는 남을 살상하는 일이나 압사하는 일까지 발생한다.

온화하게 예를 표하며 겸손하여야 할 장소에서 강도질이나 전쟁터에서 할 짓거리를 행하고 있으므로 옛사람이라면 반드시 오늘날의 과거장에는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p-167)


적절한 화보의 사용이 이 책의 매력이다. 좌측의 화보는 <소과응시> 부분이다. 자리를 깔고 우산을 받치고 끼리 끼리 모여앉은 것이 시험을 보는 이들치고는 매우 한가롭다.
적절한 화보의 사용이 이 책의 매력이다. 좌측의 화보는 <소과응시> 부분이다. 자리를 깔고 우산을 받치고 끼리 끼리 모여앉은 것이 시험을 보는 이들치고는 매우 한가롭다. ⓒ 푸른역사
아직도 우리는 과거를 치르는 조선시대에 살고 있나

한편 이런 궁금증이 생기기도 한다. 과연 선비들이 골머리를 썩이며 공부했던 과거시험 과목이 현실에서 쓸모가 있었을까? 그들이 공부한 시와 부가 행정 일을 보는 데 도움이 되었을까? 박제가는 과거 문장을 공부하여 익힌 재주는 쓸 곳이 없다고 말한다.

“어린아이 때부터 과거문장을 공부하여 머리가 허옇게 된 때에 과거에 급제하게 되면 그날로 그 문장을 팽개쳐버린다. 한평생의 정기와 알맹이를 과거 문장 익히는 데 전부 소진하였으나 정작 국가에서는 그 재주를 쓸 곳이 없다.”(p-188)

또 정약용은 과거 제도에 대해 이렇게 탄식한다.

“지금 천하의 총명하고 슬기로운 재능이 있는 이들을 모아 일률적으로 과거라고 하는 격식에 집어넣고는 본인의 개성은 아랑곳없이 마구 짓이기고 있으니, 어찌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있겠는가.”(p-189)

국가고시가 ‘신분상승용’일 뿐 현실 행정에서 쓸모없기는 오늘날이나 조선 시대나 마찬가지였나 보다. 박제가와 정약용의 과거 제도에 대한 비판을 보면 오늘날 현실이 오버랩된다. 그 ‘과거’라는 단어를 ‘고시’(또는 입시)라는 단어로 바꾸어 보라. 영락없이 오늘날 고시(또는 입시) 제도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된다.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과 닮은 조선시대 민초들의 삶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고 또 흥미 위주로 이 책을 부각시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 책에 ‘알맹이’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한심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점잖은’ 이야기도 있다.

독자는 이 책이 그리는 조선 시대 민초들의 삶 속에서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된다. 또한 이 책에는 비주류 인생들에 대한 저자의 따뜻한 시선과 마주친다. 반면 양반을 중심으로 한 지배계층 내지 주류사회에 대한 시선은 냉철하다.

저자는 당시의 문제의식과 부조리, 그리고 민중들의 삶의 애환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놓치지 않는다. 예컨대 앞에서 살펴본 타락한 과거장의 모습에서 저자는 고시열풍에 휩싸인 일그러진 우리의 모습을 읽는다.

그리고 민중의사들의 활약상을 통해 들여다본 ‘의료혜택에서 소외된 민중들’의 고단한 삶이 오늘날도 지속되고 있는 것을 저자는 본다. “새로운 치료법을 개발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미 존재하는 의료기술의 혜택을 누구나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요즘에는 의술의 부족이 아니라 돈의 부족으로 죽는 사람이 많다. 의술은 누구를 위해 있어야 하는가?”(p-47)하고 문제를 제기한다.

또한 군도의 출현에서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뿌리 깊은 부조리를, 도박의 성행에서 우연과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세상사를, 반촌 사람들을 통해서는 돈과 권력의 보유 정도에 따라 거주지가 나뉘는 세태를 짚어낸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본문 옆에 많은 관련 자료들이 있어 더욱 유용하다는 점도 밝힌다. 특히 적절한 화보 사용으로 본문 내용을 더욱 생동감 있게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매력이 있다.

조선의 뒷골목 풍경

강명관 지음, 푸른역사(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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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 이달의 뉴스게릴라 선정 2002년, 오마이뉴스 2.22상 수상 2003~2004년, 클럽기자 활동 2008~2016년 3월, 출판 편집자. 2017년 5월, 이달의 뉴스게릴라 선정. 자유기고가. tmfprlansgh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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