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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자리 친구가 가져온 엿
앞자리 친구가 가져온 엿 ⓒ 서강훈
문득 앞 자리에 앉은 친구가 뒤를 돌아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야, 너 엿 먹을래?”

우리나라 말 특성상 그것이 중의적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했다. 그래도 평소 심각하던(?) 친구인데 설마 장난치는 것은 아니겠지 하고서는 얼른 “그래 어서 줘”라고 했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 친구는 장난스런 표정을 하더니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초등학교 때나 신나게 해댔던 ‘엿 먹어라’란 장난을 고3에 올라와서까지 보게 될지는 몰랐다. 그래서 썰렁한 친구의 장난에 혀를 끌끌 차고 핀잔을 주었더니, 그제야 기다랗고 흰 엿을 내어 놓는 친구.

“어! 이게 웬 엿이냐?”
“어, 어제 친척들이 올라왔는데 시험 잘 보라고 갖다 주셨어. 이거 나눠 먹자.”

이게 왠 떡인가 싶어서 좋다고 받았더니 일이 생겼다. 주변에 있는 치들이 이내 엿을 발견하고는 하나둘씩 몰리더니 친구와 내 주위를 둘러싸 버린 것.

성질 급한 어떤 친구는 어서 부숴서 먹자며 혼자서 엿을 꽉 잡고는 그대로 낚아채 달아나 버린다. 그런데 생각대로 엿이 잘 부숴지지 않았다.

“아 이거 왜 이렇게 안 부숴지냐?”
“주머니에 두었더니 녹았나 보지. 이리 줘 봐 내가 깨어 볼게.”

그치는 엿을 받아들고는 책상에 연신 박치기를 시킨다. 그리고 엿이 몇 조각으로 나눠지자 친구들은, 자기들끼리 나눠 먹겠다며 하나둘씩 흩어져 간다.

엿 하나에 난리인 친구들
엿 하나에 난리인 친구들 ⓒ 서강훈
그렇게 처음에는 앞자리 친구가 나랑 나눠 먹겠다며 슬쩍 가져온 엿이 어느 순간 다 없어져 버렸다. 친구들의 난동에 정신을 잃고 보니, 그 친구와 내 몫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엿을 먹고 싶었건만 그렇게 되어버린 형국에 무어라 할 수는 없고, 그래도 엿을 가져온 주인이 못 먹어서 안 되었다고 위로를 했다.

“그래도 네가 가져왔는데 못 먹어서 어쩌나, 솔직히 억울하지?”
“억울할 게 모 있어 집에 잔뜩 있는데. 그거 처리하려면 수능 끝나도 안 될걸. 그건 그렇고 엿 받은 건 좋은데 괜히 좀 짜증나더라.”

“왜 그러는데?”
“그냥, 시골에서 친척들이 죄다 올라와서는 엿 주고 공부 잘하라고 하고, 수능 끝날 때까지 있겠다니까 그럴 수밖에.”

이맘 때면 수험생들은 시험 잘 보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를 받는다. 못 먹는 포크를 받는다거나 방석을 받기도 하지만, 대개는 먹을 수 있는 엿과 찹쌀떡을 받는다.

본인의 경우도 주말을 전후해서 주위분들에게 찹쌀떡을 받아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수험생에게 무엇을 주면서 “시험 잘 봐서 좋은 대학가라”라고 말한다. 나를 생각해준 내 주위 사람들의 마음이 전해져 따스하게 느껴진다. 그 말은 다 나 잘되길 바란다는 말이 아닌가.

그런데 이러한 것들을 받아 보며 한편으로 느낀 것은 친구가 말했던 약간의 부담감과도 비슷한 것이었으리라. 맛있는 것을 받아먹으면서도 수능 잘 봐라 하는 순간에 떠오르는 것은 얼마 남지 않은 그날의 이미지이기 때문에.

가족들이 선물해준 합격 찹쌀떡
가족들이 선물해준 합격 찹쌀떡 ⓒ 서강훈
2년 전, 아무 생각 없이 엿을 사다가 누나에게 주었던 일이 생각난다. 내 엿을 받아든 누나에게 순진하게 했던 “꼭 좋은데 가야해”란 말, 그 말을 듣고 그때의 누나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예전 누나의 심정을 지금에 와서야 조심스레 헤아려 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제는 내가 그때의 누나와 같은 처지에서 찹쌀떡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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