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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서울외국인노동자센터 쉼터에 들어섰을 때 라죠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알아보는 중이라고 했다. 어두운 표정으로 전화를 끊는 걸 보니 이번에도 거절을 당한 모양이다. 그는 "불법체류자는 어딜 가나 힘든 것 같다"며 입을 열었다.
"외국인이니까 참을 수밖에 없잖아요"
| | | ▲ 방글라데시에서 온 라죠 | | ⓒ 송민성 | 라죠가 한국에 처음 온 것은 1995년. 고국인 방글라데시에서 그는 법학을 전공한 인텔리였다. 그러나 직장을 얻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고 나라의 경제 사정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우연히 '한국에 가면 기술도 배울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한국행을 결심하게 되었다. 한국의 상황이 기대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 동안 3개월짜리 비자는 기간만료되었고 그는 불법체류자가 되었다.
한국에 들어온 라죠는 의정부에 있는 한 자동차 하청업체에서 4년간 일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7시까지 일하고 9시까지는 야간 근무를 했다. 그렇게 해서 그가 받은 돈이 월 90만 원. 야근수당은 꿈도 못꿀 일이었다.
"방세로 18만 원을 내고 가족들에게 보내고 나면 거의 돈이 남지 않아요. 한국, 방값이고 밥값이고 너무너무 비싸요. 사람들, 말해요. '너희 나라에서는 90만 원이면 큰 돈 아니냐' 그래요. 하지만 난 여기 살아요. 생활비 똑같이 들어요."
라죠는 그 곳에서 용접일과 프레스 기계를 다루는 법을 배웠다. 일을 가르쳐주었던 한국인 노동자들에게 맞기도 많이 맞았다.
"기계를 잘 모르는데다 말도 잘 안통하다보니 일을 배우기가 어려웠어요. 한국인 노동자들은 걸핏하면 '멍청하다'며 주먹을 휘둘렀죠. 내가 일을 빨리 배워야 자기들이 쉴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니까 많이 때렸어요."
라죠씨가 제법 일을 익히자 동료 한국인 노동자들은 자기 몫의 작업을 그에게 떠맡겼다.
"내가 일하는 동안 그 사람들은 담배 피고, 오토바이 타고 놀러가고 그랬어요. 그래놓고는 나보고 일 못한다고 간섭했어요."
한국인 노동자들의 횡포를 참지 못한 그는 기어이 분통을 터뜨렸다.
"그 사람에게 말했어요. '넌 사장도 아니고 나와 같은 직원일 뿐이야, 난 니가 말하지 않아도 잘하고 있어'라구요."
그 싸움 탓에 라죠는 일자리를 잃었다. 싸움을 일으킨 것도, 일을 게을리한 것도 동료 직원이었지만 직장에서 쫓겨난 쪽은 라죠였다.
"나는 법을 배웠고 또 잘못한 것이 없어 억울하다고 항의 많이 했어요. 하지만 사장님은 내 말 들어주지 않았어요."
| | | ▲ 서울외국인노동자센터 쉼터에는 여섯명의 노동자들이 머물고 있다. | | ⓒ 송민성 | 성수동에서 두 번째 일자리를 얻었지만 그 역시 길게 가지 않았다.
"사장님이 급하니까 얼른 물건을 실으라고 했어요. 바쁘게 일하는데 공장장이 와서 이것저것 잔심부름을 시키고 청소를 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사장님이 시킨 일을 해야한다고 했더니 공장장이 날 때렸어요."
그때도 라죠는 참지 않았다. 파출소로 달려가 공장장을 신고하려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둘이서 잘 해결하라"는 말뿐이었다.
"니가 불법체류자니까 신고하면 너도 고국에 돌아가야 한다고, 둘이 알아서 하라고 했어요."
그렇게 두 번째 일자리를 잃었다. 라죠는 그제서야 현실의 냉혹함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알게되었다.
"어쩔 수 없잖아요. 외국인이니까 아무 말 못하는 거잖아요. 참아야 하는 거잖아요."
"왜 우리가 쫓겨나야 합니까?"
라죠는 2년 전부터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한 돈으로 생활을 해오고 있다. 숙련공에다 한국말도 곧잘 하지만 11월 16일 불법체류자 일제 단속을 앞둔 시점에서 그를 받아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2개월 전에 어렵게 직장을 구했지만 지난 달 말에 해고됐어요. 나는 불법체류자니까 15일전에 가야하잖아요. 불법체류자는 어딜 가나 힘들어요. 불법체류자라는 딱지 때문에 좋은 일자리가 있어도 일할 수 없어요."
그는 지금의 상황을 납득하기가 어렵다.
"우리는 한국 노동자들이 하지 않는 힘들고 어려운 일 합니다. 돈도 적게 받아가며 열심히 일했어요. 일을 하다 손가락을 잘리고 허리를 다쳐도 보상 한번 제대로 받은 일 없어요. 그렇게 일했는데 이제 와서 무작정 나가라고 해요. 왜 우리가 쫓겨나야 합니까?"
그는 고된 작업을 할 때보다 일을 하지 못하는 지금이 더욱 고통스럽다고 했다. 요즘 같아서는 밥도 먹기 싫단다. 3개월짜리 비자 하나만 믿고 아는 이 하나 없는 낯선 땅에 올만큼 자신만만했던 라죠는 이제 서슴없이 말한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다"고.
이처럼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라죠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잘라 말한다. 첫째는 한국에 오면서 그가 가졌던 꿈 때문이고, 둘째는 한국과 별 다를 것 없는 방글라데시의 경제난 때문이다.
"한국에 올 때 그런 계획 있었어요. 2, 3년 열심히 일하고 기술 배워서 사업을 하고 싶었어요. 한국 제품을 방글라데시에 수출하는 일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구요. 하지만 이제 그러기 힘들어요. 모아놓은 돈도 다 떨어졌고 빚만 늘어가고 있어요. 가고 싶어도 비행기값이 없어서 갈 수가 없는 거예요."
그리고 라죠가 돌아가지 않는 세 번째 이유는 그가 여전히 희망을 품고있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말도 잘하고 한국 생활에도 익숙해졌어요. 기술도 배웠구요. 이렇게 가고 싶지는 않아요."
라죠의 희망은 얼마 전 열린 강제추방 반대집회를 다녀온 후 조심스럽게 부풀고 있다.
"나와 같은 처지의 친구들이 2천 명 정도 왔어요.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항의를 하고 한국분들도 많이 도와주니까 법이 바뀔 수도 있지않겠어요?"
라죠는 얼른 법이 바뀌어 모든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에서 행복하게 일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그가 생각하는 '행복'은 매우 소박하다.
"병원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할인 혜택을 주고 추석이랑 설날에는 한국인 노동자들처럼 보너스를 주었으면 좋겠어요."
| | ▲ 반지하방의 한쪽 벽면을 채우고있는 커다란 짐가방들. 외국인 노동자들의 불안정한 상황을 대변하는 듯하다. | | ⓒ 송민성 | |
한국에서 '후진국' 외국인으로 살기
한국에서 외국인으로, 특히 한국보다 못사는 나라에서 온 외국인으로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물건을 사려고 가격을 물으면 '돈도 없는 주제에 뭘 사려고 하냐'는 경멸 어린 눈빛을 견뎌내야 했다.
식당에서 똑같은 돈 내고 밥을 먹으면서도 "빨리 먹고 가라"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나이 많은 사람들이 '야, 일어나!'라고 하면 자리를 양보해주어야 했다. 택시 기사가 일부러 돌아가는 바람에 요금이 많이 나와도 항의 한마디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인터뷰를 하면서 라죠는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그에게 있어 확실한 것은 지금은 한국을 떠날 수 없다는 사실뿐이다.
"코리안 드림 없어요. 누군가 한국 오겠다고 하면 말릴 거예요. 빨리 법이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법이 바뀔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라죠의 말에서는 간절한 희망이 묻어 나왔다.
| | "기술 배우러 '좋은 나라' 한국에 왔지만..." | | | |
| | ▲ 왼쪽부터 로니, 윈, 라죠 | ⓒ송민성 | 라죠와 함께 쉼터에 머물고 있는 로니(필리핀)와 윈(미얀마)의 상황도 다를 것이 없었다.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5년 전에 한국으로 온 로니는 다리를 심하게 다쳐 제대로 걷지 못한다. 일을 하다 다쳤지만 로니의 고용주는 1회 치료비만 주고 쫓아냈다.
윈은 한국에 온지 7개월밖에 되지 않아서 한국 말을 전혀 하지 못했다. 배 기술자로 일했다는 그는 '좋은 나라' 한국에서 기술을 배우고 싶었으나 2개월만에 해고되었다.
그런데도 로니와 윈 역시 한국을 떠날 마음이 없다. 로니와 윈은 각각 "필리핀으로 가봤자 일자리를 구할 수 없으니까" "사회주의인 고국에서는 자유가 없지만 여기는 자유가 있다"며 머물고 싶은 이유를 댔다.
그러나 그들 역시 불법체류자로 15일이 지나면 강제출국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 송민성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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