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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분명 황금빛 은행잎들이 눈부시게 달려있는 11월인 탓이었다. 계절 탓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붙잡으며 애절하게 호소하는 인형극 속의 여자 인형. 이상하게 눈시울이 젖어 오며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스스로도 어이없으니 애꿎은 계절을 탓할 수밖에.

마츠모토와 사와코는 결혼을 약속한 연인 사이. 마츠모토에게 좋은 혼처가 나서자 부모님은 좋은 조건의 여자와 결혼할 것을 강권한다. 헤어지지 못하겠다는 아들을 대신해 부모님은 사와코의 부모님 앞에 무릎을 꿇는다.

마츠모토는 자신의 결혼식 날 사와코가 자살을 기도했다 목숨은 건졌으나 정신을 놓아 버렸다는 소식을 듣는다. 결혼식장을 나와 사와코를 데리고 길을 떠나는 마츠모토. 사와코가 어디로 갈지 몰라 마츠모토는 자신의 허리와 사와코의 허리를 빨간색 끈으로 묶는다.

영화는 두 '빨간 끈 거지'가 정처 없이 지나는 길의 풍경과 스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놓는다.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중 사고로 상처를 입은 가수 하루나와 열렬한 팬인 누쿠이. 폭력 조직의 보스인 히로와 옛사랑 료코. 사계절 풍경과 함께 흐르는 그들의 이야기는 참 아프다.

정신을 놓아 버린 사와코는 사람도 알아보지 못하고, 관계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니 그는 지금 여기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옆에 있을 뿐, 아무 말 못하는 마츠모토. 그가 가슴 아프게 토해내는 두 번의 "미안해"에는 사랑과 회한의 모든 감정이 실려 있다.

자신이 무엇이길래, 자신과의 사랑이 과연 무엇이었길래 사와코는 목숨까지 걸었을까. 마츠모토는 모든 것을 버리고, 빨간 끈으로 서로를 매고 길을 갈 뿐이다. 그 끈은 사랑일까, 운명일까, 아니면 사랑의 운명일까.

가수 하루나는 상처 입은 자신의 모습을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아 바닷가에 숨어산다. 누쿠이는 고민 끝에 자신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 하루나를 생각하며 스스로 자신의 눈을 찌른다. 그리고는 하루나를 찾아온다.

조직의 보스인 히로는 이제 노인이다. 머리는 희끗희끗하고, 입가의 주름이 깊다. 몸도 좋지 않다. 자신이 살기 위해 가차없이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았던 일, 젊은 시절 주말이면 공원 벤치에 앉아 도시락을 나눠먹던 사랑하는 료코를 일방적으로 떠나온 일이 떠오른다.

앞으로도 주말이면 공원 벤치에서 기다리겠다던 료코의 말이 생각나 몇 십 년만에 히로는 그 공원을 찾는다. 도시락 두 개를 무릎 위에 놓고 료코는 그 벤치에 그 때처럼 빨간 원피스를 입고 앉아있다. 그러나 히로를 알아보지는 못한다.

봄의 벚꽃, 여름 바닷가의 뜨거운 태양, 가을의 불타는 단풍 사이로 시간은 흘러가고 사와코와 마츠모토의 걸음은 지쳐있지만 쉬지 않고 계속된다. 그 사이에 앞을 보지 못하는 누쿠이는 길에서 목숨을 잃고, 조직의 보스 히로에게도 킬러가 나타난다.

하루나는 혼자 앉아 바다를 보고 있고, 히로와 도시락을 나눠먹기 시작한 료코는 그 다음 토요일에 도시락 두 개를 무릎 위에 놓은 채 그 공원 그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히로를 기다린다.

길을 가다 줄에 걸려 있는 일본의 전통 솜옷을 훔쳐 입고 눈길을 가는 사와코와 마츠모토. 젊은 사람들의 파티를 창문으로 들여다보다가 사와코가 어느 순간 마츠모토의 어깨를 두드린다. 그리고는 자신의 목에 걸고 있는 천사 목걸이를 보여주며 웃는다. 기억이 돌아왔나 하며 마음을 놓는 것도 한 순간, 눈 덮인 산길의 끝은 낭떠러지였다.

'빨간 끈의 거지' 마츠모토와 사와코. 오랜 시간을 길에서 보낸 그들은 비록 지치고 힘들어 보였지만 어느 순간 참으로 자유스러워 보였다. 무슨 까닭에서였을까…. 그것은 두 사람 모두 가진 것을 다 버렸기 때문이리라.

사와코는 목숨을, 마츠모토는 집과 부모와 보장된 미래를 다 버렸다. 모든 틀에서 벗어나, 가진 것의 굴레에서 빠져 나와 한 걸음 비껴 서있는 그들은 비록 가진 것 없는 '거지'였지만 자유였다. 빨간 끈으로 묶여있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자유였다.

눈을 찔러 앞을 보지 못하는 것으로 하루나를 향한 사랑을 자신의 몸에 영원히 새긴 누쿠이. 그는 눈을 버림으로써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극단의 사랑은 두려움이기도 하지만 그 선택은 온전히 그의 것이었다.

그럼 노년의 히로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어버린 것일까. 그는 세월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옛사랑 료코를 찾아 나설 수 있었다. 세월에 자리를 다 내주고 주름진 얼굴이 되어서야 옛사랑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잃어야만 얻을 수 있는 사랑이어서 공평한 것일까.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고, 한 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리는 인생의 진리가 어찌 이리도 한 치 어긋남 없이 사랑에 들어있는 것일까.

우리 인생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사는 큰 진리의 손에 조종되는 인형 같은 존재여서 영화는 인형극으로 시작을 했던 것인가. 가만 들여다보면 변함없는 표정의 인형들이지만, 달리 보면 웃는 듯도 하고 우는 듯도 해 오히려 더 절묘한 감정을 표현해 내는 인형의 얼굴 위로 내 삶의 모퉁이에서 마주친 사랑의 얼굴들이 겹쳐진다.

눈물은 솔직히 계절 탓이 아니라 이루지 못한 젊은 날의 사랑과 꿈에 대한 한 가닥 미련과 쓸쓸함과 기억 탓이었다던 것을, 미련한 나는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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