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나라당 주변에서는 재미있는 농담 하나가 떠돌고 있다.
한나라당 공식 조직 기구표에서 '대표' 바로 윗 부분을 즉석복권 긁듯 동전으로 긁어보면 '준표'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준표'는 홍준표 전략기획본부장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 농담에는 지난달 28일 신설된 비상대책위원회와 전략기획위원회, 대외인사영입위원회의 높아진 당내 위상이 상징적으로 담겨있다.
'대표' 위에 '준표'?
세 위원회는 이재오 사무총장 겸 비상대책위원장의 통솔 아래 SK 비자금 등 현안 문제와 대여 공격을 직접 주도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부여받았다. 당내 일각에서는 최병렬 대표가 비대위에 막강한 힘을 실어주며 재신임 정국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공조직의 소외 현상이 나타났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실제 비상체제 가동 이후 사실상 당내 2인자로 군림해왔던 홍사덕 총무가 직전 원내총무인 이재오 사무총장에게 밀려 상대적으로 입지가 위축되는 형세가 전개되고 있다. 중·대선거구제,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 등 홍사덕 총무의 '나 홀로 소신' 발언을 당내 '2인자 다툼'으로까지 여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아침마다 한나라당 회의를 지켜보는 당직자들은 홍 총무와 이 총장 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신경전 때문에 여간 조마조마해 하는 게 아니다. 특검법 처리 문제 등을 놓고 두 사람이 협의를 해서 통일된 입장이 나오기보다는, 상반된 입장을 그대로 노출시키며 기(氣) 싸움 양상으로까지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 6일 오전 회의에서는 선거구제 문제를 두고 이재오 총장과 홍사덕 총무가 정면으로 맞붙었다. 이 총장은 "17대 총선과 관련해 바뀔 가능성이 전혀 없고 당 차원에서 재론될 가능성도 없다"며 '소선거구제'가 당론임을 분명히 했다. 책임총리제 도입 및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론 역시 "(개인 차원에서) 백가쟁명식으로 논의는 할 수 있으나, 17대 총선까지 당 차원의 개헌 논의는 없다"며 중·대선거구제 개헌의 필요성을 제기한 홍 총무의 주장을 한마디로 일축했다.
이 총장은 특히 다른 자리에서 "당에 직책 있고 책임을 맡은 사람이 당론과 어긋나는 말을 불쑥불쑥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홍 총무에게 직접 쏘아붙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홍 총무는 "선거제도 문제에 대해선 그동안 당 정치발전특위에서 한다고 해 언로가 봉쇄돼 왔으나 이젠 언로를 열어줘야 한다"고 맞섰다. "당내에 중·대선거구제에 대한 지지 견해도 있으므로 선거제도를 당론으로 정하기 위해선 논의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그러나 최병렬 대표 역시 "특검 정국의 초점을 흐릴 수 있다"며 홍 총무의 '개헌 논의' 발언 자제를 촉구하고 나선 바 있어 홍 총무는 '고립무원'이 되고 말았다. 최 대표는 "내년 총선이 코앞에 다가와 있다"고 상기시킨 뒤 "우리는 지금 투쟁중이고, 우리 당이 현재 할 일은 첫째 대여투쟁"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사실상 대선자금 및 대통령 측근비리 특검 정국에 당력을 집중시켜야 한다며 비대위에 힘을 실은 것이다.
최 대표는 이후 '전국구 전원 신인 물갈이', '대선자금 선(先) 공개' 등 대선자금 정국에 따른 정치개혁 방안을 발표하면서도 홍사덕 총무와 조율하지 않은 채, 이재오 총장이나 홍준표 전략기획본부장과 입을 맞췄다. 당 기자실에 홍 총무의 발걸음이 뜸해진 대신 이재오 총장이나 홍준표 본부장이 수시로 모습을 나타내는 것도 이런 당내 분위기를 반증하고 있다.
최 대표, 전국구인 홍 총무와 상의 없이 "전국구 전원 신인 물갈이" 발표
심지어 초선 의원인 심재철 의원까지 나서 홍 총무의 개헌 제기 배경에 대한 의혹의 시선을 보냈다. 심 의원은 7일 오전 의원총회에서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을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내년 총선에서 제1당이 돼, 총리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넘어 오만감"이라며 "본인의 정치적인 거취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냐"고 꼬집었다.
'본인의 정치적 거취'라는 말에는 이런 뜻이 담겨 있다. 전국구인 홍 총무는 오세훈 의원에게 지역구를 물려줘 다시 돌아갈 지역구도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최 대표의 '전국구 전원 신인 물갈이' 발표로 전국구조차 더 이상 보장받을 수 없게 되자, 내년 총선을 앞두고 중·대선거구제 도입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는 것.
"총무가 중·대선거구제와 분권형 대통령제를 말했는데, 선거구제는 의견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분권형 대통령제는 지금 이 시기에 논의할 과제도 아니고 시기적으로 불가능하다. 때만 되면 개헌을 얘기하는데 제발 거론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중·대선거구제와 분권형 대통령제를 동시에 말하는 것이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중·대선거구제를 상대방에게 주고, 우리가 분권형 대통령제에 대한 약속을 받아내는 빅딜을 하려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홍사덕 총무는 심재철 의원이 발언하는 내내 단상 왼편에 앉아 굳은 표정을 지으며 곤혹스러워했다. 그러나 심재철 의원의 비난은 이날 홍 총무가 겪어야 했던 '수난'의 예고편에 지나지 않았다.
이날 오후 국회에서 노무현 대통령 측근 비리의혹에 대한 특검법안 처리가 무산되자, 이재오 총장, 홍준표 본부장 등 당내 의원들은 홍사덕 총무를 비롯한 총무단을 향해 거세게 항의했다. 최병렬 대표도 "(열린우리당과) 합의가 됐다고 하더니…"라며 홍 총무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박관용 국회의장은 이날 열린우리당이 '상임위를 통과한 법안은 1일이 지나야 본회의에 상정할 수 있다'는 국회법을 들어 특검법안 상정을 반대하자, 전윤철 감사원장 임명동의안만 안건으로 상정하고 표결을 실시했다. 그러자 정의화 수석부총무가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투표를 하지 말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홍준표 한나라당 전략기획본부장은 큰 소리로 "임명동의안 투표가 시작되면 아무 소용이 없다"며 "투표 시작 전에 막아야지, 투표가 시작되고 나면 (투표를 거부하는 게) 무슨 소용이냐"고 총무단을 향해 호통을 쳤다.
이재오 총장도 "열린우리당이 반대할 것을 알았다면 왜 애초에 특검법 상정과 감사원장 임명동의안을 뭉뚱그려서 다음주에 처리하지 않았느냐"고 홍 총무의 처리방식을 강하게 질책했다.
특히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인 이방호 의원은 본회의장 입구 복도에서 정의화 수석부총무를 향해 "저게 총무야? 사쿠라지"라며 홍사덕 총무에 대한 욕설을 퍼부었다. 정 부총무가 "총무의 잘못이 아니라 국회법이…"라며 해명했지만, 얼굴이 붉게 상기된 이방호 의원은 다시 큰 목소리로 "그럼, 총무가 국회법도 모른다는 말이냐"고 쏘아붙이며 험악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이날의 '자중지란'은 그동안 홍사덕 총무와 비대위 체제 사이에 쌓인 앙금이 폭발한 결정판이었다.
홍사덕 총무의 제2의 위기상황, 어떻게 극복할까
하지만 이를 두고 홍 총무가 완전히 '코너'에 몰렸다고 보는 시각은 드물다. 현재는 최 대표가 홍 총무를 배제한 채 대선자금 정국 돌파를 시도하는 등 달라진 총무의 위상을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홍 총무 역시 소속 의원들의 선출로 당선됐다. 또 당내 지지기반은 최 대표가 앞서지만, 홍 총무의 정치력 또한 만만치 않다는 게 중론이다.
물론 두 사람의 갈등은 상당기간 지속될 전망이다. 또한 분권형 대통령제와 중·대선거구제 개헌 논의가 홍 총무의 단순한 '정치적 시위'라는 시각이 있기도 하지만, 한편에서는 당내 일부 중진과 소장파를 중심으로 지지를 얻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당내 개헌 논란 역시 쉽사리 정리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어쨌든 홍사덕 총무가 지난 7월 초 대북송금 특검법안 처리 문제로 야기된 자신의 퇴진론에 이어, 두번째 맞게된 위기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낼 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