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어머니는 길을 걷다 돌무덤이 보이면 합장을 하셨다. 어머니는 높은 산에 우뚝 서 있는 기암괴석이 보이면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으셨다. 꼭 그 자리에 서서 두 손을 모으고 합장을 하셨다.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는 자식들에게 고비가 되는 일이 있을 때마다 그 농도가 짙어졌다. 특히 초하루만 되면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정한수를 떠놓고 기도를 드리셨다. 당시 나는 가장 밑바닥 신앙에 의존하는 어머니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나 아직도 그때 장독대에서 깜빡거리던 촛불은 내 가슴속에 남아 있다. 비록 지금은 세상을 떠나셨지만, 그때 어머니가 내게 주신 가장 소중한 것은 '기도하는 마음' 이다.
낙엽이 떨어지는 계절이 되면 그리움이 시야를 가린다. 이럴 때 그리움이 넘쳐 체념을 한 사람이 있다면, 돌아가신 부모님이 보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게다. 생전의 어머니가 기도하시던 모습을 더듬으며 찾아간 곳은 한라산 골짜기에 있는 '금봉곡 석굴암'이다.
제주시에서 1100도로를 따라 한라산 서북쪽 제2횡단도로를 가다보면 아흔 아홉 골이란 산이 있다. 이 산은 크고 작은 골짜기가 마치 밭고랑처럼 무수히 뻗어내린 봉우리이다. 이 봉우리마다 갖가지 수림이 울창하고, 깊은 숲 속에 기암괴석이 서 있다.
그 골짜기는 골이 아흔 아홉 개라 해서 이름을 아흔 아홉 골이라 한다. 아흔 아홉 골 첫 머리에 해당하는 '골머리'에 가면 유난히 까마귀가 많다. 더욱이 '골머리' 위쪽 금봉곡 골짜기에 있는 석굴암 가는 길은 많은 사람들에게 산책 코스로 알려져 있다. 그 산책로에는 급경사로 암벽이 있어 밧줄을 타고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등산을 하는 기분이다.
아흔 아홉 골의 골머리 입구에는 벌써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 할 일을 다하고 떨어진 낙엽이 금봉곡(족은드레왓 이라고도 함)의 골짜기를 차곡차곡 덮고 있다. 입구에서 석굴암까지는 40분 정도가 걸린다. 석굴암은 대한불교 태고종으로 절이라기보다는 조그만 암자 같다.
석굴암은 깊은 산 속에 자리잡고 있어 식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석굴암으로 향하는 사람들은 마실 물을 등에 짊어지고 올라간다. 차곡차곡 쌓인 낙엽 위에는 누군가가 길어다 놓은 물이 있다. 석굴암으로 향하는 사람들은 누가 부탁을 한 것도 아닌데, 배낭 속에 물을 넣고 올라간다.
아흔 아홉 골의 골머리에 서면 희비가 엇갈린다. 그 이유는 골머리 북쪽에는 충혼묘지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뿐이 아니다. 제주의 아픈 역사를 꺼내자면 아흔 아홉 골에는 4·3의 아픔이 가장 많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어떤 이는 이곳에 오면 아직도 피냄새가 나는 것 같다고도 한다. 그만큼 아흔 아홉 골의 골짜기마다 한이 서려 있다. 깊은 골짜기에 숨어 있는 석굴암과 골머리 주변에 천왕사라는 절이 있어 기도하는 불자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기도 하다.
급경사인 계단을 따라 올라가노라면 숨이 가쁘다. 등에 물까지 짊어졌으니 배낭도 무겁다. 자연림이 덮은 산에는 나무들이 모두 옷을 벗었다. 계단마다 수북히 낙엽이 쌓여 바람소리와 함께 바스락거린다.
골머리 오름을 포함하는 일련의 아흔 아홉 골은 조면암질 용암분출활동에 기인된 결과로서 분출 후 물리적으로 심한 풍화작용을 받아 만들어진 지형이다. 따라서 이 산책로를 따라가면 등산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 급경사를 올라가다 보면 산 속에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계단이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키 작은 조릿대와 하늘을 찌를 듯한 적송 사이에는 갈기갈기 찢어진 계곡이 있다.
적송과 낙엽수가 우거진 혼재림을 뚫고 금봉곡의 중턱에 이르면 갑자기 바람이 불어온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씻고 쉬어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적송이 우거진 부근에서 보이는 도심의 풍경 또한 친근감이 느껴진다.
이 골짜기를 가다보면 신의 섭리가 얼마나 무한한가를 느끼게 된다. 전설이지만 이 골짜기는 본래 아흔 아홉 골이 아니라 백 골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많은 맹수가 날뛰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중국에서 스님 한 분이 건너와 백성들을 모아 놓고 맹수를 없애 줄 테니 '대국 동물대왕 입도'라고 큰 소리로 외치라고 했다. 백성들은 좋아서 큰 소리를 쳤고 맹수들이 백 골에 모여들었다.
그러자 스님은 "너희들은 모두 살기 좋은 곳으로 가라. 이제 너희들이 나온 골짜기는 없어지리니, 만일 너희들이 또 오면 너희 종족이 멸하리라"며 맹수를 향해 소리치니, 호랑이, 사자, 곰 할 것 없이 다 한 골짜기로 사라졌다. 그 순간 그 골짜기도 없어져 버렸다. 그 후 이 산은 아흔 아홉 골밖에 되지 않았고, 따라서 제주에는 맹수가 나오지 않는다는 얘기가 있다.
이를 아는 듯 적송의 뿌리가 주름살처럼 얽혀 있다. 어머니의 주름살을 보는 듯하다. 이곳부터는 내리막길이다. 가까스로 '금봉곡 석굴암'이라는 표지만이 보인다. 한 사람만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좁은 산길인데도 오고 가는 사람들은 서로가 양보하며 길을 내 준다. 도심지에서도 저렇게 양보의 미덕을 쌓으며 살았으면 좋겠다.
석굴암에서 들리는 스님의 기도 소리가 바람을 타고 금봉곡 골짜기에 울려 퍼진다. 골머리 정상을 타고 뻗어내린 골짜기에는 보일 듯 말 듯 기암괴석이 보인다. 칠성바위, 보살바위, 세종 등 아흔 아홉 골의 영혼은 이 기암괴석이 지키고 있는 것 같다.
생전에 어머니가 그랬듯이 보일 듯 말 듯 서 있는 기암괴석을 향해 합장을 한다. 나이를 먹고 보니 나도 어머니처럼 간절해지는 것이 너무 많다. 한때는 어머니가 밑바닥 신앙에 의존한다고 싫어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어쩌랴! 길가에 쌓아 놓은 돌무덤 위에 자신의 돌을 쌓아 가고 있음을. 그리고 높은 산 속에 우뚝 솟아 있는 기암괴석이 내 마음속에 수호신으로 다가오는 것을.
나무뿌리에 얹혀있는 암벽이 금방이라도 계곡으로 떨어질 것 같다. 그 바위를 비집고 내려가면 석굴암이 있다. 이곳에서는 나무 뿌리 하나에 발을 의지하게 되고, 해묵은 나뭇가지도 손잡이가 되어 준다. 만물이 이렇게 공생공존하며 살아가고 있음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행여 발을 헛디디면 벼랑 아래로 굴러 떨어질 것만 같다. 그러나 아무도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다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중생들이 쌓아 올린 돌무덤이 있다. 그 돌무덤 위에 켜 있는 촛불이 훈훈하게 느껴진다. 이 촛불이 아흔 아홉 골짜기를 다 비쳤으면 좋겠다. 그래서 역사의 현장에서 말없이 숨져간 선조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잠재웠으면 좋겠다.
후두둑 후두둑. 낙엽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소낙비가 내렸다. 어디서 몰려왔는지 하얀 안개가 산자락을 휘감고 골짜기를 에워싸고 있다. 겨울비는 쉽게 그치지 않는다.
'금봉곡 석굴암'에는 저마다 소원을 빌기 위해 속세를 떠나온 사람들로 가득하다. 암굴에 모셔놓은 불상을 바라보며 합장을 하는 사람. 엎드려 기도를 하는 사람. 이 순간만은 저마다 마음속에 소원을 담고 가장 진실해 지는 순간이다. 현재의 내 모습을 보는 듯하다.
바위 밑에 앉아 있는 동자승들도 겨울비에 흠뻑 젖어 있다. 높이 10m에 병풍처럼 서있는 벼랑바위도 안개에 싸여 있다. 산이 깊으면 그 골짜기도 깊다고 했던가. 골짜기가 깊으니 내 마음 또한 깊어진다. 그리고 그 깊은 마음으로 어머니가 걸어오신 길을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참 다행이다.
'나무십륙대 아라한 성중'. 수도승의 수행 장소였으리라고 짐작하는 석굴암 바위에 새겨진 마애명을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러나 잠시 속세를 떠나 골짜기 깊은 아흔 아홉 골 암자에서 마신 커피맛은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묵은 찌꺼기를 걸러내기라도 하듯 그 커피의 온기는 아직도 내 목구멍에 남아 있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