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이 정상적으로 받은 후원금은 정치자금법에 의해 공개를 못하게 돼있다. 이것을 우리가 공개했을 경우 공개한 사람이 정치자금법에 의해 처벌받는다. 제가 사무부총장으로서 장부를 보고 있지만 제가 공개하면 제가 처벌받는데 어떻게 공개하나. 세상에 자기가 처벌받는데 법에 없는 일을 할 사람이 누가 있겠나."
박승국 한나라당 제1사무부총장이 18일 주요당직자회의에서 쏟아낸 말이다. 한마디로 정치자금법을 위반할 수 없어 검찰의 회계자료 제출 요청에 응할 수 없다는 얘기다.
한나라 "후원금 내역 보고 싶으면 정치자금법에 따라 영장 발부 받으라"
박 부총장은 이어 "우리는 5대기업 후원금 내역 등 검찰에서 요구하는 것은 모두 공개해줬다"면서 "우리에게 공개하라고 하지 말고 꼭 이것(후원금 내역)을 보고 싶으면 정치자금법에 따라 영장을 발부받으라"고 말했다.
박 부총장은 또 한나라당 회계장부의 비교우위를 유독 강조했다. 그는 "마치 한나라당은 공개하지 않는 것처럼 얘기하고 열린우리당은 공개하는 것처럼 말을 하는데 열우당과 한나라당은 장부가 틀리다"며 "한나라당은 옛날부터 전통성 있게 후원금과 당비를 갈라서 복식장부를 잘해놔서 일목요연하다"고 주장했다.
박 부총장에 이어 은진수 수석부대변인도 회의가 끝난 후에 검사출신답게 정치자금법 조항을 들고 나와 "정치자금법은 적법한 후원금을 낸 사람들을 보호하게 돼 있다"면서 법 조항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정치자금법 제9조 2항을 보면 법원이 재판상 요구하는 경우와 선관위가 확인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후원회 회원명부를 임의로 열람할 수 없다. 그 이외의 경우에는 법원이 발부한 영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제31조를 보면 적법한 영장없이 회계장부 열람을 강요할 때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벌금 400만원 이하의 처벌을 받게 돼 있다. 또 회원명부에 대해 직무상 알게 된 사실을 누설하면 역시 2년 이하 징역 또는 3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게 돼 있다."
은 부대변인은 이어 "현재 대검 중수부 수사관이 전화를 해서 영장도 없이 적법한 절차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후원금 자료를 제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면서 "검찰은 적법한 수사를 하기 바란다"고 요구했다. 그는 "정치자금법에 따라 적법한 절차를 거친다면 한나라당은 흔쾌히 전폭적으로 자료를 제출하겠다"고 덧붙였다.
선관위 "정당 스스로 후원인 공개하면 위법 아니다"
그렇다면 한나라당의 주장대로 후원회 회계자료를 검찰에 제출하는 것이 정치자금법 위반일까. 지난 10월 21일 경실련의 공개질의에 대한 중앙선관위의 답변내용에 비추어 보면 한나라당의 법 해석은 설득력이 떨어져 보인다.
당시 경실련에서 '정치자금 후원인 신상공개 금지' 규정에 대한 법 해석을 공개질의하자 중앙선관위는 "후원인들의 명단공개는 위법이 아니다"고 밝혔다. 당시 중앙선관위의 답변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현행 정치자금법에는 정치자금 후원인의 명단공개를 명시적으로 금지한 규정이 없어 후원인들의 명단 공개가 위법이 아닌 것으로 해석된다. 정치자금법의 목적은 정치자금 회계의 공개를 통해 민주정치의 건전한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다. 현행법은 정액영수증에 정치자금을 주고받은 자의 인적사항 기재를 금지하고 있지만, 후원인 인적사항을 정당이 스스로 공개하는 것까지 금지하는 규정은 없다."
물론 중앙선관위는 "다만 인적사항의 공개가 의무적인 것은 아니다"라고 덧붙이긴 했지만 정당에서 스스로 후원인 명단 등을 공개하는 것이 법에 어긋나지 않는 내용만은 분명해 보인다.
시민단체들의 시각도 중앙선관위의 유권해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고계현 경실련 정책실장은 한나라당의 정치자금법 해석에 대해 "견강부회식 해석"이라며 "기부받은 측에서 후원인 명단 등을 공개하는 것은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반박했다. 고 실장은 "한나라당이 정치자금법 규정을 근거로 검찰에 회계자료 등을 제출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국 대선자금 수사에 협조하지 않겠다는 얘기"라고 일축했다.
"한나라당은 검찰수사에 협조를 하든지 자발적으로 공개하든지 둘 중에 하나는 해야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검찰수사에도 비협조적이고 자발적 공개도 하지 않고 있다. 한나라당은 수사대상이다. 물론 수사협조에 대한 판단은 자신들이 할 문제지만 대선자금 수사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있는데 수사에도 비협조적이고 자체공개도 거부한다면 검찰이 강제로 수사할 수밖에 없다."
고 실장은 특히 '영장을 발부받아 적법한 수사를 하라'는 한나라당의 주장에 대해 "오히려 한나라당이 검찰로 하여금 영장을 발부받아 강제수사를 하게 함으로써, 자신들이 당하고 있다는 인상을 국민들에게 주기를 바라고 있을지 모른다"고 의구심을 나타냈다.
이재경(정치학. 한국시사정보센터 소장) 한신대 외래교수도 "한나라당이 엄청난 검은 돈의 흐름에 대해 석고대죄하겠다고 해놓고 지금 와서 법리를 따지는 것은 국민을 우롱하는 정치술수"라고 혹평했다. 이 소장은 "이는 한나라당이 개정대상인 정치자금법을 악용해 수사를 피해 가려는 얕은 수법"이라며 "결국 감추고 싶은 비밀이 많다는 점만 반증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검찰수사에 협조하지 않으면 결국 강제수사밖에 없어
한나라당이 최근 '900억원 수뢰설' 등 노 대통령의 측근인 최도술 전 총무비서관에 대한 폭로전을 다시 시작한 것도 '검찰수사에 비협조적'이라는 비난여론에 물타기 하려는 것 아니냐는 곱지 않은 시선마저 존재한다.
또한 이재현 전 재정국장과 함께 SK로부터 받은 100억원을 당사로 옮겼다는 의혹을 사고 있는 공호식 전 재정국 부국장과 봉종근 전 재정국 부장이 아직까지 검찰소환에 응하지 않고 있고, 검찰에서는 이들에 대한 체포조까지 결성했다는 후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자금법에 대한 법리논쟁을 그럴싸하게 펼치며 검찰에 회계자료 등을 제출하지 않은 것은 원내 제1당으로서 어울리지 않는 행태라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불법 대선자금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기 위해서라도 한나라당은 검찰에서 요구하고 있는 관련자료들을 제출하는 게 마땅하다.
"한나라당 장부는 옛날부터 잘해놨다"는 박승국 제1사무부총장의 얘기처럼 후원금과 관련된 회계자료들에 불법적인 내용이 없다면, 검찰의 요구에 불응할 이유가 없다. 한나라당이 끝까지 거부할 경우 결국 원하든 원치 않든 검찰의 강제조사밖에는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