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기 때문에 한라산에 오를 때마다 나는 다시 태어나는 기분으로 첫 발을 내디딘다. 그것은 내 어머니처럼 내 안에도 아직 토속신앙의 기도 의식이 잠재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지난 일요일 아침 7시, 한라산 어리목 광장. "푸드득~푸드득~" 까마귀 한 마리가 밤새 내린 찬 서리에 몸을 털고 비상을 한다. 한라산에서 맞이하는 휴일의 아침은 또 다른 감흥에 젖는다.
사방이 아직 잠에서 덜 깬 듯 어둑어둑하다. 어리목 광장은 사제비 동산과 어승생악이 감싸고 있기 때문인지 바람 한 점 없었다. 새벽의 정적을 깨는 것은 한라산에 터를 잡고 살아온 사람들이 몰고 온 자동차의 행렬이다.
겨울 산행은 항상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 한 하늘 아래 살면서도 서로가 각자의 일터에 열중하다 보니 얼굴 보기가 힘든 사람들. 그들과의 만남이 한라산 어리목 광장에서 이루어졌다.
한라산 등반 코스는 4군데가 있다. 유일하게 정상까지 갈 수 있는 코스는 성판악 코스와 관음사 코스다. 그리고 해발 1700m 고지 윗세오름까지 갈 수 있는 코스는 영실 코스와 어리목 코스로 나누어진다.
그 중에서도 겨울 산행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곳은 어리목 코스로, 4.7km 등산로로 이어진다. 계단을 따라 올라 가야 하기 때문에 마치 수행을 하는 기분이다. 더구나 사방이 숲으로 덮여 있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사제비 동산으로 이어지는 첫머리에서는 이제 막 동이 트고 있었다. 동쪽 마을 바닷가에서 올라온 해는 부끄러운 듯, 쉬이 그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겨울 나무도 침묵을 지킨다. 새소리, 물소리, 낙엽 떨어지는 소리조차도 들리지 않는다. 다만 등산객들의 발자국 소리만이 아침의 정적을 깨고 있었다.
등산로 입구를 따라 500m쯤 가니 졸참나무 숲 속으로 이어지는 어리목계곡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글동글한 돌을 밟고 계곡을 넘어가면 다시 계단이 이어진다. 해발 1400m 고지까지 숲에는 졸참나무, 서어나무, 산벚나무, 새우나무, 단풍나무, 엄나무, 비목, 솔비나무, 고로쇠나무, 때죽나무, 물참나무 등이 겨울산행의 운치를 자아낸다.
이곳에서 아주 귀한 손님을 만났다. 저녁잠을 설치고 아침을 기다려온 친구들. 그들은 유치원생들이었다. 이른 아침 엄마 아빠 품에서 재롱을 부려야 할 시간에 이곳에 온 이유는 무엇일까? 낙엽이 쌓인 계단을 오르는 꿈나무들의 뒷모습이 고목처럼 느껴진다.
"애야? 힘들지 않니? 천천히 올라가렴."
감동이 물꼬를 트는 순간이다.
"아니요, 힘들지 않아요."
꿈나무들의 대답이 더욱 감동을 준다. 이쯤에서 한번 쉬어 가리라 마음먹었는데, 내 생각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1시간쯤 해발 1300m 고지까지 걸어 올라가면 수령 오백 년 이상 된 '송덕수'란 이름의 물참나무를 만나는데 이곳이 바로 등산객들의 쉼터다. 송덕수의 고목 밑에는 평상이 놓여 있다. 땀을 식히는 사람들의 모습이 힘들어 보이지는 않는다. 귤을 까먹는 사람. 샌드위치로 아침 요기를 하는 사람. 커피를 한 잔 마시는 사람.
어리목 출발점 1.6km지점에 있는 송덕수는 수령이 500여 년 된 물참나무이다. 이 나무는 흉년이 들 때 찾아가면 주변에 도토리가 쌓여 기근을 면하게 하여 주었다는 나무로, 매년 감사의 제사를 올렸다 한다. 오래 전 제주도에 흉년이 들어 기근에 시달리게 된 사람들이 이 나무의 열매로 죽을 끓여 굶주림을 면했다는 이야기가 따뜻한 감동을 준다.
계단을 따라 겨울 나무 숲으로 이어지는 산행. 2.4km의 겨울나무 숲 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찬란한 아침 햇살이었다.
"벌거벗은 나무가 부끄러워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더니,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구나."
사제비 동산으로 이어지는 벌판에는 아침 햇살이 무르익고 있었다. 사제비 동산은 제주시와 북제주군 경계인 어리목계곡을 사이에 두고 서쪽으로 벌어진 말굽형 화산체로, 어승생오름과 마주보고 서있는 한라산국립공원내에 위치한 오름이다.
사제비동산에서 윗세오름 대피소까지 긴 완경사의 고원이 펼쳐진 가운데 진달래, 꽝꽝나무 등 관목군락을 누비는 등산로가 있으며, 중간에 만수동산이라 불리는 봉우리가 구름에 걸쳐 있었다. '망동산'이라 불리는 이 동산은 마소를 치는 '테우리'들이 망보는 동산이다.
사제비는 제비가 죽어 있는 형국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지만, '사제비'는 '새잽이'에서 유래한 말로 '새 매'를 이르는 제주 방언이다. 억새와 제주조릿대가 무성하다.
그러나 사제비 약수터와 오름 약수터에는 물이 말라 버려 있다. 신선이 모두 마셔 버렸을까? 물 한 모금을 축이고 싶었으나 만세동산으로 이어지는 오름들과 수평선처럼 펼쳐진 구름을 보니 어느덧 마음이 시원해진다.
해발 1600m 고지에서 뒤를 돌아보니, 망체오름, 어슬렁오름, 삼형제 오름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펼쳐진다. 한라산은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산이라서 그런지 기상 변화가 매우 심하다. 그렇기 때문에 산행을 하다가 어디에서 비와 안개 바람을 만날지 모른다.
그래서 충암 김정 선생님은 이태백의 싯귀를 떠올리며 '구름이 드리우니 대붕은 날개를 펄럭이고, 파도가 움직이니 거오는 물에 잠긴다'라는 서기를 느꼈다고 한다.
망망대해처럼 펼쳐지는 고원에는 봄을 기다리는 철쭉이 얼굴을 내밀었다. 내일을 기다리는 겨울 철쭉 주변에는 초원 곳곳에 보송보송 고산식물의 보물 창고가 있었다.
윗세오름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데도, 동능의 윗세오름 정상은 왜 이렇게 멀게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산행을 하다 보면 늘 정상 가까이에서는 길이 꼬불꼬불 나 있다. 이 꼬불꼬불 난 길 때문에 사람들을 정상을 포기하고, 더디 가게 만든다. 이것이 신의 섭리인지도 모르겠다.
윗세오름 정상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두 마리의 까마귀였다.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것은 항상 까마귀다. 백록담을 바라보며 앉아있는 까마귀에게 빵 한 조각을 던져 주니 반갑다는 듯 인사를 한다.
윗세오름 동능 정상은 영실 코스와 어리목 코스 두 갈래 길에서 걸어오는 사람들이 만나는 장소이다. 서로가 다른 길에서 출발을 했지만 영실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기암괴석에 흠뻑 빠져 절경을 감상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리목 코스로 등산을 한 사람들은 겨울나무 사이로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면서 자신의 수행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보일 듯, 말 듯 구름에 가려진 신기루 같은 한라산의 풍경은 잡힐 듯, 말 듯 멀어져 가는 우리의 이상과도 흡사하다. 그래서 항상 한라산에 오를 때마다 신의 섭리에 탄성을 지른다. 그리고 순리대로 살아가는 것을 배우곤 한다.
숲속 계단으로 이어지는 어리목 코스의 한라산 등산은 3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그러나 올라온 길을 다시 밟고 내려가야 하듯이, 우리가 가야할 길은 항상 길에 연하여 다시 길이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