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남겨진 시간들만으로 올해 이루지 못한 소원들을 갈무리하기에는 무엇인가 아쉬움이 많다. 아쉬움을 희석시키기 위해 떠나는 서귀포 70리 길. 바람도 잠이 들어 고요한 사찰을 찾았다.
서귀포시 하원동에 고즈넉하게 자리잡은 법화사지. 겨울에 떠나는 사찰기행은 뭔가 특별함이 있다. 그것은 고즈넉한 사찰의 정경에 흠뻑 빠져, 자신을 낮추고 세상을 긍정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법화사지는 고려시대 제주 최대의 가람으로 전해진 사찰이다. 또한 법화사지는 12세기∼15세기에 제주도에서 번창했던 절이며, 제주도 산남 지역의 불교문화의 진원지이다. 지방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된 법화사지는 1269년(고려 원종 10년)부터 1279년(충렬왕 5년)까지 중창불사를 하였고, 1653년 이전에 폐사(탐라지)가 되었다.
현재의 대웅전은 1987년에 세워진 것이며, 1983년 발굴조사 때 현 대웅전 위치에서 법당지로 보이는 건물터를 발굴했다. 규모가 정면 5칸, 측면 4칸의 건물로 기단면적이 약 330㎡인 대단히 큰 건물이었다. 기단의 지대석은 2단으로 처리되었고 면석이 놓이는 자리에는 턱이 있어 그 기법이 특이한 고식이다.
1406년(태종 6년)에는 명나라의 요구에 의하여 원나라에서 제작한 미타삼존불상이 명나라로 강제 이송되었고, 비보사찰로서 한때는 노비가 280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법화사지에는 구품세계관을 의미하는 극락정토인 2700평 규모의 '구품연지(아홉개의 품으로 구성된 연못)'가 복원되어 있다.
법화사지에 들어서자 제일먼저 눈에 띄는 것은 앞마당에 자리잡고 있는 구품연지였다. 구품연지는 불국사 앞마당에 있던 큰 연못의 이름으로, 극락정토 구품의 세계관을 상징하는 연지를 일컫는다. 법화사지의 구품연지는 발굴조사 결과, 그대로 복원한 것이다.
특히 7차례의 사찰 주변 일대 발굴조사 결과 오백나한전 터를 비롯 여러 동의 건물과 3천8백평의 구품연지를 확인하였다. 살아 생전 행업의 우열에 따라 정토에 왕생하는 자가 앉은 9종의 연화대인 구품연대는 품위에 따라 상상품은 금강대, 상중품은 자금대, 상하품은 금연대, 중상품은 연화대, 중중품은 칠보연화, 중하품은 (불명), 하상품은 보련화, 하중품은 연화, 하하품은 금연화에 앉아 왕생한다고 한다. 더욱이 연지 가운데 섬이 있다.
불자가 아니더라도 사찰에 들어서면 마음이 숙연해 진다. 그것은 복을 비는 마음보다 저마다 구도의 길을 걸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이치를 느끼게 하는 눈이 보인다고나 할까?
제일 먼저 대웅전에 들어가 3배를 올렸다. 처음 사찰에 찾았을 때가 기억난다. 그때 나는 어처구니없게 부처님께 아주 많은 것을 달라고 기도했었다. 뭔가 답답함이 있을 때,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아이들이 대학 수능시험에 몰입할 때 등 바라는 게 있으면 부처님에게 구구절절 기도의 주문이 많아졌다.
시간이 흘러 불자의 길을 가게 되었고, 예전에 내가 드렸던 기도가 얼마나 허황된 꿈이었던가를 깨닫는 순간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찰로 향하는 길에서 내 마음을 다스리게 된다. 물욕의 마음을 비우기 위해 가끔씩 사찰을 찾는다. 그리고 처음에는 들리지 않았던 부처님의 말씀에 조용히 귀 기울인다.
법화사지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조선왕조 태종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법화사에 안치중인 아미타삼존 불상이 원나라 때 양공이 만든 것이라 하여 명나라 사신이 제주도 법화사지까지 와서 가져가려 하자, 조선 조정은 불상보다는 탐라의 형세를 파악하고자 하는 의도로 받아들이고 불상을 가져오게 해 중국에 보냈다고 전해진다.
더욱이 장보고가 중국 산동반도 적산촌에 세운 법화원에 봉안된 주존불이 아미타불이었는데 법화사에도 아미타 삼존불상이 모셔져 있었다. 한편 금당지위에 법화사 대웅전이 복원됐는데 중창당시의 기단석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누구라도 법화사지에 오면 9개의 품으로 구성된 구품연지를 만나게 된다. 연지에는 지나간 계절에 꽃을 피웠을 연꽃이 한가로이 물 위에 떠 있었다. 겨울에 만나는 연꽃은 그리 화려하지 만은 않았다. 다리를 건너 연지 한가운데 있는 섬으로 들어가 본다. 그 섬에서 서 있으니 무인도에 들어온 착각에 빠진다. 중생인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실감하게 하는 순간이다.
비록 연지 위에 떠 있는 연꽃을 볼 수는 없지만, 진흙에서 태어나 맑고 고운 물결에 씻기어도 요염하지 않은 자태를 상상해 본다. 그래서 그 연꽃의 자태처럼 교만하지 않고 나 자신의 분수를 지키는 중생이기를 소망한다.
구품연지를 한바퀴 돌아 다시 제자리에 서면 백팔년을 버텨왔을 백팔송 앞에 서게 된다.
"서홍마을 눌왓동산 백팔여년 낙락송과
동광마을 지켜오던 수수만년 염원석이
고찰에서 서로 만나 좋은 인연 이루었다
오랜 세월 쌓은 정성 영원토록 기리고자
유서 깊은 법화도량 복원불사 갈망하며
자비로운 세존님께 소원성취 기원하세"
백팔여년의 낙락송과 수수만년의 염원석이 서로 만나 좋은 인연을 이루었던 것만큼 법화사지에서 고귀한 인연이 만났다. 고찰에서 만나는 스님과의 인연은 더 없는 행운이다.
등뒤에 서 계시던 법화사지 기도 스님은 네잎크로바의 행운을 내게 주셨다. 법화사지 앞뜰에서 뜯었다는 네잎크로바는 생태학적으로 10만장 가운데 하나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네잎크로바를 정성스럽게 코팅을 해서 만든 행운의 부적을 보니 어린시절 토끼풀 생각이 났다. 토끼풀 꽃을 따서 시계를 만들고 꽃반지를 만들어 소중하게 간직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스님께서는 말씀하신 네가지 행운은 '건강과 부 그리고 신앙생활과 좋은 인연'이었다.
법화사지는 비보사찰로 노비만도 280인이나 있는데, 1408(태종 8년)에 의정부에 아뢰어 제주목 수정사 노비 130인과 함께 각각 노비 30인만 주고 나머지는 모두 전농사에 귀속시켰다고 한다. 그 이후로도 법화사는 가장 큰 비보사찰로 유지되어 오다가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여 이원진이 '탐라지'를 기록할 즈음(1653년)에 폐사되었다.
한편 법화사지 대웅전 기단석은 이중턱을 갖고 있다. 이는 불국사 기단석과 동일하게 이중턱이었다는 점에서 법화사지가 신라시대 창건이 확실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는 이중턱 기단석은 신라시대 이외에는 나타나지 않는 양식이기 때문.
연지의 길을 따라 느리게 걸어가면 아주 작은 것들이 보인다. 양지 바른 곳에 피어 있는 한 송이 제비꽃. 그리고 어디선가 흘러 내려오는 물소리. 먼저 겨울 소식을 알리는 이름 모를 새. 무리 지어 피어 있는 토끼풀 꽃. 토끼풀 위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던 어린시절의 추억까지 모조리 기억해낼 수 있다.
구품연지는 바라만 보아도 극락정토에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숨가쁘게 달려왔던 길을 뒤로하고, 잠시 자신을 낮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곳. 겨울 산사는 너무나 조용해서 풍경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