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알면 못 가게 할까 봐 일본으로 떠나는 날에서야 가르쳐 줬습니다. 허겁지겁 달려온 부모님은 기차가 출발 할 때서야 제 모습을 봤던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땅을 치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중학교도 보내준다는 일본 교장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습니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 할머니들이 25일 나고야 출발에 앞서 광주유족회 사무실에 모였다. 낯설고도 먼 땅 일본 나고야는 할머니들의 젊은 청춘을 송두리째 앗아간 한이 서린 곳이자, 지금도 천형처럼 이들의 상흔이 배인 곳이다.
양금덕(광주·73) 할머니가 일본 교장 말에 속아 일본으로 떠난 건 1944년 5월. 일제는 전세가 불리해지면서 노동력을 조달하기 위해 징병, 징용, 노무자, 정신대 등의 명목으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끌어가기 시작했다. 가난하고 없던 시절, 배고픔을 달래고 공부를 가르쳐 준다는 말은 이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나주 대정 국민학교에서만 이렇게 24명이 일본으로 끌려갔다. 모두 13∼16살 소녀들이었다. 나주, 목포, 순천 등 전남에서 141명, 충남 138명 등 군수업체인 나고야 미쓰비시 항공기 제작사에 끌려온 조선 여성만 약 400여 명에 달했다.
하루 10시간의 중노동을 당하고도 월급 한 푼 받아 보지 못한 이들은 그날그날 허기를 달래는 것조차 고역이었다. 길가에 버려진 수박껍질을 주워먹다 배탈로 고생하고 허망한 줄 알지만 배고픔을 잊기 위해 수없이 물을 들이키기도 했다.
"부모님한테 편지 한 통 쓰지 못했습니다. 감시 때문에 어렵기도 했지만 좋은 소식이라면 모를까 내가 그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차마 그 얘기를 어떻게 부모님께 쓰겠습니까."
해방의 감격도 잠시. 1년 8개월이 남긴 상처는 너무도 컸다. 이들은 한결같이 "일본에 한 번 갔다온 것 때문에 인생을 망쳤다"며 울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페인트칠하다 신나가 눈에 들어갔는지 점점 앞이 안 보이더니 지금도 계속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눈 양쪽을 수술해 봤지만 소용도 없고 하도 닦아내다 보니 이렇게 눈이 발갛습니다. 일본 갔다 온 뒤로는 냄새도 맡지 못합니다. 밥 다 태우고 있다고 얼마나 소리를 들어야 했는지 모릅니다."
양금덕 할머니에게는 허리와 옆구리에 지금도 1944년 12월 도난카이(東南海) 대지진 때 입은 흉터가 남아 있다. 그러나 육체적 상처도 상처이지만 '위안부'라는 또 다른 오해와 편견이 남긴 마음의 상처는 훨씬 큰 것이었다. 아직 유교적 관심이 뿌리 깊게 남아 있던 시절. 이들은 어디서 말 한번 제대로 붙여보지 못하고 주위의 차가운 시선을 굴레처럼 감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귀국 후 혼령기를 맞은 양 할머니는 '일본에 갔다 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세 차례나 혼담이 깨지는 아픔을 겪었다. 뒤늦게 남편을 만났지만 평온은 오래가지는 못했다.
"나중에 남편도 어디서 듣고 와서는 '더러운 짓하고 왔다'고 생사람 두들겨 패고, 그때부터 바람이나 피우고 다니고 그랬습니다. 그런 일 없다고 해도 믿질 않고…. 목구멍만 남아 있지 세상을 세상답게 살았겠습니까."
남편의 방관과 잦은 외도로 온전한 가정 한번 이뤄보지 못한 이들 피해자들은 마음의 상처를 스스로 보듬은 채 평생을 죄의식 속에 살아오고 있다.
이들에게 남은 것은 이제 가난과 젊은 청춘을 앗아가고 남긴 병마뿐. 그리고 반사신경처럼 깊게 배인 피해의식이다. 지진으로 허리를 다쳐 물리치료를 받아야 하는 형편에 있는 진진정(광주·73) 할머니는 "자식들한테도 숨기며 지금껏 쉬쉬 하고 살았다"며 "아직도 어디가면 내 말이 나올까 두렵다"고 말했다.
양 할머니는 "몇 해전 텔레비전에 얼굴이 나온 뒤로 한동안 시장에도 못 나갔다"며 "행여나 누가 내 말을 할까봐 먼저 일어나 버린다"고 말했다. 이들 할머니들은 25일 나고야에 나서는 것에 대해서도 '서울에 있는 동생이나 조카한테 잠깐 다녀오겠다'는 것으로 말할 참이란다.
7평 무허가 판자집에 홀로 생활하고 있는 양 할머니는 "몇 년 전까지는 시장에서 시래기도 줍고 조기라도 엮어줘서 용돈이라도 벌었는데 이제 허리통증 때문에 그도 저도 못하고 있다"며 "제대로 못 가르쳐줘서 자기들 살기도 어려운 마당에 용돈 달란 소리도 못한다"고 긴 숨을 몰아쉬었다.
"일본에 동정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죄하고 정당한 보상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의 나라 국민입니까. 70 먹은 노인들이 재판하고 있어도 누구 하나 관심에 둬 봤습니까."
진 할머니는 "허망하기 짝이 없는 내 인생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겠느냐"며 "망가진 내 인생을 어떻게 보상해 줄 것이냐"고 뒤늦은 울분을 쏟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