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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어제 또 한 해의 김장 공사를 모두 마쳤다. 아니, 김장 일은 모두 마쳤지만 아직 뒷처리하는 일이 남았다. 포장을 해 가지고 '택배'를 불러 대전과 경기도 안산 등지로 보내는 일이 남았다. 오늘 그 일을 해야 한다.
우리 집은 올해 김장을 두 번 했다. 지난 15일 내가 대전에 갈 일에 맞추어 한 번 했고, 어제 '본공사'를 했다. 한 해 김장을 두 번 해보기는 처음이 아닌가 싶다.
나는 어디에 출타를 할 일이 생기면 일찌감치 가족에게 알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의논을 하기도 한다. 출타 이유와 행처, 그리고 날짜와 기간 등을 주로 식사 자리에서 밝힌다. 가족과 의논을 하여 출타 여부를 결정하는 경우도 있다.
지난 15일의 대전 출타도 열흘 전쯤에 계획을 밝히고 가족과 의논을 했다. 아내도 동행을 해야 하는 일이어서 의논이 꼭 필요했다. 며느리까지 집을 비우는 이틀 동안의 출타인데도 어머니는 선뜻 승낙을 하시고 오히려 흔쾌한 표정까지 지으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3일 전쯤 속이 탐실하면서도 벌레도 들어 있는 배추 20포기와 무를 여러 개 구입하셨다. 그까짓 배추 20포기 김장은 일도 아니라면서 혼자 배추를 다듬고 절이고 씻는 일까지 손수 하셨다. 저녁에 배추 속으로 넣을 양념 마련하는 일은 큰며느리의 도움을 얻고, 다음날 오전에 배추 속 넣는 일은 뒷동 둘째 며느리의 도움을 받았다. 배추 김장을 마친 다음에는 굴을 많이 넣어서 '흰젖'이라고도 부르는 무생채를 담갔다.
올해는 비가 자주 내린 것이 오히려 배추와 무 농사에는 득이 되었다고 한다. 재배 농가마다 배추밭에 물 한번 줘 본 일이 없다고 한다. 물 잘 먹고 배추들이 쑥쑥 잘 자라니 농약 칠 일도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속이 알차면서도 벌레가 들어 있는 배추들이 많다고 한다. 배추 값도 비싸지 않고….
어머니께서 작업을 하시는 동안 나는 이것저것 잔심부름을 하면서 불안한 눈으로 어머니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2년 전에 대장암 수술을 받으신 어머니는 이제 팔순 노구였다. 팔순 노구로도 여전히 몸을 아끼지 않으시는 어머니의 그런 노동은 내게 불안뿐만 아니라 불만을 안겨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극성스러울 정도로 부지런하시고 챙기는 일이 많으신 어머니가 나는 사실 불만스러웠다. 보조를 맞추어 드려야 하는 일이 귀찮기도 해서지만, 저러다가 큰일이라도 나는 게 아닌가 싶은 탓이었다.
하지만 내가 걱정을 하고 불만을 토로해도 어머니는 아랑곳하지 않으신다. 당신이 마음먹은 일은 다 하신다. 이제는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을 하면서도, 몸져눕기 전까지는 결코 그 책무(?)를 놓지 않을 마음이신 것만 같다.
나는 대전 출타 계획을 어머니께 말씀드리지 말고 슬그머니 갔다 올 걸 하는 생각을 해보았지만, 물론 그것도 온전한 방책은 아니었다. 아내도 동행을 해야 하고 천안 딸아이한테도 가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말씀을 드린 것도 아니었다. 나의 대전 출타가 없더라도 김장철을 맞은 어머니의 노동량에는 전혀 변화가 없을 것임이 너무도 뻔하기 때문이었다.
천주교 대전교구의 '가톨릭문우회' 창립 10주년과 문집 제10 발간을 기념하는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대전에 가는 내 승합차에는 여러 개의 김치 그릇이 실렸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내와 아들 녀석을 태우고 12시 30분쯤에 출발을 했지만 행사가 시작되는 3시까지 대흥동 '가톨릭문회회관'에 도착하기는 이미 그른 일이었다. 김치 때문에 두 곳을 들러야 하니….
먼저 공주 신관동의 한아름아파트에 들러 지난 5월 홀로 되신 장인 어른께 김장 김치 다섯 포기와 무생채를 드렸다. 공주 처가에 어머니의 김치를 드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장인 어른께서 홀로 되신 후로는 처음이라 느낌이 색다른 것 같았다. 그것은 장인 어른께서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다음에는 대전 둔산동 샘머리아파트에 들러 막내동생 집에 김장 김치 열다섯 포기와 무생채를 내려주었다.
그리고 바삐 대흥동으로 달려갔지만 도착 시간은 4시, 행사가 거의 끝나갈 즈음이었다. 그저 멀리에서 와서 늦게나마, 그리고 행사가 모두 끝나기 전에 참석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일차 김장 공사를 한 지 여드레만에 어머니는 다시 본공사를 하셨다. 이번에는 배추 70포기 김장을 하고, 무로 나박김치를 담고, 동치미 공사를 마무리 지으셨다. 이 공사에는 앞동의 대녀, 뒷동의 둘째 며느리, 그 외 이웃 두 분의 도움이 있었다.
우리 집의 이 김장 덕에 성당의 수녀원을 비롯하여 모두 여덟 집이 김장 맛을 보게 되었다. 어머니는 최근에 아이를 낳은 집, 주부의 몸이 성치 않아 김장을 하지 못하는 집, 안팎이 모두 직장에 몸이 매어 김장 공사가 쉽지 않은 집 등등 여러 이웃집들에 김장을 나누어 주셨다. 그런 집들도 김장 마련의 방편이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오늘 마지막으로 경기도 안산의 셋째 딸에게 두 가지 김치를, 그리고 대전 막내아들에게 나박김치와 동치미를 보내면 모든 작업은 완료가 된다. 나는 이 글을 쓰다가 말고 김치들을 포장하는 일을 했다. 두 개는 종이 상자여서 포장을 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지만 두 개는 플라스틱 통을 이용하는 것이어서 좀 애를 먹었다. 은연중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그것을 어머니께 내색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얼마 전에 '지르동치미(어머니만의 표현인데, 아마도 이른 동치미라는 뜻인 것 같다)'를 담그고 며칠 전에 개봉을 해서는 또 여러 이웃집들에 나누어 주셨다. 그 지르동치미가 아무 군맛과 잡맛도 없이 맛이 기가막히니, 어머니의 진짜 동치미에 이웃들의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어머니는 눈이 펑펑 내리는 날 동치미를 꺼내어 이웃들에도 나누어주실 요량으로 올해도 동치미를 많이 담그셨다. 앞 화단의 땅에 묻은 커다란 독이 꽉 차도록 무를 많이 넣으셨다. 어머니의 그런 욕심 때문에 나도 좀 고달픈 일이 많다. 나는 어제 동치미 독에 넣을 세 통의 물을 길으러 해미성지까지 갔다 와야 했다.
어머니의 동치미 담그시는 방법은 참으로 각별하다. 먼저 '맛있게 생긴' 때깔 좋은 무를 잘 씻어서 독 안에 넣으면서 켜켜이 살짝살짝 소금을 뿌린다. 그러고는 사흘 정도 재운다. 그 사이에 온갖 양념거리들을 장만해 놓는다.
사흘이 지나 양념을 넣을 때는 참으로 정성스럽다. 양파와 사과와 배를 많이 썰어 넣고, 마늘, 쪽파, 청각, 생강을 넣는데, 생강 넣는 방법은 유별나다. 생강을 갈아서 베 보자기로 싼 다음 물 속에 넣고 짠다. 그리고 생강이 남아 있는 베 보자기를 독 안에 넣고, 그 위에 살짝 절인 배추를 넣은 다음 마지막으로 조선파를 덮는다.
그 양념들을 넣는 사이사이 물을 붓는데, 그냥 맹물이 아니다. 소금을 타서 간을 맞추고, 당원을 조금 타고, 베 보자기 속의 갈린 생강이 풀어져 섞인 물이다. 그 물을 맨 위에 덮인 조선파 위에까지 차 오르도록 붓는다.
그리고 독의 뚜껑을 덮고, 독 주위에 둥그렇게 성처럼 쌓은 돌 위에다 두꺼운 널빤지를 덮고, 그 위에 무거운 돌을 하나 올려놓으면 작업 끝이다. 어제 어머니는 그 작업을 했고 나와 아내가 도와 드렸다. 이제 그 동치미 독 안에서는 시시각각 신비한 작용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하여 겨울 한철 눈이 펑펑 내리는 날 어머니가 그 독의 뚜껑을 여시게 되면, 군맛과 잡맛이 전혀 없는 내 어머니만의 그 동치미는 우리 집뿐만 아니라 여러 이웃들의 겨울 입맛을 산뜻하게 북돋아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레 입맛을 다시면서도 우울한 기분에 젖는다. 팔순 노구의 어머니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생활이 무한할 수 없는 탓이다. 어머니가 더 오래 사신다 해도, 2년 후에 새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되면, 거기에서도 오늘 같은 동치미를 계속 맛볼 수 있을까?
땅에 묻은 독을 이용하지 않고 플라스틱 통을 이용하여 동치미를 담글 수는 있겠지만, 그 동치미가 지금의 동치미처럼 맛이 온전할까? 생각할수록 괜히 슬퍼지는 마음이다.
잠시 글을 쉬고 슬픈 상념에 젖어 있을 때 택배 차가 왔다. 훗날의 우리 자식들의 공허함이야 어떻든 택배 회사 직원에게 포장한 김치를 내어주고 운임을 치르는 어머니의 표정은 그저 흐뭇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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