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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쏘아올리는 불꽃놀이

일요일 저녁 내내 호텔 근처 성당에서는 찬양을 목적으로 하는 그들만의 불꽃놀이가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고 있었다.

찬양을 위한 도구로 이처럼 요란한 불꽃놀이를 선택한 필리핀 사람들은 모르긴 몰라도 참 유쾌하고 낙천적인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크리스마스 이브부터 1월 1일을 피크로 거리에 화재가 일어나고 폭발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도, 모아둔 돈을 모두 이 불꽃놀이를 할 화약 사는 데 탕진하면서 불꽃놀이를 즐길 정도로 열정적이다. 하지만 불꽃놀이가 사그라들고 아침이 되면 이들은 지난 밤의 난리를 기억 못하는 듯 경건한 마음으로 꽃과 양초를 사서 기도를 하는 독실하고 얌전한 카톨릭신자로 탈바꿈한다.

무엇이 이처럼 얌전한 이들을 밤사이에 열정적으로 변모시키는 것일까? 신을 위한 기도와 신을 위한 불꽃놀이, 혼자서 제멋대로 상상해 본다. 혹 필리핀 사람들는 평상시에는 별을 가슴에 품고 살다가 별에 자신의 꿈을 담아 하늘로 쏘아올리려는 한풀이가 아닐까?

셋째날 아침은 마닐라에서 남동쪽으로 60km 위치한 따까이 따이를 향해 출발하고 있다. 시내를 벗어나 고속도로를 통과한 따까이 따이 인근 지역의 모습은 노는 땅만이 그득한 팍상한 가는 길과는 달리 깨끗하고 정갈하고 넉넉해 보였다. 바나나와 파인애플 농장이 많은 데다가 마닐라 부자들이 따까이 따이쪽에 별장을 두고 있기 때문이리라 추측하니 쓴웃음이 나왔다.

실종된 노블리스 오블리제

솔직히 팍상한을 갔을 때는 잡초만 무성하게 펼쳐져 있는 황량한 땅만 보일 뿐이라서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 모두가 토지의 경우 10년간 땅 점유를 하고 농사를 지으면 점유자의 소유가 된다는 법 규정 때문에 소작인에게 내 땅 빼앗기느니 그냥 놀리는 게 속 편하다는 부자들의 이기심 때문이란다.

결국 쌀농사가 3모작이 가능한 천혜의 기후 속에서 씨만 뿌리면 생산되는 이 천혜의 땅을 지니고도 생산을 못하다 보니 쌀 수출국에서 최대의 쌀 수입국으로 전락할 수밖에…. 노는 땅들의 그 황량함과 부자들의 극도의 이기심 때문에 마음 아파하던 것이 어제였는데 어제와는 다른 이곳 따까이 따이의 풍경을 보니 그 이기심에 분통이 터지고 말았다.

굳이 부자 지주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언급하고 싶지도 않다. 자기네와 관련 있는 곳은 이렇게 비옥하고 넉넉하게 가꿀 줄 알면서 그 많은 자신 소유의 땅을 황량하게 내버려 두는 것이 양심상 가능할까? 법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면 개선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정부는 정부대로, 부자는 부자대로 한치의 틈도 없이 팽팽하게 대치하고 팔장만 끼고 있는 이 사이에도 도처에 빈 땅이 황량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 따알 호수 선착장에서 따알 화산으로 가는 여행객을 기다리는 배
ⓒ 김정은

심란해 할 틈도 없이 어느덧 자동차는 따까이 따이에 도착했다. 지금 가려고 하는곳은 호수 안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활화산, 따알 화산이다.

따알 호수는 마닐라-라구나-바탕가스를 잇는 바다 같은 엄청난 호수이다. 얼마나 규모가 큰지 바람이 심할 때면 파도가 심하게 쳐서 멀미가 날 정도라니 모르는 사람은 꼭 바다라 오인하기 쉽다고 한다.

1572년부터 지금까지 40여 차례 화산 폭발이 진행되었고 최근에는 1992년에 폭발하여 주민 2만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더 이상의 폭발은 없는 듯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직도 여전히 활동을 하고 있는 활화산이라는 사실이다. 처음 폭발하기 이전에 따알 화산의 높이는 3700m였다는데 여러 번의 폭발이 생기면서 지금의 호수가 생기고 세계에서 제일 작은 활화산(295m)이 생긴 듯하다.

말을 타고 따알 화산에 오르기 위해 터덜거리는 지프니에 온몸을 맡긴 채 호수를 향해 출발했다. 모양만 그럴듯하지 승차감과는 아예 담을 쌓은 차, 맨 뒤에 앉으면 고물 엔진에서 쏫아내는 굉장한 매연에 숨이 막히고 기침을 콜록콜록 하기 마련인, 자동차로서의 매력이 전무한 이 차가 필리피노의 국민차로 사랑 받고 있다니 불가사의하다.

분명히 이방인이 알 수 없는 장점이 있을 텐데 도대체 그 장점이란 게 뭘까? 자동차 값도 우리 돈으로 천만 원 정도 한다는데 이런 엔진에, 이런 시설이면 전혀 그런 가격이 나오지 않을 만큼 비싼 가격이다.

그런데도 지프니 3개 정도만 소유하고 지프니 운전만 하면 일등 신랑감이라니 호기심이 동한다. 그러나 지프니의 매력을 깨닫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지만 사람들은 지프니의 매력을 이렇게 말한다.

지프니의 매력은 바로 개방성과 자유라고. 정해진 정류장도 없이 같은 방향이다 싶으면 아무데나 손을 들어 탈 수 있고 내릴 수 있고 매달릴 수도 있는 그런 자유로움이 바로 지프니의 매력이라고 말이다.

칠순 할머니 따알 화산에 말타고 오르다

이번 여행에 함께 동행한 나의 칠순 노모는 터덜 터덜 흔들리는 지프니 벌써부터 걱정이 태산이다. 따알 화산 트래킹을 신청하려니 거의 1시간여씩이나 말을 타고 산에 오르는 것이라 노인분에게는 무리라는 것을 억지로 우겨 지프니를 타고 가는 길이었다. 그러니 이 터덜거리는 지프니 안에 앉아 있으니 불안감이 엄습하는 것 같았다. 나는 불안한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말했다.

▲ 따알 화산을 향해 가고 있는 배. 오늘따라 파도가 치지 않고 고요한 따알 호수 위를 떠있는 듯하다.
ⓒ 김정은

"걱정마세요. 말 타는 게 아무리 험하다고 해도 이 지프니 터덜거리는 것만큼 할까? 이 지프니를 견딜 수 있다면 말 타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아요. 4살짜리도 한다는 트래킹인데요."

말은 그렇게 하고 별문제 없다는 듯 행동했지만 은근히 불안한 것도 사실이었다.

"만약 내가 우기는 바람에 낙마 사고라든가 다른 사고가 나면 어떻게 할까? 순전히 안 된다는 걸 내가 우겨서 하는 건데…."

솔직히 내가 이렇게 모험을 감행하는 것은 이 코스가 효도 관광 코스가 아니라는 그 한마디 때문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여행을 하려면 히든 밸리같은 곳에서 온천욕이나 해야 한다는 투의 말에 반발심이 생겨 감행하는 것이었다.

▲ 저 멀리 보이는 따알 화산. 뱃전의 바람은 고요하고 물결은 눈부시다.
ⓒ 김정은

늙은 것도 서러운데 여행에 무슨 효도 관광 코스가 따로 있다고 지레 못하게 하는가? 4살짜리 어린 아이도 할 수 있다는 코스를 사지 온전한 건강한 노인분들이 할 수 없다는 게 말이 안된다고 떠들었더니 귀찮은지 네멋대로 하라고 한다. 그렇기에 나 또한 약간 불안했지만 머리 속으로 멋지게 성공하리라는 주문을 외우며 어머니에게 끊임없이 자신감을 불어 넣었다.

터덜거리는 지프니가 멈춘 곳은 따알 호수, 우리를 따알 화산으로 데려가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배를 타고 따알 화산으로 들어간다. 평상시에는 파도가 심하게 친다는데 다행히도 신이 도우시는지 바람 한점 없이 고요한 수면 위를 양날개 달린 날렵한 배가 힘차게 달리고 나아가고 있었다.

배가 어느덧 따알 화산에 도착하니 배에 내리는 순간 말 배설물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바로 입구가 승마장이었다. 말이라고 하기에는 작은 조랑말을 타고 마부에 고삐에 끌려 따알 화산을 오른다.

산에는 말발굽 하나가 들어갈 정도의 좁은 말 전용 코스만으로 줄을 지어 경사를 오르는 말이 무척 힘들어 보였다. 팍상한에서는 사공이 안쓰러웠는데 오늘은 말이 안쓰러웠다. 제법 나가는 몸무게를 지탱하며 급경사의 산을 오르려니 얼마나 힘들까? 문득 말이 불쌍해 마부에게 말 이름을 물어보니 나를 태운 말은 킴벌리라고 했다.

불쌍한 마음에 말 목을 가만히 쓰다듬으니 갑자기 힘이 돋는 듯 말이 속도를 내기 시작해서 앞의 사람들을 추월하기 시작했다. "말 또한 나의 격려를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말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괜히 말과의 교감에 성공했다는 착각 속에 빠져 즐거웠다.

▲ 정상에서 본 따알 화산의 분화구 아직도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곳이 바로 활화산의 증거이다.
ⓒ 김정은
그러나 앞사람을 추월하여 정상에 일찍 도착하기는 했는데 뒤에서 올라오는 어머니가 보이지 않아 걱정이었다. 그리 위험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흔들흔들거리며 경사를 오르는 말 위에 몸을 꼿꼿하게 세우는 일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기에 과연 어머니가 잘 견딜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하나 둘씩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어머니 모습을 말하며 오고 있는 사실을 확인하려 했지만 알 수가 없어 애태우고 있었는데 한사람이 말하기를 "한 할머니가 너무나 유연하고 씩씩하게 말을 타고 올라오고 있단다."

그럼 그렇지. 역시 나의 믿음이 헛되지 않았다. 문득 고개를 들어 아래를 내려다 보니 저만치서 어머니가 너무도 여유롭게 말을 타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머니를 부르며 손을 흔드니 어머니 얼굴이 함박꽃이 되어 웃고 계시는 게 아닌가?

정상에 무사히 올라 말에서 내렸을 때 그 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인간 승리"라며 박수를 쳐 주었다. 그러나 박수보다도 즐거운 일은 땀이 비오듯 흐르는 얼굴에 해냈다는 뿌듯한 자부심이 가득 담긴 환한 미소가 너무나 아름다웠다.

▲ 말을 타고 정상에 오른 어머니의 얼굴에 함박꽃 같은 미소가 흘렀다.
ⓒ 김정은
우리 사회가 노인이라고 지레 걱정하고, 안 된다고 소외시키지 말았으면 좋겠다. 전국에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분들도 "나는 늙어서 안 돼"하고 스스로 움추려드는 일은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다.

우리 또한 좀 무서워도, 걱정이 되더라도 잘 하실 수 있다고 자신감을 불어넣고 지켜보는 끈기와 시선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 한계를 극복했을 때 틀림없이 자신감 넘치는 환한 미소로 돌아오리라는 것을 믿는다. 우리 어머니의 그 미소처럼 말이다.

비록 트래킹 후에 다리가 퉁퉁 부어 고생하셨지만 자랑스러운 어머니에게 한마디 말씀드리고 싶다.

"따알 화산 정상에 선 애마 할머니의 모습은 매우 섹시하고 아름다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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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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