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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낭만적 사랑과 사회>
ⓒ 문학과지성사
"정이현의 소설 속에는 '악한 여자'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남편과 정부를 죽게 하고, 부모를 상대로 가짜 납치극을 벌이며, 남자 친구와 약혼자를 기만하고, 결혼한 여자와 위험한 동성애에 빠진다.

그들은 공적인 도덕적 가치나 윤리에 따르기보다는 욕망의 개인 전략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하며, 좀더 의식적인 차원에서 로맨스, 결혼, 가족, 국가 등을 둘러싼 제도적 이데올로기에 균열을 만드는 존재이다." - 이광호의 해설에서


남자들이 알지 못하는 여자들만의 세계가 있다. 물론 여자들이 느끼지 못하는 남자들만의 세상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여자들의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여 준다. 작가가 꾸며내는 여성들의 세계는 조금은 극단적이기도 하나, 그들만의 생각을 노출하여 그대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2002년 제 1회 <문학과 사회> 신인 문학상에 당선된 단편 <낭만적 사랑과 사회>는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20대 여성이 갖고 있는 모순과 혼란을 극명히 드러내 준다. 여러 남자와 연애를 하면서 사회적인 신분 상승을 꿈꾸는 여자.

'반포'라는 지역적 특색이 갖고 있는 중산층의 느낌. 강남의 20-30평대 아파트 거주, 강남 지역에서 중· 고등학교를 나오고 적당한 서울의 대학에 입학한 주인공 여성의 삶과 사고를 사실적이면서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차가 없는 남자애는 피곤했다. 우선 폼이 안 났다. 대학교 3학년이나 된 이 나이에 아직도 강남역 뉴욕제과 앞, 압구정동 맥도널드 앞 같은 곳을 약속 장소로 정한다는 것은 쪽팔리는 일이었다. 게다가 데이트를 끝내고 집에 갈 때는 또 어떤가? 지하철과 마을 버스를 갈아타고 여자애 집 앞까지 데려다 주는 연애, 동네 사람들 눈을 피해 놀이터 벤치에서 몰래 뽀뽀하는 연애는 고딩 때나 하는 것이다."

'하얏트 호텔', '반포', '문화센터 노래교실' 등 특정 지명과 최근의 문화적 현상들을 지칭하는 고유 명사들에 각주를 다는 식으로 설명을 덧붙이는 형식 또한 독특하다. 문화 센터 노래 교실에 대한 각주는 우리 시대의 문화적 통속성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 준다.

"몇 해 전부터 아줌마들을 상대로 크게 유행하기 시작한 문화센터 노래교실에서는, 텔레비전에 나오지 않는 옛날 가수들이 강사로 등장해 노래 잘 부르는 법을 가르쳐 준다고 한다. 대개의 강의 방법은 몇 소절씩 합창하는 것. 주요 레퍼토리는 <만남>이나 <존재의 이유>처럼 어느 정도 '품격'이 있다고 여겨지는 곡들이다."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모습에 대한 사실적이고 세부적인 묘사는 이 소설집에 실린 다른 소설들에서도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이다. 작가는 매우 냉소적인 태도로 세상을 바라보고 묘사한다. 그리고 그 묘사의 시각은 주로 이른바 '악한 여자'라고 불릴 수도 있는 한 여자의 눈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커피 심부름 때문에 회사 생활이 힘들다고 징징대는 여자들은 신물나게 많았다. 그러나 조직 생활의 마인드가 그토록 부족하다면 일찌감치 결혼 정보 회사에 가입하여 집에 들어앉는 편이 유익하다는 것이 그녀의 견해였다." - <트렁크> 중에서

이처럼 냉소적이고 잔인함을 지닌 주인공들은 잘 나가는 화장품 회사의 팀장이기도 하고, 대학교 3학년 여대생이기도 하며 중학교 소녀이기도 하다. 그녀들은 냉소적이고 이기적인 태도로 세상을 비웃는다.

그들이 비웃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을 무기로 하여 여자와 잠잘 생각만 하는 남성들이기도 하며, 어리석게 사랑에 목숨 거는 여자들이기도 하며, 제도적으로 묶여 있는 가족 관계의 허울이기도 하다. 가족 관계라는 이름으로 위장하여 살아가는 제도에 대한 비판은 한 소녀의 시각을 통해 전달된다.

"엄마 아빠가 죽었을 때 내가 스무 살이 되면 좋겠다. 스무 살 넘은 어른을 고아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쓸데없는 동정은 딱 질색이다. 혼자가 되면 나는 우선 이 집을 팔 거다. 안 그래도 동네 부동산 앞을 지날 때마다 문밖에 걸어 놓은 시세표를 눈여겨보고 있다." - <소녀 시대> 중에서

작가는 "이 사회가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망할 놈의 세상!" 이라는 욕설을 직접 내던지지 않는다. 하지만 인물들의 부정적인 생각 묘사와 사회 현실에 대한 냉정한 거리 유지는 이러한 욕설을 직접 던지는 것 이상의 효과를 일으킨다.

작가가 비판하고 싶은 세상의 어리석음과 물질주의, 현대 사회의 도덕성 결여, 이기적인 사고의 팽배 등이 여러 여자들의 입을 통해 통렬히 풍자되는 것이다. 주인공들을 통해 작가가 던지는 사회에 대한 비웃음은 많은 여자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의 대리 표현이기도 하다.

문학에서 작가의 역할이 사회의 모순을 풍자하고 비판하는 것이라고 할 때에, 정이현은 성공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풍자와 비판이 지나치게 극단적일 경우, 인간 본성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소멸될 수도 있다.

많은 문학 평론가들이 이 대담한 작가의 차기 작품을 기대하고 있다. 차기 소설들에서는 지나치게 사회의 부정적 측면만을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 방향 제시도 함께 이루어지길 기대해 본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지음, 문학과지성사(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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