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물봉선
물봉선 ⓒ 이선희
첫 눈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첫 눈이 내린 날 혹시 손톱에 물들인 봉숭아(봉선화)의 붉은 빛이 남아있었는지요? 어린 시절 봉숭아꽃과 이파리를 빻아서 백반이나 괭이밥 이파리를 섞어 손톱에 물을 들였습니다. 누나들이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일 때면 막내였던 나도 함께 새끼손가락에 봉숭아 물을 들이곤 했습니다.

"봉숭아물이든 손톱이 첫 눈 올 때까지 남아 있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데."
"정말?"

봉숭아물을 들이며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랑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누님들의 마음, 그 누님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형님은 누굴까 궁금하기도 했습니다만, 누님들의 사랑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짝사랑하는 소녀와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이 나에겐 더 큰 소망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소개해 드리는 꽃, 봉선화과에 속하는 물봉선과 위의 이야기의 소재가 된 봉선화입니다. 같은 봉선화니까 함께 묶어서 소개를 해드려도 될 것 같아서 함께 엮어 보았습니다.

ⓒ 김민수

물봉선은 산골짜기의 물가나 습지에서 무리 지어 자랍니다. 제가 만난 물봉선은 한라산 중산간 도로변에 피어있는 붉은 빛이 아주 강한 자주색 물봉선이었습니다. 처음에 필 때에는 한 두 송이 피는 것 같더니 9월쯤 되니까 아예 보랏빛으로 도로변을 물들여 갔습니다.

이전에 소개해 드린 '물매화'도 습지에서 자라는 특성이 있는데 '물봉선'역시도 습지를 좋아하는가 봅니다. 그래서 '물'이라는 글자가 따라 붙었겠지요.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노랑물봉선, 하양물봉선도 있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물봉선을 볼 때마다 '혹시나'하는 마음으로 찾아보았지만 모든 일에 임자는 따로 있는 법인가 봅니다.

보고 싶다고 다가오지 않는 것이 바로 들꽃입니다. 때로는 우연찮게 다가오기도 하고, 때로는 간절한 마음일 때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두 가지 경우 모두 작은 것들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이 있을 때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 김민수

여자애들이 손톱에 물들이는 데 쓰던 봉숭아(한자어로 봉선화)와 모양이 비슷한 꽃, 그러나 주로 물가나 습지에서 자란다하여 얻은 물봉선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꽃을 볼 때에는 눈 높이를 낮추어서 보면 더 아름답답니다. 특히 눈 높이를 낮추어 하늘을 배경으로 꽃을 감상하면 각 계절마다의 청명한 하늘이 한 폭의 도화지가 되고, 그 도화지 위에 그려진 예쁜 수채화를 보는 듯 꽃의 형상이 드러납니다. 사진상으로 소개를 해드리지는 못하지만 물봉선은 하늘을 배경으로 바라보면 마치 하늘에 걸린 종처럼 보이고, 금방이라도 아름다운 종소리를 '댕, 댕~'들려줄 것만 같습니다.

<물봉선의 고백>이라는 이원규 님의 시가 있습니다.

내 이름은 물봉선입니다
그대가 칠선계곡의 소슬바람으로 다가오면
나는야 버선발, 버선발의 물봉선

그대가 백무동의 산안개로 내리면
나는야 속눈썹에 이슬이 맺힌 산처녀가 되고

실상사의 새벽예불 소리로 오면
졸다 깨어 합장하는 아직 어린 행자승이 됩니다.

하지만 그대가
풍문 속의 포크레인으로 다가오고
소문 속의 레미콘으로 달려오면
나는야 잽싸게 꽃씨를 퍼뜨리며
차라리 동반 자살을 꿈꾸는 독초 아닌 독초

날 건드리지 마세요

나비들이 날아와 잠시 어우르고 가듯이
휘파람이나 불며 그냥 가세요 

행여 그대가
딴 마음을 먹을까봐
댐의 이름으로 올까봐
내가 먼저
손톱 발톱에 봉숭아물을 들이며
맹세를 합니다 첫눈을 기다립니다 

내 이름은 물봉선

여전히 젖은 맨발의 물봉숭아 꽃입니다


봉선화
봉선화 ⓒ 김민수

자, 그러면 정말 물봉선이 봉선화와 닮았는지 울밑에 선 봉선화를 보실까요? 물봉선보다 좀 크고, 조금 더 화려한 것을 빼놓으면 흡사합니다. 같은 봉선화과인 이유를 아시겠지요?

봉선화 씨앗을 보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가을 날 잘 익은 봉선화씨앗을 '툭!' 건들면 씨앗주머니가 '툭!'터지면서 씨앗이 사방으로 튑니다. 물봉선도 그 씨앗의 모양은 다르지만(좀 길쭉합니다) 잘 익었을 때 살짝만 건드려도 '툭!'하고 씨앗을 사방으로 날려버립니다.

그래서 얻은 꽃말은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입니다.

ⓒ 김민수

봉선화에 얽힌 이야기를 각색해서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로 들려드리고 오늘의 이야기를 마감해야겠습니다.

'옛날 올림푸스 궁전에서 연회를 열고 있을 때의 일이야. 잔치를 준비한 주인은 손님으로 참석한 신들에게 무엇을 대접할까 고민을 하다 황금 사과를 준비했단다. 황금사과는 먹기만 하면 가장 젊을 때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평생을 살 수 있는 신기한 것이었지. 그런데 그만 사과가 한 개 없어지고 말았어. 어느 장난꾸러기 심술궂은 신이 장난을 치려고 숨긴 거였지. 그런데 주인은 그날 신들에게 음식을 나르던 한 여인이 의심을 하게 되었고, 너무 화를 내는 바람에 심술궂은 신은 그만 장난이었다고 이야기할 수가 없었어.

결국 의심을 받은 시중들던 여인은 쫓겨나고 말았단다. 너무나 억울했던 그녀는 누명을 벗고자 필사적으로 호소했으니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지 못하고 결국은 죽게 되었단다. 마음 고생만 하다가 끝내 슬픈 최후를 맞이한 여인의 무덤에 봉선화가 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단다. 그래서 지금도 봉선화는 그 씨앗을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자기의 결백을 증명하려고 씨주머니를 터트려 자신의 속을 뒤집어 보이는 거란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