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중앙>의 낙제 책임론
한겨레를 뺀 29일치 신문들은 입이라도 맞춘 듯 대한민국 초일류대 입학생들의 '낙제 실태'를 보도했다. 대학 자체 평가가 처음 실시된 2000년부터 4년 연속으로 연출된 낙제 광경이니 전혀 새로울 것도 없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서울대가 올 수시 입학생들을 대상으로 영어·수학 성취도 평가를 했는데 4명 가운데 1명이 낙제"라고 기사화 했다.
<조선>과 <중앙>은 사설까지 썼다. '낙제'란 사실보다 주 메뉴처럼 보이는 평준화 해체론이 어김없이 등장했다. 이 사설들은 다음과 같은 구호를 외치는 듯하다.
'서울대생의 낙제점수로 드러난 하향평준화의 원흉, 고교평준화를 박살내자'
"가장 머리 좋은 학생, 가장 실력 있는 학생들이 모였다는 서울대가 이 모양 이 꼴이다. 기댈 곳이라고는 경쟁력 있는 인재를 길러내는 교육뿐인데도 평등 이념만 염불하듯 되뇌어 온 교육당국의 시대착오가 만들어낸 결과다. …하향평준화가 한국교육의 상표가 돼 버린 것이다." (12월 29일치 <조선> 사설 '서울대 합격생 24%가 학력미달이라니')
"고교 우수생이 대학에 들어서는 순간 열등생으로 전락하는 가장 큰 이유는 평준화 제도 때문이다. 수준별 학습이 불가능해 1등이나 꼴찌의 실력이 도토리 키재기식이니 대학수업을 따라잡지 못한다는 판정을 받는 것이다. …대학생의 수준이 어느 정도 낮아졌는지 실태를 파악하고, 원인을 찾아 중·고 교육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평준화체제의 수정은 이래저래 불가피하다."(12월 29일치 <중앙> 사설 '서울大 수시합격자 ¼이 낙제점')
'서울대 입학생의 낙제가 평준화 탓'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이런 연결 모습은 진부하다. 신문들은 이미 2000년부터 줄곧 서울대 낙제 광경을 중계해왔기 때문이다.
@ADTOP@
30년 전 생긴 제도가 2003년 낙제의 원흉인가?
"서울대 신입생 20% 영어수강 자격 미달…졸업 전 수강 필수" (<동아> 2000년 3월 4일치 제목)
"서울대 이공계 신입생 14% 수학 실력 미달 수학능력 없다" (<조선> 2002년 3월 6일치 제목)
"학력 떨어진 대학생(상)/ 인터넷 능수능란…어휘력은 초등생 수준"(<조선>2003년 1월 7일치 제목)
2002년 초까지만 해도 보수언론들은 서울대 입학생 낙제 현상의 원인으로 '이해찬 1세대론', '대학입시', '열린교육의 문제', '이공계 기피현상' 등을 꼽았다. 그러던 것이 올해 들어 '평준화에 따른 하향 평준화론'으로 확 바뀐 것이다. 30년 전에 생긴 평준화가 비로소 올해부터 '서울대 신입생 낙제의 원흉' 노릇을 본격화하게 된 것일까.
'하향 평준화식 학력저하'라는 지적을 앞장 서 해온 게 바로 <조선>이었다. <조선>이 내세운 학력저하론의 근거는 대부분 서울대 교수들의 발언이었다. <조선>과 서울대가 같이 치른 'TEPS 시험 결과가 엉망'이며, 신입생에게 '한자평가를 했더니 읽지도 못하더라', '수학 기초능력도 없는 서울대생들이 많다'(2002년 말 시리즈 '학력 떨어진 대학생들')는 식의 보도가 주류를 이뤘다.
이는 '학력저하'를 뒷받침하는 의미 있는 근거라기보다는 일부 대학의 판단에 치우친 캠페인성 보도였다는 게 교육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오히려 올 2월 교육부와 한국교육개발원이 낸 'OECD교육지표 2002'의 PISA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학생들(2000년 시험 당시 고교 1년생, 현 대학 1학년생)은 30여 개 선진국 가운데 읽기, 수학, 과학 세 영역 평가에서 각각 6등, 2등, 1등을 차지했다.
성기선 카톨릭대 교수와 강태중 중앙대 교수 공저인 '평준화 정책과 지적 수월성 교육의 관계에 대한 실증적 연구'(2001)란 논문은 "평준화 제도가 오히려 학생들의 학업성취도를 높이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놀랄만한 사실은 지금까지 평준화를 주제로 한 어떤 연구결과에서도 '하향 평준화'를 입증할만한 실증적인 증거가 발견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다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그동안 발표된 '학력과 성취도'에 대한 이 같은 실증 연구를 <조선>, <중앙>, <동아> 등 보수신문에서 찾기는 어려웠다.
"앵무새 보도... 무책임한 사실 왜곡"
이런 형편에서 서울대 신입생 '낙제' 현상은 이들에게 촛불과도 같은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낙제 현상을 놓고 '고교 평준화의 병폐'를 보여주는 좋은 물건으로 여긴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바로 서울대의 태도다. 다른 대학이라면 신입생 낙제 현상에 대해 숨기기 바빴을 것이다. 대학 이미지를 구기는 일이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울대는 어쩐 일인지 시험이 처음 실시된 4년 전부터 '낙제 비율'을 언론에 여봐란 듯이 공개하고 있다.
때론 서울대 교수 몇몇은 신문의 '시론'란에 나와 '학력저하론과 평준화'에 대해 한숨을 내쉬기까지 한다.
이런 서울대 태도에 심성보 교육개혁시민운동연대 정책위원장(부산교대 교수)은 "일부러 서울대가 최고 일류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수준 높은 문제를 낸 것처럼 행동하는 것 같다"면서 "시험은 문제 해결력과 창의력 등 고급사고력을 묻느냐, 아니면 단순 지식을 묻느냐 하는 문제 성격에 따라 얼마든지 난이도와 낙제 정도가 조절될 수 있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강원대 사범대학장을 지낸 최현섭(사회교육학부) 교수는 '학력저하의 원인이 평준화 때문'이라는 일부 언론의 보도 태도에 대해 "엉터리 인과론"이라고 몰아세웠다.
"평준화 30년 동안 괄목할만한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그럼 경제성장의 원인이 평준화 때문이냐. 물론 아니다. 하지만 우리 언론의 보도 태도라면 이런 말도 인과론으로 연결이 될 법하다. 평준화와 학력저하는 상관이 없다는 게 부정할 수 없는 연구 결과인데도 언론이 앵무새처럼 말하고 있다."
최 교수는 "정확한 진단 없이 처방하는 의사처럼 일부 언론은 단편적인 사실을 갖고 전체로 확대하는 나쁜 버릇이 있다"면서 "모든 문제를 평준화 탓으로 돌리는 평준화 회기론은 무책임한 사실 왜곡"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