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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20년도 더 된 영한사전이 있다. 표지가 너덜거려 파란 테이프까지 붙였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다. 손때가 묻어서 그런지 흠뻑 정이 들었다.

난 단어를 찾을 때마다 항상 바를 '正'자 표시를 해두었다. 어떤 단어에는 '正'자가 무려 5개가 있는 것도 있다. 그 단어만 무려 25번이나 찾았다는 얘기다. 한 획씩 그려 넣을 때마다 내 단단한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원망을 했다. 그런 사전이었으니 나의 분신이나 다름없다.

▲ 책에 관한 다양한 전시물이 있어 자연스레 책과 가까워지게 만들었다.
ⓒ 이종원

누구나 이렇게 추억이 깃든 책 한 권씩은 있을 것이다. 그런 책은 참 소중하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컴퓨터나 인터넷이 책을 대신하면서 예전의 추억거리들은 많이 줄어들고 있다.

그런 추억거리를 끄집어내고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전시회가 하나 있다. 금호미술관에서 한창 전시중인 <사람을 닮은책 책을 닮은 사람>이다.

혹시 대중 목욕탕에서 책을 읽는다고 상상해 보라. 참 재미있는 공상이 아닐까? 그 공상이 미술관에서 실현된다.

▲ 망한 책방에서 가져온 기억
ⓒ 이종원

'망한 책방에서 가져온 기억'이란 작품이다. 우리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면 책방은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관람객들이 책을 읽도록 하기 위해 책 한 권씩 거저 집어 가게 했다. 진솔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실제 망한 책방의 책을 통채로 트럭에 싣고 왔다고 한다.

"좋은 책들은 먼저 온 관람객들이 다 집어 갔겠네요."
"잘 뒤지면 읽을 만한 책이 많습니다."
"책 다 집어가서 하나도 남지 않으면 어쩌지요?"
"글쎄요. 망한 책방 찾으러 다녀하는데…. 그런 책방이 없길 바랄 뿐입니다."

▲ 소파에 시가 그려져 있다.
ⓒ 이종원

예쁘장한 소파에 책에 관련된 시를 그려 넣었다. 누구나 책 읽다가 잠든 적이 있을 것이다.

'책과 내가 하나가 된다.
물론 의자와 내가 하나가 되면서 말이다.
그러니 책은 나이며 잠이며 의자이다.'


▲ 제목이 '숨쉬는 책' 이다. 책에 물이 담겨져 있고 풀이 자라고 있다. 이렇게 책에는 자연이 있고, 생명이 있는 것이다.
ⓒ 이종원

▲ 책은 사막의 오아시스나 마찬가지다. 오아시스엔 물 대신에 책을 넣어 두었다. 타는 갈증을 책으로 풀어 보라는 의미란다.
ⓒ 이종원

이 곳의 책은 국내 굴지의 출판사에서 5천여 권의 책을 기증 받았다고 한다. 불우한 아이들을 위해 재기증할 예정이란다.

▲ 하얀 벽지는 아이들 몫이다. 이것 역시 글쓰는 행위이며 창작이다. 누구나 책을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화책의 글자를 지우고 자신이 직접 대사를 적어 넣을 수 있는 코너도 있다.
ⓒ 이종원

▲ 7살 아이가 만든 책이다. 정형화된 미술 교육을 받지 않고 자유 분방한 생각들을 그대로 그림으로 표현했다. 얼마나 멋진 책인가?
ⓒ 이종원

▲ 제목이 '상속받지 못한 자'다. 왜 이런 제목이 붙었을까?
ⓒ 이종원

계란과 계란판에도 깨알 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고, 천장에도 글이 새겨져 있어 망원경으로 볼 수 있게 했다. 책장으로 로봇을 만들었다. 아이들의 상상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 지하전시관의 테마는 '물 속에 지은 도서관'이다. 대중목욕탕을 만들어 놓았다. 탕엔 물이 가득 찼고, 욕조가 있고, 때를 미는 침대도 놓여 있다. 어디든지 자리를 잡고 편안하게 책을 읽으면 그만이다.
ⓒ 이종원

이 전시를 기획한 김지영씨는 "책을 꼭 학교나 도서관에서 읽으란 법이 없지요. 꼭 앉아서 읽으라는 규칙도 없습니다. 그래서 가장 대중적이지만 가장 책을 접하기 힘든 공간인 목욕탕을 소재로 삼았고 그 곳에서 편안히 책을 읽으라는 의도에서 이 테마를 만들었습니다."

- 어떤 의도에서 이 전시회를 기획하게 되었습니까?
"도서관에 갈 때마다 아이들이 쪼그려서 책을 읽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걸 보면서 우리 아이들에게 아직도 책이 꼭 필요한 것을 느꼈지요. 그리고 가장 편안한 곳에서 책을 읽을 수 없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이들에게 재미 있는 책잔치를 만들자는 의도에서 이런 전시회를 기획했습니다."

- 관람객의 반응과 하루 관람객은?
"아이들이 참 좋아합니다. 다양한 곳에서 책읽는 기쁨을 얻어가지요. 주말에는 대략 500여 명이 찾고 있습니다. 앞으로 계속 이런 책 기획을 할 예정입니다. 오마이뉴스에서 이번 전시를 후원해 주셔서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는 아이
ⓒ 이종원

팸플릿 한 구석에 적힌 글이 가슴에 남아 이 곳에 옮겨본다.

이 곳에 와서 책에게 말을 걸어보세요. 책과 뒹굴어보세요. 어느 순간에 문득 책이 여러분에게 말을 걸어 올 것입니다. 물론 전시회를 다 보고 나면 또 새로운 질문이 생기겠지요. 그것이야말로 여러분의 몫입니다.

<사람을 닮은책 책을 닮은 사람>

1) 전시기간: 2003.12.19- 2004. 2 .28

2) 시 간: 오전 10시-오후 6시 (일요일 11시 개관)

3) 휴 관: 매주 월요일, 설 연휴(1/21-23)

4) 관람료: 개인 5천원/단체 20인 이상 4천원

5) 장 소: 금호 미술관 (경복궁 동쪽 담장) 02) 720-5114

6) 가는길: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에서 나와 풍문여고 정문앞을 지나 백상기념관 돌담길을 따라 '란' 사진실을 끼고 삼청동 길 200m 가면 우측에 있음(주차 공간은 협소하니 차를 가져 가지 않는 것이 좋다).

덧붙이는 글 | 이종원 기자의 홈페이지: http://cafe.daum.net/monol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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