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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목에 쌓인 눈
고목에 쌓인 눈 ⓒ 김강임
묵은 것과 새 것의 경계선은 '순간'이었다. 그 '순간'은 늘 자신이 걸어온 길을 다시 걷게 만든다. 서른을 꿈꾸는 사오정에게 새 것은 늘 조급하게만 느껴진다. 뒤를 돌아보면 아주 멀리 떠나 온 것 같은데 앞을 바라보면 그 길이 보이지 않으니 아직도 가야할 길이 까마득하기만 하다.

지나온 길을 다시 걸어 볼 수 있는 기회.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내디디며 고지를 향해 다가설 수 있는 여유. 가파른 길에서는 땀을 흘려서 좋고 평탄한 길에서는 잰걸음으로 달려갈 수 있어 좋은 길. 산행은 자신을 거듭나게 만든다.

더욱이 겨울 산행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겨울나무들을 보며 자신을 수행할 수 있어 더욱 좋다. 그러나 겨울산은 벗었다기보다는 휑하니 뚫려 있었다.

새해 벽두인 지난 8일 다시 자동차의 시동을 켜고 떠난 곳은 설원 가득한 한라산이었다. 제주도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한라산은 늘 마술에 걸린 것 같다. 어느 때는 금방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으면서도 어느 때는 기상변화에 따라 구름과 안개에 덮여 그림자조차 바라볼 수 없는, 우직함과 변덕스러움이 함께 공존한다.

사람들은 한라산을 두고 신의 정원이라 부른다. 계절마다 색깔이 다르고 생태가 다르고, 계곡마다 전설이 서려 있는, 그래서 사람들은 산을 동경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라산 가는 길은 영실코스와 어리목코스, 관음사코스, 성판악 코스가 있다. 그 중에서도 성판악 코스는 관음사 코스와 함께 백록담 정상을 갈 수 있는 길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성판악 입구
성판악 입구 ⓒ 김강임
성판악 코스는 한라산 동쪽 코스로 경사가 완만하고 평탄하다. 정상까지는 9.6km로 등산 소요 시간은 편도 약 4시간 30분이며 등산로가 완만해 백록담을 가는 대부분 사람들이 즐겨 이용한다.

성판악 코스는 5·16도로의 최고점인 해발 750고지에서 시작된다. 성판악은 남서쪽 인근에 있는 성널오름에서 유래되었다. 특히 수직절벽이 병풍처럼 약 500m 정도 둘러쳐진 모양이 마치 '나무판자로 성을 둘러친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한라산국립공원 해발 750m 성판악에서 바라보는 겨울 하늘은 구름 한 점이 없었다. 길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배낭이 필요하듯 산행을 할 때는 배낭을 짊어져야 맛이 난다. 그 이유는 등에 적당한 무게의 짐을 짊어지면 올라가기에도 편할 뿐 아니라 등이 따뜻하여 보온효과를 누리기도 한다.

더구나 겨울 산행을 할 때에는 아이젠을 꼭 준비해야 하며 따뜻한 물과 커피, 컵라면을 챙기면 더욱 좋다. '뽀드득 뽀드득' 한라산 산행에서 내가 처음 들은 소리는 하얀 눈을 밟는 발자국 소리였다.

"온천지가 이렇게 하얗게 쌓여 있으면 좋겠다"

나이답지 않게 하얀 눈에 홀딱 반해 버린 우리 일행은 생전에 눈 구경한번 제대로 못한 사람처럼 모두 눈 위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 뭐 해? 빨리 출발해야지!"

" 갈 길이 먼 사람들이…. 온 산이 다 눈이다. 이 눈, 다- 네 것이잖아?"

눈속에 평상
눈속에 평상 ⓒ 김강임
서로 주고받는 말속에서 ' 다- 네 것이잖아' 라는 말에 가슴이 철렁 했다. 그동안 자연이 주는 '부'를 내가 얼마나 많이 축적해 왔는지를 느끼게 하는 순간이었다. 그래! 자연은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주었는데 나는 이들에게 무엇을 주었을까?

성판악에서 출발하는 한라산 등산로는 하얀 눈으로 눈이 부셨다. 갑자기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내 어릴 적. 그때는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렸다. 마당 가득 눈이 내리면 빨간 부츠를 신고 괜히 마당을 한바퀴 돌아보며 발자국을 그려 놓았다. 그 때는 '뽀드득 뽀드득' 소리가 얼마나 듣기 좋았는지 모른다. 눈 위에 누워서 사진을 찍어 보았던 기억이 새롭게 떠올랐다.

오르막으로 이어진 계단은 눈 속으로 이어졌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설경만큼이나 눈이 부셨다. 성판악이 나무판자로 성을 둘러쳤기 때문일까? 한 겨울인데도 바람 한 점 불지 않으니 겨울산은 참으로 아늑했다.

30분 정도 걸었을까? 땀방울이 맺혀왔다. 겨울산은 털모자와 털장갑, 두꺼운 잠바에 조끼까지 단단히 무장을 하고 온 우리를 비웃었다.

산 속에 놓인 평상은 눈 속에 묻혀 있었다. 마을 정자나무 아래서 보았던 평상처럼 갑자기 쉬어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산행하는 사람들에게 나뭇가지나 돌부리는 안식처를 제공한다.

조릿대를 따라서
조릿대를 따라서 ⓒ 김강임
눈 속에서도 얼굴을 내밀고 있는 조릿대는 독야청청이다. 겨울 산에서 항상 푸르름을 주는 것은 키 작은 나무들이다. 서어나무 등 활엽수가 우거진 길을 따라 1시간 20분쯤 가면 속밭에 이른다. 등산로 주변에 삼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한 여름 삼림욕을 생각케 한다.

누구의 발자국일까?
누구의 발자국일까? ⓒ 김강임
계곡이 깊을수록 마음도 깊어진다더니, 겨울 산의 계곡은 인기척이 없었다. 동물들도 겨울잠을 자기 때문일까? 그러나 누가 이 정적을 깨고 발자국을 남겼을까? 사람들의 발자국과 새들의 발자국. 그리고 짐승들의 발자국이 눈 위에 찍혀 있었다.

해발 900m 지점
해발 900m 지점 ⓒ 김강임
해발 900m지점. 수호신처럼 지키고 서 있는 돌 표지판은 우리가 얼마만큼 걸어왔는지를 말해 준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났던 인생의 이정표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얼마만큼 왔는지,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 그리고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할 것인지. 이정표는 늘 사거리의 신호등처럼 방향을 제시해 줬다.

해발 900m 지점에서 우리는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씩 마셨다. 그리고 잠시 여정을 풀었다. 다시 아이젠을 조이고 급경사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급경사가 이어지는 지점부터는 고난의 시간이 이어졌다. 역시 앞서가는 친구는 늘 운동을 즐겨하는 선생님이셨다. 그리고 맨 꼴찌에서 숨을 헐떡이는 선생님은 운동에 게으름을 피운 선생님이시다.

밧줄을 잡고
밧줄을 잡고 ⓒ 김강임
산행에서 오르막길은 항상 삶의 역경과도 같은 곳이다. 밧줄을 잡고 아슬아슬하게 내려오는 나이가 지긋하신 아저씨가 조심스럽게 내려온다. 이곳만 지나면 고지가 보일텐데 정상으로 가는 길은 항상 두꺼운 장벽이 있다.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이 계절 가는 줄을 몰랐다.

쌓인 눈은 오름을 이루고
쌓인 눈은 오름을 이루고 ⓒ 김강임
자연은 참으로 신비롭다. 소복이 내린 눈은 산을 덮고 있었다. 그런데 그 형태는 마치 오름 같기도 하고 어머님의 젖가슴처럼 같기도 했다. 눈은 어느 곳에나 내렸을 텐데. 한라산에 내린 눈은 왜 이렇게 형태가 다른 것일까?

겨울나무와 오름
겨울나무와 오름 ⓒ 김강임
지나온 길을 뒤돌아 보니 멀리 사라 오름이 보이고 벌거벗은 나뭇가지 사이로 겨울 산이 버티고 있다. 속밭을 지나 40분 정도 걸어가니 좌측으로 사라악이 보였다. 사라악은 등산로 입구에서 약 5.6㎞ 지점 남측에 있으며 정상에 화구호 있다. 사라오름 분화구는 예로부터 제주 제일의 명당자리라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고 한다.

해발 1,500m고지. 이곳에서 만난 겨울 진달래는 막 물이 오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구상나무와 좀고채목 등이 눈 속에서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계절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자연의 신비를 안겨주는 나무들의 모습이 우직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설원 가득한  진달래 밭
설원 가득한 진달래 밭 ⓒ 김강임
고지가 바로 저긴데. 진달래 밭에서 백록담까지는 2.3km. 정상인 백록담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낮 12시까지 진달래 밭에 도착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12시 30분. 30분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우리는 고지 탈환을 하지 못했다.

그 애석함을 달래준 것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라면이었다. 설원 가득한 진달래 밭에 털썩 주저앉아 백록담을 바라보며 먹는 컵라면은 목구멍을 뜨겁게 달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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