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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백록담 분화구에는
지금 백록담 분화구에는 ⓒ 김강임
해발 1950m 한라산 백록담. 그 곳의 겨울은 순백으로 가득했다.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와 백록을 타고 놀다 갔을까? 아니면 흰 사슴을 탄 신선이 내려와서 물을 마셨을까?

휴일 아침 9시, 해발 750m의 한라산 성판악 입구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겨울산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방학임에도 밤잠을 설치고 달려온 초등학생들의 손에는 자신들이 먹을 김밥과 음료수가 있었다. 지도 선생님들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간단한 준비운동을 하고 등산화에 아이젠을 끼우는 아이들은 들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저마다 최고를 꿈꾸며 살아간다. 1등에 대한 기대감, 우두머리의 우월감, 그리고 정상 도전에 대한 야무진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눈 덮인 진달래 밭에서 바라본 한라산 정상에 대한 기대감 역시 그러했다. 그곳에 가면 무엇인가 특별함이 있을 것만 같은 기대감. 그곳에 가면 혼자만이 느낄 수 있는 희열. 그리고 신비스러움의 비밀을 벗기고 싶은 충동이랄까.

설경속으로
설경속으로 ⓒ 김강임
이번에는 정상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더욱이 이번 한라산 정상 도전은 평생을 같이 가야 할 사람과 나란히 산행을 떠났다. 그런데 뻥 뚫린 겨울 산에 초대 된 손님은 우리 부부가 아니었다. 우리가 먼저 온 줄 알았는데, 한라산에 초대된 가장 귀중한 손님은 온 산을 뒤덮고 있는 하얀 눈이었다.

눈은 왜 한라산에만 내렸을까? 산악 훈련을 나온 초등학교 어린이들은 온 산이 하얗게 덮인 광경을 보자 환호성을 지른다. 눈을 뭉쳐 보기도 하고 한 웅큼 손에 쥐어 먹어 보기도 하고. 그리고 눈밭에서 뒹굴기도 한다. 이래서 겨울산은 따뜻한 정취가 살아나는 것 같다.

참 하느님도 불공평하시지. 왜 이곳에만 이렇게 많은 축복을 주실까? 설경 속에 빠져 발길을 옮기던 우리는 순백의 아름다움에 빠져 넋을 잃었다.

"저기 좀 보세요. 꼭 사슴 같지요."
"저기 좀 쳐다 봐! 한 폭의 동양화 같지?"

신비. 장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리둥절했다. 더욱이 옷 하나 입지 않은 겨울 나무가 소복으로 갈아입고 서 있으니 겨울나무는 눈꽃으로 단장하고 있었다.

계절을 모르는 가을열매
계절을 모르는 가을열매 ⓒ 김강임
한라산에 펼쳐진 은백의 장관은 일상의 복잡한 생활을 접어두게 만들었다. 나뭇가지와 계곡. 그리고 등산로가 온통 소복으로 갈아입었으니 현기증이 날 것 같다.

길은 먼저 온 이가 발자국을 남긴다. 혼자 걸으면 좋을 등산로 길에는 많은 사람들이 발자국을 남겼다. 그 발자국마다 서로가 다른 이름과 삶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무게를 가누지 못한 겨울나무는 순백의 무게에 못 이겨 드러누워 있었다. 미처 떨어지지 못한 가을에 열매가 계절의 감각을 되살리게 한다. 흰눈에 감춰진 열매는 수줍은 듯이 하얀 눈 속에 감춰져 있다.

하산길은 미끄럼을 타고
하산길은 미끄럼을 타고 ⓒ 김강임
성판악 입구에서 백록담 정상까지는 9.6km. 편도 4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이제 1km를 걸어 왔으니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어둠을 뚫고 새벽 차를 타고 달려 왔던 사람들은 벌써 하산을 한다.

비탈길을 따라 주르르. 미끄럼을 타고 내려오는 사람의 모습에서 행복이 넘쳐 흐른다. 눈 덮인 겨울 산의 낭만. 겨울산이 아니라면 어디서 이런 미끄럼을 타 볼 수 있겠는가. 이들은 얼마나 겨울을 기다렸을까.

자연의 신비 앞에 서면 언제나 숙연해 진다. 더욱이 계절마다 신비스러움을 더해 주는 한라산은 벗겨도 벗겨도 그 비밀에 끝이 없다. 한라산은 화산폭발에 의해 형성된 원추형 순상화산으로 아스피테형 화산이기도 하다. 100여 차례에 걸쳐 화산의 분출과 융기에 의해 368개의 기생화산으로 형성되면서 최대의 오름 군락지를 형성하기도 했다.

얼마쯤 걸었을까. 인생에서도 살아가면서 고비가 있듯이, 해발 1300m에 다다르자 급경사가 이어졌다. 이곳부터 힘든 코스가 시작되었다. 돌아 온 길을 뒤돌아 보지만 앞으로 가야할 길이 더욱 까마득하다. 어차피 떠나온 길이라면 포기하지 말자. 평생을 같이 걸어가야 할 머나먼 여행길이 아니던가?

해발 1500m엔 순백의 진달래가
해발 1500m엔 순백의 진달래가 ⓒ 김강임
드디어 해발 1500m. 진달래 밭에서 뜨거운 커피로 목을 축였다. 눈 속에 깊이 잠들어 있는 털진달래의 모습이 깊은 겨울잠에 빠져 있었다. 산이 깊으니 하얀 눈 또한 순백이다.

"12시까지 이곳에 도착해야 정상에 갈 수 있습니다. 서둘러 올라가십시오. 백록담에서는 오후 1시 30분이 되면 하산해야 합니다."

진달래 밭 경비실에서 둘려 오는 안내 방송은 등산객들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죽어서도 백년을 산다는
죽어서도 백년을 산다는 ⓒ 김강임
진달래 밭을 지나니 새로운 생태계가 이어졌다. 이곳에서부터는 구상나무 숲이 무리를 이뤘다. 죽어서도 백년을 산다는 구상나무 숲 속에는 무려 1m가 넘는 눈이 쌓여 있었다. 누가 먼저 이 길을 떠나왔을까?

3시간을 걸어 왔으니 발길을 옮길 때마다 근육이 뻐근해 진다. 어찌나 많은 눈이 내렸던지 눈 속에 등산화가 흠뻑 빠졌다. 끝없이 이어지는 구상나무 끝에는 주렁주렁 고드름이 달려 있었다. 앞서 가던 남편이 고드름을 따서 나에게 건네 준다.

고드름이 주렁주렁
고드름이 주렁주렁 ⓒ 김강임
"어린 시절 처마 밑에 달린 고드름을 아주 맛있게 씹어 먹었지."
" 어디 그 뿐이요? 고드름으로 권총을 만들어 총 싸움도 했잖아요?"

이렇듯 겨울산행은 순백의 비경과 함께 지나간 추억을 재생시켜 주었다.

정상 도전에 대한 시샘은 대단했다. 해발 1600m부터는 눈보라가 몰아 쳤다. 60도가 넘게 이어지는 급경사는 발걸음을 더디게 만들었다. 이렇듯 백록담 가는 길은 날씨가 좋지 않아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8.8km를 걸어 왔으니
8.8km를 걸어 왔으니 ⓒ 김강임
백발의 모습으로 내려오는 등산객들의 모습에서 겨울의 묘미를 느낄 수가 있었다. 이쯤에서 눈 속에 묻혀 있는 표지판은 한결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지금까지 걸어 왔던 8.8km의 산행. 이제 0.8km만 가면 정상에 도전할 수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부터는 길이 없었다. 눈보라가 계속되는 바람에 앞서가던 사람들의 발자국이 모두 지워져 버렸다.

가끔 내 머리 속에 잠재하고 있던 기억들과 가슴 속에 남아있는 그림자들을 지워버리고 싶었던 날들이 있었다. 그런 기억들을 이 눈보라 속에 몽땅 날려 버렸으면 좋겠다.

눈보라속 강행군. 고지가 바로 저긴데
눈보라속 강행군. 고지가 바로 저긴데 ⓒ 김강임
눈보라가 세차게 몰아치는 해발 1950m. 앞서간 이가 먼저 만세를 부른다. 그런데 입이 꽁꽁 얼어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의 머리와 콧잔등에는 진한 겨울 냄새가 풍겨 났다.

밧줄과 안전대에 아슬아슬 몸을 의지하면 걸어왔던 고지 탈환. 서귀포시 토평동 산 15-1번지 한라산 백록담. 4시간동안 걸어 온 겨울 산의 끝에는 신령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그 신령스러움은 눈보라로 이어졌고 어디가 백록담인지 어디가 산정호수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옛날 신선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백록을 타고 놀았다는 백록담. 화산폭발로 형성된 산정호수 백록담은 서귀포 70경의 하나로, 화구륜의 능선둘레는 대략 1.7㎞, 화구호의 깊이는 110여 미터인데 그 넓이가 6만평이 조금 넘는다. 장마철 집중호우가 내려 만수가 되면 화구호의 삼분의 이가 물에 잠긴다.

특히 백록담은 아무리 날씨가 맑은 날이라 해도 세찬 바람이 몰려와 신령스러움을 느끼게 한다고 한다. 더욱이 예로부터 속세의 범인들이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곳이라 하여 영주산 이란 별칭도 얻었다 한다. 그 영주산에 속세의 범인이 찾았기 때문일까?

한라산 동능정상
한라산 동능정상 ⓒ 김강임
한라산 동능 정상 백록담에는 겨우내 쌓였던 눈이 순백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었다. 특히 이 눈은 봄이 와도 녹지 않아 이곳에는 잔설이 남아 있는데, 이 경치를 녹담만설이라 하여 영주십경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이렇듯 정상은 순백으로 가득한데, 정상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안개처럼 오리무중이다. 그러나 지상에서 꿈꾸던 정상의 이미지는 얼마나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던가?

눈 덮인 고갯길에서 보고 느끼고 깨달았던 자신의 모습. 아름다움도 잠시, 속세의 범인은 총총 걸음으로 눈보라를 헤치고 하산의 발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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