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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에서만 목회를 20년 가까이 하다보니 장례식을 많이 치르게 된다. 교인 구성원 절반이 60대에서 70대이다. 장례식을 인도하면서 겪게 되는 제일 어려운 일은, 고인에게 새옷을 갈아입히는 일이다. 염습(殮襲, 이하 염)을 하는 절차도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다. 도시에서는 주로 장의사가 모든 일을 도맡아 처리하지만, 시골에서는 목사가 장의사 노릇까지 해야 한다.
내가 건망증 심하다보니 염(殮)하는 절차가 헷갈릴 때가 많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하는 것은 아니다. 내 방식은 너무 지나치게 격식에 의존하지 않고, 그저 한 인간을 하느님께 돌려보낸다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할 뿐이다. 염하는 과정이나 장례절차는 대부분 유교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무튼 죽은 사람을 땅에 묻기까지 절차가 상당히 복잡하다. 그런 이야기를 길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목사가 장례식을 인도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죽은 사람이 생전에 착하고 진실하게 살아서 자녀들이나 이웃들에게 모범이 되는 경우이다. 그런 사람의 장례식은 처음부터 분위가 다르다. 목사가 장례식을 인도하면서 은혜를 받는다.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한 인간의 돌연한 죽음을 아쉬워하며 유족들과 슬픔을 나눈다. 초상집이 잔칫집처럼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반면 세상에 못된 짓만 골라서 하고, 제 욕심만 부리다 죽은 사람의 장례식을 인도하는 경우는 난감하다. 조문하는 사람들이 곡(哭)을 해도 우는 시늉만 내는 것이지, 진짜 고인의 죽음이 애석해서 우는 것이 아니다. 목사가 장례설교를 해야 하겠는데, 말문이 막힌다.
세상에서 바르고 아름답게 살다 가신 분은 장례식이 끝난 후에도 뒤 맛이 개운하고 좋다. 자녀들은 부모의 죽음으로 인해 더 결속하게 되고, 가족간에 깊은 사랑의 연대가 이루어진다. 그 장면을 지켜보는 사람도 흐뭇해진다. 그러나 형편없이 자기 욕심만 부리며 살다 간 사람의 경우는 장례식이 끝나고 나서도 느낌이 좋지 않다.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고인이 남긴 재산을 한 푼이라도 더 챙기기 위해서 다툼이 벌어진다. 한 번은 장례식을 마치고 유족들에게 위로 예배를 부탁받고 갔는데 마당에 들어서자 고성이 오고간다. 헛기침을 해도 방안에서 큰 목소리로 싸우니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큰 아들이 집어 던진 재떨이에 하마터면 내가 맞을 뻔했다. 목사가 온 것을 알고 그제야 집안전쟁은 휴전이 되었다.
방안에 들어섰는데 분위기가 험악하다. 모두가 아무 일이 없다는 듯이 시치미를 떼고 앉아 있지만 내가 그 집안 분위기를 모르겠는가? 하는 수 없이 나도 모르는 척하고 예배를 인도하는데 등에서 식은땀이 난다. 가시방석이 따로 없다. 부아가 치미는 걸 참느라고 혼났다.
그동안 농촌목회를 하면서 깨닫게 된 것 중 하나가 잘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잘 죽는 것이 복중의 복이다. 그런데 잘 죽기 위해선 잘 살아야 한다. 잘 산다는 게 무엇인가? 돈 많이 벌어서 부자로 사는 것, 아니면 크게 출세하여 이름을 떨치는 것,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성경말씀대로 살면 된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면 사는 것”이다.
예수의 산상수훈에서의 말씀- “하느님 나라와 의를 이루며 사는 삶”도 따지고 보면 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귀결(歸結)된다. 인간의 삶을 다 걸러내고 남는 진액이 바로 그것이다. 기독교신앙을 가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사람은 죽어도 남는 것이 없다.
죽기 살기로 재산 모으는 걸 취미로 알고 살다가 죽을 때가 되면, 더 살고 싶다고 발버둥치만 그도 죽고 만다. 그렇게 살다가 죽은 사람에게선 아무런 향기를 맡을 수 없다.
다음 이야기는 지금부터 8년 전 1995년 12월 3일, 내가 경기도 화성군 남양에서 살았을 때, 일기장에 적어 놓았던 것이다.
지난주 수요일 오후 2시경 김0수씨가 병원에서 퇴원한지 하루 만에 목숨을 끊었다. 지난봄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여 뇌수술을 두 차례를 받고, 그는 끈질긴 투혼과 정신력으로 자신의 병과 싸웠다. 다행히 많은 차도가 있었다. 처음에는 화장실 출입도 할 수 없었던 사람이 목발을 집고 화장실도 다녀올 수 있었고, 마비증세가 있었던 왼쪽 팔도 웬만큼 움직이고 동작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는 긴 여름을 홀로 외롭게 버텼다. 그러나 더 이상의 치료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병원에서 퇴원을 시켰다. 이 뒷이야기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분분하다. 그가 왜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는지, 우리가 좀 더 그의 외로운 삶, 가닥 많은 지친 삶에 대하여 관심과 사랑을 베풀지 못했는지 하는 점에서 말이다. 이렇듯 그의 돌연한 죽음에 대하여 생각이 많다.
죽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것인가? 그는 56년 인생의 무거운 질고를 짊어지고 지금껏 살아왔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가난과 고독을 밥 먹듯이 하면서 부평초 같은 인생을 살아왔다. 그의 말에 의하면 중동지역과 아프리카 건설현장을 두루 섭렵했으며, 한 때는 많은 재산도 모았다고 한다.
한 때는 잘 나가던 그가 몇 해 전, 불행하게도 악덕업자에 사기를 당하고 모든 재산을 다 날렸다고 한다. 그러다 2년 전 오갈 데 없는 자신의 육신을 그가 어려서 자라난 이곳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작년에는 노동으로 단련된 몸으로, 남의 논을 부치기도 하고 집짓는 일과, 개나 오리 등을 키우면서 그럭저럭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반백(半白)이 훨씬 넘도록 장가도 들지 못했는데, 그러고 보면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나이 많은 총각이었다.
그가 죽은 다음날, 대명병원 영안실입구에서 조촐하게 장례예배를 드렸다. 예배를 인도하면서 참으로 난감했다. 뭐라고 기도하고 말씀을 전해야할 지 추운 날씨만큼 괴로 왔다. 그렇게 그는 우리들 곁을 떠난 것이다. 그의 육신을 묻을 곳도 없었고, 또 그의 무덤을 돌볼 사람도 없는지라, 성남 화장터에서 화장을 했다. 56년의 인생행로가 한줌의 재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그는 무엇을 남기고 간 것인가? 저녁나절 그의 먼 친척 몇 분과 동네 이장님, 몇 분의 교우들이 오셔서 그의 옷가지와 유품을 태웠다. 생전 그가 거의 입어보지 않은 듯한 많은 옷과 한 번도 신은 적이 없는 구두가 수두룩하게 나왔다. 맨 날 낡은 구두를 신고 다니던 사람이 왜 새 구두를 신지 않았을까? 왜 그 좋은 가죽 코트를 입지 않았을까?
사람들은 말하길 물건이 아까워서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자기 몸에 대해선 평소에 소중한 보물 다루듯이 하던 사람이, 육신을 치장하는 일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동네 애경사(哀慶事)에도 거의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남에게 도움도 받지 않고 피해도 주지 않고 살겠다는 생활방식이었다.
그는 한 사람의 피붙이도, 친구도, 이성도 남기지 않았다. 그의 모든 유품을 불살라지고 말았다. 겨울로 가는 길목, 깊은 밤이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 '나는 과연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하는 생각에 잠기게 된다. 이 물음은 앞으로 내가 풀어야 할 가장 어려운 숙제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