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일상에서 대화 중에, 글쓰기를 하면서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도적으로 '은유'를 사용하고 있다. 은유란 대상이 되는 사물이나 현상(원관념)을 유사성이 있는 다른 것(보조관념)으로 표현하는 기법을 말한다. '인생은 여행이다'라는 표현은 이제 진부한 은유가 됐다. 만일 어떤 블로거가 '인생은 블로그다'라고 말했다면 은유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불법 대선자금 사건에 연루된 한나라당 서청원 의원이 대검 청사에 도착한 후 기자들에게 "패장이 겪는 고초라고 생각한다, 싸움에서 장수가 지면 당연히 겪는 고초가 아니겠느냐"라고 한 말 속에서도 은유를 볼 수 있다. 정치권은 은유적인 표현들로 가득한 곳이다. 은유는 직설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돌려 말하기'인데,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율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은유와 환유
은유가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유사성'에 기인한 방법이라고 한다면, 환유는 '인접성'에 따른 기법이다. '청와대에 따르면'이라는 기사에서 청와대가 대통령이나 정부를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청와대와 대통령 간의 인접성 때문이다.
은유와 환유는 시 창작의 가장 중요한 기법이다. 은유가 개념의 유사성에 따라 '선택'적으로 취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한다면, 환유는 인접성에 따라 '배열'되는 방법이다. 이 두 가지를 적절히 활용하면 훌륭한 시적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이 두 가지 방법은 서로 보완적이기 때문에, 환유는 항상 어느 정도는 은유적이며, 은유는 대부분 환유적이다.
'한국 올림픽 축구 대표팀, 모로코에 1:3 으로 무릎'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무릎' 은 분명 '무릎을 꿇다'의 축약이며 '패배하다'의 은유인데 매우 환유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은유의 사용
우리가 흔히 '죽은 은유(사은유)'라고 말하는 진부한 표현들을 비롯해, 은유의 사례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커베체쉬의 저서 <은유> 에 따르면 이 죽은 은유가 어쩌면 가장 활발하게 사용되는 '살아있는' 은유일 것이라고 말한다. 속담을 비롯해 우리는 수많은 은유를 사용하고 있다. 다만, 은유라고 인식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은유가 좀 더 효과적으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늘 동일한 '층위'에서 다뤄져야 하는데, 스핑크스가 오이디푸스에게 냈던 수수께끼가 이것을 잘 설명해 준다. 아침에 네 발로 걷고, 한 낮엔 두 발로, 저녁엔 세 발로 걷는 것은 인간의 유아기, 성인기, 노년기의 은유인데, 만일 세 번째 부분을 '저녁엔 세 개의 머리가 생기는'이라고 바꾼다면 뜬금 없지 않겠는가. 어긋나 보이는 것은 층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걷는 것으로 비유를 했다면 같은 층위 내에서의 일관성을 유지해야 효과적으로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층위가 약간 어긋난 비유를 살펴 보자.
(…) 우리는 북한 주민의 2년치 식량 구입비에 육박하는 십수조원을 오로지 사교육에 쏟아 붓는다. 그럼에도 교육경쟁력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최하위다. 빚을 내서라도 과외를 시켜야 하고, 사교육 때문에 아파트값이 급등한다. (…) (<문화일보> 2004.1.10.)
전달하려는 의도가 파악되지 않을 정도는 아니지만, 사교육에 '낭비'되는 돈이 엄청나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같은 층위에서 비교를 하면 더 효과적일 것 같다. 북한 주민의 식량 구입비로 빗대기보다는 동일한 층위 내의 '교육' 분야를 예로 들었다면 어떨까. 그 정도 비용이라면 공공 도서관을 몇십 개는 지을 수 있지 않은가. 이를테면 말이다.
같은 층위 내에서의 적절한 비유는 글의 설득력을 높여주는 좋은 기법이 될 수 있고, 과잉의 감정이 절제된 은유 기법은 처음엔 미약해 보이지만 나중엔 더 큰 위력을 발휘하게 됨을 종종 경험하고 발견한다.
동일한 층위를 지켜야 재미있는 퀴즈 하나를 예로 들어 보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있다/없다 퀴즈.
팔보채엔 있고 양장피엔 없는 것
세븐에겐 있고 휘성에겐 없는 것
말죽거리 잔혹사엔 있고 실미도엔 없는 것
이 문제의 매력은 답을 맞히는 게 아니고, '동일한 층위' 에서 새로운 질문을 계속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답을 알아낸 이들에게만 허락되는 즐거움이다.
'팔보채엔 있고 스파게티엔 없는 것' 이렇게 문제를 만들면 규칙 위반이라 재미가 없다. 층위가 어긋났거나 너무 광범위해 설득력을 잃기 때문이다. 은유도 마찬가지다.
<시사저널> 738호의 ‘잠들지 못하는 '야광나무' 의 슬픔’ 이라는 기사에 이런 구절이 있다.
(…) 겨울 나무들은, 온 몸에 꼬마전구를 친친 동여매고 불꽃을 피웁니다. (…) 전구 열 때문에 겨울 나무들 체온이 올라갑니다. 쉬어야 할 겨울에 에너지 소모가 많아져서 봄에 제대로 자라지 못합니다. (…)
'가로수 전구 장식, 나무에 해롭다'라는 직설적인 표현 대신 은유적인 기법을 활용하고 있다. 은유는 독자에게 한 번 더 깊이 생각할 기회를 준다. 은유는 머릿속의 언어가 아닌 가슴 속의 언어이며, 감정의 절제를 이끌어 상호간의 직접 충돌을 막아주는 완충제이며 윤활제이다.
아직까지는 직설 화법이 중시되는 웹 공간에서도 은유의 미덕이 넘쳐 나기를.
덧붙이는 글 | 은유에 대한 참조 도서 :
김준오, <시론>, 삼지원.
커베체쉬 저 / 이정화 외 공역, <은유>, 한국문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