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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겨울은 좀 유난하지 싶다. 초기에는 '이상난동(異常暖冬)'이라는 말도 나오게 했다. 겨울 상품이 안 팔리고 스키장들이 불황을 겪는다고, 상인들보다 언론이 먼저 방정을 떨었다. 농촌에서는 가뭄 걱정을 했다. 그러더니 설을 앞두고 기습한 강추위와 많은 눈이 일주일 넘게 전국을 꽁꽁 얼어붙게 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설 고생'을 단단히 안겨 주었다.

사람들은 추위와 명절 고생 속에서 겨울답지 않다고 했던 얼마 전의 입 방정을 잊었다. 더러는 그것을 상기하며 조금은 무안한 심정을 가진 이들도 있을 테지만, 그런 여유조차 없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설 명절을 앞두고 한파가 기습한 가운데, 서울 지하철역 한 곳에서 밤을 지새던 삼십대의 노숙자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 빠르게 지나가는 텔레비전 뉴스 보도 속에 잠시 그 얘기가 있었다. 그 보도는 곧 잊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짧은 보도를 접하는 순간 '민족대이동'이라는 말로 회자되는 '명절 고생 행렬'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이 아무리 고생스러워도 그들에게는 명절에 찾아갈 고향이 있고 집이 있건만….

서울에서 사는 당질들이 그믐날과 설날 인사를 왔다. 보통 2시간이면 오는 길을 6시간이나 걸렸다는 말을 듣고 그들의 명절 고생을 상기하는 순간 뜬금없이 서울 지하철역에서 얼어죽은 노숙자를 떠올렸다.

그의 슬픈 삶과 얼어죽는 동안의 고통을 상상하자니 내 따뜻한 보금자리, 포근하고 푹신한 이부자리에서 편안한 팔자를 즐기는 잠이 과연 온당한 일인가, 죄스럽기조차 한 마음이 들었다.

지난 25일 저녁에 뒷동에 사는 동생이 와서 내 몸에 지압을 해주었다. 지압을 받으며 비몽사몽 중에 있을 때였다. 문 밖에서 누군가가 단추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누구요?"하며 문을 조금 열었다.

"아르바이트 허는 학생인데요. 돈 좀 벌려구요."
앳된 청소년의 목소리인데 꽤나 어눌한 말투였다.

그 어눌한 말투가 이상했는지 어머니가 "뭐라구 헸디야?"하니, 문 밖의 그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잠시 후 어머니는 "팔 물건두 읎는 것 같은디…. 뭔지는 물르지먼 우린 안 사"하며 문을 닫았다.

"바깥이 되게 추울 텐디, 일단 들어오게 허지 않구 왜 그렇게 박절허게 보낸대요?"
나는 누운 채로 어머니를 보며 불평을 했다.

"말소리두 이상허구, 물건 팔러 온 게 아닌 것 같어서 그냥 보냈어."
"동냥을 허러 온 건지두 물르는디…. 그렇게 그냥 보내면 된대요? 일단 들어오게 헤요."

핀잔 섞인 내 말에 어머니는 다시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시고는, "벌써 갔어. 안 보여"하며 문을 닫았다.

"온전히 정상인 사람은 아닌 것 같던디, 말소리가…."
나는 목구멍에 뭔가 걸린 것 같은 느낌 때문에, 그리고 동생의 지압 때문에 나도 어눌한 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르바이트 학생은 아닐 거예요. 아르바이트 학생이라면 낮에 물건을 팔러 다녀야지 왜 밤에….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방에 있던 아내가 거실로 나오며 참견을 했다.

"걱정을 안 허다니, 이 추운 밤에 어린 사람이 그러구 댕기는디…."
"불쌍헌 사람 같으면 돈이라두 좀 주어서 보냈어야 허는디, 옷차림을 보니께 꼭 그런 것 같지두 않구…."
"지금은 불쌍헌 사람두 행색은 옛날 같지 않유."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입을 다물었다. 지압 자세를 바꾸어서 말을 할 수도 없었지만, 어머니를 더 곤란하게 해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 날밤 나는 잠자리가 편치 않았다. 꼭두새벽에 잠이 깨었는데 적이 괴로운 심정이었다. 앳된 청소년의 음성에다가 정상인이 아닌 것처럼 말이 어눌했던 그는 누구일까? 우리 집 다음에는 어디로 갔을까? 돌아가서 편히 누워 밤을 지낼 보금자리는 있는 걸까? 자꾸만 갖가지 의문들이 벌불졌다.

그는 우리집 문에 붙어 있는 천주교 신자 표식을 보고 우리 집을 택해 단추를 눌렀던 것은 아닐까? 또 어쩌면 우리 집이 소설가의 집이라는 것을 알고 일부러 와서 단추를 누른 것은 아닐까?

우리 집에서 그렇게 박대를 당하고 발길을 돌리면서 그는 얼마나 실망하고 섭섭하고 슬픈 마음이었을까? 어떤 참담한 절망감 같은 것이 한 순간 그의 마음을 에워싸지는 않았을까?

그가 아르바이트 학생이 아니고, 진짜 불쌍한 사람도 아니고, 어떤 불순한 마음이나 장난으로 우리집을 찾은 경우라 할지라도, 우리가 그를 그렇게 문 밖에서 박절하게 보낸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옛날 남문리 옴팡집에서 살 때 저녁 무렵 우리집을 찾은 거지를 집안으로 들이고 마루에 앉히고 따뜻한 밥상을 차려 대접하던 어머니의 심성이 세월 따라 변하기라도 한 것일까?

주인들이 명절을 쇠러 가서 밥을 굶게 된 뒷동의 개를 불쌍히 여겨 밥그릇을 들고 눈밭을 다니신 어머니의 그 동정심이 그 순간은 어디로 갔던 것일까?

동생에게서 지압을 받는 그 늘어진 팔자 때문에 그 순간 내가 너무 무책임했던 것은 아닐까? 왜 그 순간에는 아무런 순발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일까?

다음날 아침 식사 자리에서 나는 간밤에 잠을 못 잔 얘기를 했다. 내 잠자리를 어지럽혔던 이런저런 상념들을 토로하고, '그는 과연 누구이고, 그 밤에 어디로 갔을까?' 지워지지 않는 의문을 얘기했다.

"당신두 참…왜 그렇게 소심해요."
아내는 나를 핀잔하면서 학교에서 종종 겪는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알고 보면 멀쩡한 아이들이 교실까지 찾아와서 이상한 말소리를 하며 돈 구걸을 한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이라니?"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정도의 애들인데, 패를 지어 가지고 그러는 것 같아요. 정말로 그런 애들이 있다구요."
"그렇다구, 어제 저녁에 우리 집에 왔던 그 애두 같은 부류라구 단정헐 수는 읎잖어?"
"아무튼 그 일 가지구 너무 상심허지 말라구요."

그러자 어머니도 한마디했다.
"어제 저녁엔 식구들이 다 있을 때 벨 소리가 나서 내가 문을 열어줬지, 나 혼자 있을 땐 문을 열지두 뭇혀. 지금이 워떤 세상이여?"

"그래두 어제 우리가 헌 일은 아무리 생각헤두 잘헌 일이 아닌 것 같유. 어제 그 애가 진짜루 불쌍헌 사람은 아니구, 어떤 불순헌 마음이나 장난으루 우리 집엘 온 경우라구 허더래두…."

"무슨 말인지 알 듯허다가두 잘 물르겄네."
"알 필요 없어요, 어머니. 이 이는 원래 별 생각을 다허구 사는 사람이니께 그냥 그런가보다 허세요."

"또 갑자기 며칠 전에 서울 지하철역에서 얼어죽은 노숙자 생각이 나네."
"그건 또 왜…?"
"그냥 혼자 해보는 생각이에요."

잠을 잘 못 자서 그런지 입안이 깔깔하고 밥맛이 없었다. 명절 뒤끝이 이상하게 더욱 허전해지는 느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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