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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이 조일옥 씨에게 복원을 의뢰해서 만든 가거도 배.
1997년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이 조일옥 씨에게 복원을 의뢰해서 만든 가거도 배. ⓒ 오창석
바닷가에서 살아 보지 않은 사람에게 ‘배’는 정말이지 낯선 존재다. 그 삶에 뿌리 박고 있지 못함으로 인해 생기는‘낯섦’은 생산의 고단함을 거세하고 추상적 동경이나 낭만으로 빈자리를 채운다. 우리가 아는 배는 석양이 뿌린 황금의 가루로 반짝이는 수면 위로 미끄러져 가며 TV프로의 막간을 시도 때도 없이 장식하고 있었거나, 아니면 섬으로의 여행을 위해 잠깐 몸을 실어 보았던 유람선, 철선 정도가 고작이다.

국립해양유물전시관 앞 바다에 떠 있는 제주도 '떼배'는 한선의 원시 형태를 보여준다.
국립해양유물전시관 앞 바다에 떠 있는 제주도 '떼배'는 한선의 원시 형태를 보여준다. ⓒ 오창석
그러나 그리 멀지 않은 시간 속에서 배는 우리네 삶과 깊은 연관을 맺으며 길고 긴 항해를 지속해 왔다. 먼 옛날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고 문명이 시작된 곳에는 어김없이 강과 바다가 있었고, 그들은 배를 이용해 고기를 잡고, 새로운 땅을 찾아 떠났으며, 문명을 주고받았다.

삼면이 바다인 한반도 역시 삼한시대부터 강과 바다를 통해 중국, 일본 등과 내왕했고, 삼국시대에는 세 나라가 해전을 벌이면서 힘을 겨뤘으며 주변국들과 독자적으로 교류했다.

특히 서남해안 지역은 발달된 내륙수로인‘강’과 바다의 연계를 통해 일찍이 해상활동이 왕성했다. 지금의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했던 장보고는 서남해안을 중심으로 바다를 장악하여 동아시아의 역사 속의 해상왕이자‘신(神)’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역시 내륙 깊숙이 연결된 수운(水運)을 통해 세금으로 걷힌 쌀, 소금 등이 전국에서 모아지고 모든 물자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고려 태조 왕건은 궁예의 휘하 장수로 있던 시절, 영산강을 타고 들어와 나주를 점령하여 후백제를 견제하는 교두보이자 고려건국의 기초를 세웠다. 이처럼 당시 사회의 혈류(血流)였던‘물길’을 꿰뚫어 이용하지 못하고서는 정치, 경제, 군사적 성공을 거둘 수 없었다.

해저에서 건저 올린 '완도선' 파편. 뱃전과 여러 쪽을 평평하게 이어 붙인 밑판이 전통 한선의 모양을 보여준다.
해저에서 건저 올린 '완도선' 파편. 뱃전과 여러 쪽을 평평하게 이어 붙인 밑판이 전통 한선의 모양을 보여준다. ⓒ 오창석
그렇다면 우리의 강과 바다에는 어떤 배들이 다녔을까? 큰 강마다 댐을 세우고 하구에는 둑이 쌓여진 지금, 말라비틀어진 강을 보고 곡식 천 가마를 실은 배가 항해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수량이 풍부했을 당시의 강과, 수심이 얕은 연안의 조건에서 운항했던 우리의 배가 있었으니 이를‘한선(韓船)’이라 부른다. 이것은 배 밑바닥이 평평한 ‘평저선형(平底船形)’ 구조를 갖고 있어 어느 나라의 선박과도 뚜렷이 구별된다.

전남 신안군 임자도 인근 해역에서 새우잡이로 이용되었던 멍텅구리 배는 전통 한선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전남 신안군 임자도 인근 해역에서 새우잡이로 이용되었던 멍텅구리 배는 전통 한선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 오창석
이런 형태는 서남해안 지역에서 나타나는 극심한 조수간만의 차이와 더불어 개펄이 넓게 발달한 지리적 여건에서 기인한다. 한선의 평저선형 구조는 물 속에 잠기는 뱃전의 깊이가 낮아 얕은 수심의 연안과 강을 항해하는데 적합하며, 또한 만조 때는 물에 떠 있다가 썰물 때에는 개펄에 그대로 안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완도 어두리섬 앞 바다에서 발견된 11세기 ‘완도선’역시 전형적인 전통 한 선의 구조를 갖고 있었으며, 일본정벌에 나섰던 여몽연합군의 선단 중에서 중국배는 대부분 태풍에 깨어지고 고려 배들만 남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뛰어난 배의 구조와 함께 한 발 앞선 조선술이었음을 보여준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주력으로 활약했던 판옥선(板屋船) 역시 우리 배의 전형이며 돌격함으로 쓰였던 그 유명한 거북선(龜船)도 판옥선의 갑판 부분만 떼어내고 거북등을 씌운 한선이다. 당시 일본 수군의 배들은 뱃전에 쓰인 목재의 두께가 상대적으로 얇고 넓어서 조선의 전선(戰船)이 쫓아가 부딪히면 맥없이 부서졌다.

해양유물전시관 내부에 있는 배 짓는 현장 모형.
해양유물전시관 내부에 있는 배 짓는 현장 모형. ⓒ 오창석
그러나 일제 강점기 정치, 경제적 주권을 빼앗긴 우리 겨레는 일본의 조선업(造船業)에 밀려 훌륭한 우리 배의 전통을 잃고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30년대 이후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전통 한선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는 배는 가장 최근까지 조업하였던 멍텅구리배와 강화도의 곳배, 가거도의 멸치잡이배 등인데 목포의 조일옥(63)씨는 1997년 목포해양유물전시관의 의뢰를 받아 가거도배를 복원하였다.

“내가 원래 가거도 사람이라 열두어 살 때부터 배 짓는디서 심부름함서 배웠어. 지금은 누가 맨들어 도라고 하먼 이배도 저배도 다 맨들어 주지만, 여자도 이뻐야 쳐다보는거 아닌가? 가거도배 얼마나 이쁜가?

옛날에 멜치잡이 끝나믄 나무도 실어다 팔고 미역, 젓갈도 실어다 팔았제. 영산포까지 댕김서 돛바람만 불먼 파도고 뭣이고 신나게 달렸어. 이 섬 저 섬에서 개펄에 배 올려 놓고 옹기, 소금 같은 거 팔믄 사람들 다 나와서 구경허고 사 가고, 그것이 장이었제”

조일옥 씨가 자신이 만든 모형 한선(가거도 배)을 설명하고 있다.
조일옥 씨가 자신이 만든 모형 한선(가거도 배)을 설명하고 있다. ⓒ 오창석
해양유물전시관의 김익주 연구사는“일제 강점기 이후 전승이 단절된 한선만큼은 꼭 보존해야 한다"며 "우리의 해양조건에 따라 선조들이 수천년간 발전시켜 온 너무나도 훌륭한 조선기술입니다. 지금의 배 짓는 법에 적용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가거도 멸치잡이 노래는 지방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정작 ‘한선’에 대해서는 노동부 지정 기능전수자만 있을 뿐, 국가지정은 물론 지방무형문화재 지정도 되어 있지 않은 실정이다.

해양유물전시관 앞바다에 떠 있는 가거도배가 다 삭고 나면‘우리 배’의 운명은 어떻게 될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멍텅구리 배에서 쓰이던 거대한 닻. 조류가 빠른 곳에서 자리를 잡고 조업을 하기 때문에 닻의 규모가 큼.
멍텅구리 배에서 쓰이던 거대한 닻. 조류가 빠른 곳에서 자리를 잡고 조업을 하기 때문에 닻의 규모가 큼. ⓒ 오창석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s-oil'사보 1월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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