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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29일) 우리 교회 중등부 학생들과 함께 문화체험 프로그램의 하나로 뭍에 나가 영화를 보고 왔다. 섬에서 살다보니 대형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일이 쉽지 않다.
교회 마당에 모여 승합차를 타고 배 터에 도착했더니 배가 ‘부웅’하고 떠나는 것이었다. 1분만 일찍 도착 했어도 배를 탈 수 있었을 텐데, 배 시간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럴 경우에는 무작정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아이들은 영화를 보러 간다고 하니 신나서 쉬지 않고 떠든다. 평소 얌전하던 애들도 한데 모아놓으면 수다쟁이가 된다.
겨울철이면 물때에 걸려 골이 깊은 곳으로 배가 돌아야 하고 평소 운항시간보다 3배 이상 걸린다. 겨울철에는 일몰 시간도 빨라지고 물때에도 걸려 막배 시간이 오후 4시 30분으로 앞당겨진다. 그러니 뭍에 나가 영화 한편 보고 점심 먹고 오면 딱이다. 다행히 얼마 기다리지 않아 배가 도착했다. 아이들이 좋아서 환호성을 지른다.
차 안은 아이들 떠드는 소리로 정신이 하나도 없다. 얼마나 시끄럽든지 운전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젊음이 좋긴 좋다. 차 안에서 아이들의 얘깃거리는 어떤 영화를 볼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요즘은 영화관이 캐비닛처럼 한 건물에 대 여섯 개씩 들어서서 자기 취향대로 골라 보면 된다.
어떤 애들은 ‘실미도’를 보겠다고 하고, 어떤 애들은 ‘말죽거리 잔혹사’나 ‘내 사랑 싸가지’를 보겠다고 한다. 좋은 시대에 살고 있다. 한 건물 안에 개봉관이 대 여섯 개씩 들어서서 영화도 TV채널처럼 선택해서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일이었다.
유년 시절, 나는 강원도 화천초등학교를 다녔다. 학교에서 일년에 서너 번 단체로 영화 구경을 갔다. 화천 읍내에 영화관이 딱 한군데 있었다. 군인극장이었다. 화천이 전방지대이기도 하고 군인가족들이 많아 어떤 경로로 극장을 인수하여 운영하였는지는 모르지만 군인극장이 있었다. 군인가족들만 출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민간인들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 단체로 영화구경을 가면 그날은 온통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다. 오전 수업만 하고 점심 도시락을 먹은 후 군인극장을 향해서 반별로 줄을 맞춰 행진을 한다.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그런데 나는 기분이 썩 유쾌한 것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단체로 영화 관람을 하면 영화 보는 값을 대폭 할인해 준다. 그 때 돈으로 5원인가 했는데 그 돈이 없었다. 영화구경을 가기 전날, 어머니께 말씀을 드려야 했는데 영화구경 간다고 돈 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집안 형편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짝꿍하고 손을 잡고 줄을 맞춰 걷는데 영화관이 가까워올 수록 내 속은 답답했다.
그 시절은 참으로 가난했다. 나 같은 아이들이 꽤 있었다. 그래서 궁리해 낸 묘안이 신문지를 1원짜리 종이돈 만하게 가위로 잘라 1원짜리 종이돈과 함께 딱지를 접는다. 영화관을 입장할 때 한꺼번에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어갈 때 1원짜리 딱지를 내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다 걸려서 쫓겨 나가는 경우도 있고, 꿀밤을 한 대 맞는 수도 있다. 그날 돈을 누가 받느냐에 따라 성공여부가 결정된다. 1원짜리 딱지 돈을 손에 쥐고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순간 가슴이 방망이질을 한다.
“야 새끼야, 너 이리 와봐. 너 누굴 속이려고 하냐? 야, 이 새끼들 봐라!”
들킨 것이다. 갑자기 모든 아이들의 시선이 한군데 집중된다.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더러 선생님이 돈을 내주신 적도 있었다. 집안이 가난하여 영화 볼 돈이 없는 아이들을 파악해서 선생님이 대신 돈을 내주시기도 하고, 극장 관장(육군 준위)에게 말씀드려 그냥 들여 보내주기도 한다. 그러면 횡재한 기분이 들었다.
그 시절에는 주로 반공영화와 신파조 영화가 많았다. 이데올로기에 관련한 반공영화를 보고 나오면 한동안 교실 안은 총싸움으로 요란해 진다. 신파조 영화를 보고 나올 때에는 아이들 눈이 다 벌겋다.
영화에 대한 결정적인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여름 방학을 얼마 앞둔 7월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교실 안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군인극장에 재밌는 영화가 들어왔다는 것이다. 영화 제목이 ‘포세이돈 어드벤처’였다. 그 때만 해도 학생입장불가가 철저하게 지켜지던 시절이었는데 ‘포세이돈 어드벤처’는 학생입장불가 영화였다.
이마에 여드름을 덕지덕지 붙인 조무래기 몇 명이 작당을 했다. 오늘 밤 그 영화를 보기로. 그 틈바구니에 나도 끼었다. 저녁밥을 일찍 먹고 군인극장 앞에서 6명의 친구들이 만났다. 물론 사복으로 갈아입고, 먼저 극장 주변 동태를 살핀다. 혹 학생주임이나 선생님이 지키고 있지는 않은지. 극장 주변을 건달처럼 눈치를 보며 왔다 갔다 한다.
다행히 선생님이 보이지 않았다. 6명의 친구들이 표를 끊어서 선생님께 들킬까봐 후닥닥하고 입장을 했다. 지금은 영화 줄거리도 잘 생각이 나지 않지만 흥미진진한 내용이었다.
군인극장 수준이 오죽했겠는가? 전국에서 몇 년째 돌다가 헐값에 빌려온 영화 필름이니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비가 온다. 영화 도중 서너 번 중단된다. 필름이 끊긴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휘파람을 불며 소리를 지른다. 더군다나 영화의 클라이맥스나 키스하는 장면에서 영화가 끊기면 난리가 난다.
재밌게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극장 입구에 어디서 많이 본 어른이 서 있었다. 학생주임이었다. 6명이 한꺼번에 걸린 것이다. 악랄(?)한 학생주임 선생님께 걸리면 국물도 없었다.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 그 다음날 아침 교무실로 불러가서 이발기계로 머리를 깎여 머리 한 가운데로 고속도로를 만들어 놓더니 일명 ‘빳다’를 열대쯤인가 맞았다.
그리고는 반성문을 쓰란다. 그런데 뭐라고 반성문을 쓸 것인가? 나는 솔직하게 ‘포세이돈 어드벤처’가 왜 학생입장불가인지 모르겠다고 썼다. 그렇게 썼다가 나만 ‘빳다’ 다섯 대를 더 맞았고 전원이 일주일동안 '중노동'에 동원되었다.
쓰레기 소각장을 큼직하게 하나 파라는 것이었다. 그 무더운 여름날 수업에도 못 들어가고 일주일 내내 삽과 곡괭이로 쓰레기 소각장을 팠던 기억이 난다. 얼마나 툴툴거리면서 땅을 팠을까 생각하니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아이들이 영화관에 도착해서 자기들 취향대로 쪼개졌다. ‘실미도’, ‘말죽거리 잔혹사’, ‘내 사랑 싸가지’… 조조 영화여서 할인이 되었다. 끝나는 시간도 비슷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오니 반가운 손님이 찾아 오셨다. 우리가 영화를 보러 뭍으로 나온 것을 알고, 모 항공사 기장으로 계신 분이 영화관까지 찾아와 점심밥을 사주시겠다고 온 것이다. 모 신문에 실린 내 기사를 보고 그때부터 팬이 되었다고 한다. 덕분에 점심밥을 잘 얻어먹었다. 참 고마운 분이다. 다음에 또 만나기로 약속했다.
시간이 한 시간 정도 남았는데 아이들이 노래방을 가자고 한다. 노래방엘 들어갔더니 애들이 그야말로 방방 뛴다. 어디에서 해방된 것일까? 노래마다 열창을 한다. 무슨 노래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촌놈들이 단체로 뭍에 나와서 영화 보고 점심밥도 잘 먹고 노래방에서 노래까지 부르니 소원 풀은 거 아닌가?
창후리 배 터에 도착하니 막배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물때에 걸려 배가 한참 돌았다. 교동에 도착하여 집으로 가는 차안에서도 아이들은 여전히 참새처럼 재잘거린다. 내가 오늘 본 영화보다도 아이들의 표정이 더 예쁘고 재밌다. 오늘 하루가 재밌는 영화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