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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 이상문학상 작품집>
ⓒ 문학사상사
"삶은 곧 기갈인 것인데, 시간은 돌이킬 수 없고 거스를 수 없으며 피할 수 없고 붙잡을 수 없고 만질 수 없고 그 앞에서 멈칫거릴 수 없는 것이어서, 그 배고픔과 목마름이 돌이킬 수 없는 생로병사의 길이라 하더라도, 문학은 저 불가능들의 편이 아니라 기갈의 편이라야 마땅할 것입니다."

2001년 동인문학상에 이어 올해 이상문학상까지 거머쥔 작가 김훈(56)은 삶과 문학은 '기갈'이라고 말한다. 근데 그는 왜 삶과 문학은 늘 허기에 지쳐 핏발 선 눈알을 번득이는 것이라고 했을까. 그것은 바로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인간의 끊임없는 노력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래. 아무리 몸부림쳐도 물처럼 흐르는 시간을 어찌 붙잡을 수 있겠는가. 아니, 김훈의 말처럼 "시간은 돌이킬 수 없고 거스를 수도 없으며 피할 수도 없고 붙잡을 수 없고 만질 수 없고 그 앞에서 멈칫거릴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삶과 문학은 늘 기갈에 허덕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죽어가는 아내라기보다, 질병에 파먹혀 급격히 붕괴하는 살덩어리의 고통을 곁에서 지켜보며, 자신 또한 요도병으로 붕괴가 시작된 살덩어리임을 절감하는 처연한 순간에, 회사의 신입 여사원을 향해, '사랑해, 사랑해'라고 건네보지도 못할 독백을 절박하게 중얼거리는 것이야말로 삶이 숨기고 있는 잔혹한 비밀이 아니겠는가." (서영은 '심사평' 몇 토막)

작가 김훈은 누구인가?
기자생활 때부터 미문으로 이름 떨쳐

"나는 피난지 부산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전쟁이 끝나고 정부가 서울로 돌아간 후에도 한동안 부산에서 살았다. 내가 살던 마을은 전국 각지의 피난민들이 모여 있던 대신동 판자촌이었다." (김훈 자전적 에세이 <가건물의 시대 속에서> 몇 토막)

작가 김훈은 1948년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역임했던 김광주씨의 차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나 <한국일보>에 입사해 한동안 언론인의 길을 걸었다.

당시 작가가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할 무렵 오랫동안 연재했던 '문학기행'과 여러 가지 문학관련 기사들은 독자들로부터 해박한 문학 지식과 김훈만의 독특한 문체라는 평가를 받았다.

산문집으로 <내가 읽은 책과 세상><선택과 옹호><풍경과 상처><자전거 여행><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말라>가 있으며, 중편소설집으로는 <빗살무늬 토끼의 추억> <칼의 노래>가 있다. 2001년 <칼의 노래>로 동인문학상 수상.
/ 이종찬
2004년도 제28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화장>(문학사상사)이 나왔다. 이번 작품집에는 대상작인 김훈의 중편소설 <화장>과 자선 대표작 <여자의 풍경, 시간의 풍경> <가까운 숲이 신성하다> <충무공, 그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에 대하여> 와 자전적 에세이 <가건물의 시대 속에서>가 실려 있다.

이어 특별상으로 선정된 문순태의 <늙으신 어머니의 향기>와 우수작으로 선정된 구효서의 <밤이 지나다>, 김승희의 <진흙 파이를 굽는 시간>, 전성태의 <존재의 숲>, 고은주의 <칵테일 슈가>, 하성란의 <그림자 아이>, 정미경의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 박민규의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가 차례대로 실려 있다.

이번에 대상을 받은 김훈의 <화장>은 화장품 회사 간부인 주인공 '나'가 뇌종양으로 임종하는 아내의 화장(火葬)과 '나'가 은근히 마음에 두고 짝사랑하고 있는 신입 여사원 추은주의 화장(化粧)을 통해, 중년 남성의 자잘한 심리를 세련되게 표현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운명하셨습니다." 당직수련의가 시트를 끌어당겨 아내의 얼굴을 덮었다. 시트 위로 머리카락 몇 올이 삐져나와 늘어져 있었다. 심전도 계기판의 눈금이 0으로 떨어지자 램프에 빨간 불이 깜빡거리면서 삐삐 소리를 냈다. 환자가 이미 숨이 끊어져서 아무런 처치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삐삐 소리는 날카롭고 다급했다. 옆 침대의 환자가 얼굴을 찡그리면서 저편으로 돌아누웠다.

...

당신의 이름은 추은주, 제가 당신의 이름을 부를 때, 당신은 당신의 이름으로 불린 그 사람인가요. 당신에게 들리지 않는 당신의 이름이, 추은주, 당신의 이름인지요.
제가 당신을 당신이라고 부를 때, 당신은 당신의 이름 속으로 사라지고 저의 부름이 당신의 이름에 닿지 못해서 당신은 마침내 3인칭이었고, 저는 부름과 이름 사이의 아득한 거리를 건너갈 수 없었는데, 저의 부름이 닿지 못하는 자리에서 당신의 몸은 햇빛처럼 완연했습니다.

(<화장> 몇 토막)


뇌종양을 앓고 있는 아내의 처참한 몰골과 신입사원 추은주의 생기 발랄한 외모. "스스로 두려운 마음으로 늘 신인으로 살고 싶다"는 작가 김훈. 그래, 어쩌면 김훈은 <화장>에서 자신의 현재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는 이미 오십대 중반이지만 늘 신인으로 살고 싶다는 그의 다부진 각오처럼 말이다.

아내는 일주일째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이혼하고 혼자 사는 언니가 아파서 병구완을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아내가 돌아오지 않는 것은 어머니의 냄새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어머니의 냄새는 보통 냄새가 아니어요. 두엄 썩는 냄새, 아니 제초제 냄새를 맡고 있는 것 같아요. 집에 있으면 냄새 때문에 식욕도 떨어지고 생머리가 지끈거려요. 병이 나겠다니까요. 꼭 무서운 바이러스 같다고요."

(문순태 <늙으신 어머니의 향기> 몇 토막)


제28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화장>은 장편소설에서 느끼지 못하는 중·단편소설의 진수를 맛 볼 수 있다. 특히 이 작품집에 실린 중·단편소설들은 일반 독자와 언론사 문화부 기자, 문학평론가, 작가 등 여러 단계의 손길을 거쳐 뽑힌 수작들로 표현상의 치밀성과 농축성이 한껏 돋보인다.

한편, 이번 이상문학상 심사위원으로는 이어령, 김윤식, 서영은, 윤후명, 권택영, 권영민, 김성곤씨가 맡았으며, 심사위원 전원일치로 김훈의 <화장>을 대상작으로 뽑았다.

화장 - 2004년 제28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김훈 외 지음, 문학사상사(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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