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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노와르 투쟁국장이 "우리는 합법적으로 일하고 싶다. 깨비, 헉, 샤멀 지부장을 구출하고 합법화 쟁취할 때까지 끝까지 싸울 것이다"고 외치고 있다.
ⓒ 전민성
16일 오후 3시 서울 양천구 신정동에 위치한 서울 출입국관리소 앞에서는 전날(15일) 서울 혜화동에서 샤멀 타파 평등노조 이주노동자지부 지부장을 연행한 법무부 출입국 관리소에 대한 규탄 집회가 열렸다.

농성단의 회의 결과에 따라, FTA 비준안 국회상정 일정에도 불구하고, 명동성당 이주노동자 농성단 등 100여명은 예정에 따라 출입국사무소 앞으로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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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 이주노동자 농성단장 연행 당해

▲ 이주노동자 100여명이 서울 출입국사무소 앞에서 샤멀 타파 지부장 표적연행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 전민성
출입국관리소 앞에 모인 이주노동자들과 연대동지들은 투쟁조직국 자히드씨의 사회로 이 땅에서 이주노동자로 일하다가 목숨을 잃은 노동자들에 대한 묵념과 ‘님을 위한 행진곡’으로 집회를 시작했다.

노숙투쟁 94일째를 맞은 명동성당 농성단의 마문씨는 "여기 있는 우리 동지 하나 하나가 샤멀 타파이며, 꼭 한 사람씩 모두 빼내 올 것이다. 지금까지 숨어 있었지만 이젠 무섭지 않다. 동지들을 잡아간 직원들의 집까지라도 쫓아가서 동지들을 구출해 오겠다”고 말했다.

그는 "외국인보호소가 깨비, 헉뿐 아니라 어제 샤멀 타파 지부장을 표적 연행했다. 보호소에 갇혀있는 외국인노동자 모두를 구출해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합법화를 쟁취할 때까지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밝혔다.

▲ 이주노동자 시위자가 "사멀 타파 지부장을 석방하라"는 구호가 적힌 광고판을 들고 있다.
ⓒ 전민성
민주노동당 양천지구당 위원장도 "노무현 정부가 노동자의 기본권, 노동할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노동자들의 저항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출입국관리사무소는 샤멀 타파 지부장을 연행해 가면 우리의 대오가 흔들릴 것으로 예상했겠지만, 우리는 오늘 이렇게 나와 그들의 예상이 빗나갔음을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이어서 성공회 대성당에서 90일 동안 시위를 벌였던 성공회 대성당 이주노동자 투쟁단의 민수씨가 나와, “너희들이 그 위에서 우리를 비디오와 사진으로 찍고 있다는 것을 안다. 숨어서 찍지 말고 이 앞으로 당당히 나와 찍어라!”고 외쳤다.

천지인의 임광현씨가 ‘조금씩’, ‘Trials of Our Times’을 불러 집회 참석자들의 사기를 진작했다.

▲ 성공회 대성당 투쟁단의 민수씨가 출입국관리소를 향해 "숨지 말고 내려와서 사진을 찍어라"고 외치고 있다.
ⓒ 전민성
아노와르 투쟁국장은 집회 참가자들에게 강하게 호소했다.

“이주노동자 역사 17년, 설움 받으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설움 받으며 살고 싶지 않습니다. 열심히 일한 우리, 5년 이상(이주노동자들)은 길바닥으로 쫓겨 났습니다. 인간 취급도 안 합니다.”

이어 “우리는 합법적으로 이 땅에 살고 싶다. 합법적으로 일하고 싶다. 우리는 깨비, 헉, 샤멀 지부장 구출하고, 합법화를 쟁취할 때까지 끝까지 투쟁할 것이다”고 외쳤다.

▲ 이주노동자들과 연대 동지들이 서울 출입국관리소 입구를 가득 메우고 연행 규탄집회를 하고 있다.
ⓒ 전민성
문화노동자 영연석씨도 “우리 모두가 샤멀이다, 우리가 잡혀간다 해도 이주노동자가 대접받지 못한다면, 또 다른 이주노동자들이 이를 고치기 위해 우리를 이어갈 것이다"라며 "우리가 투쟁하지 않는다면, 다른 이주노동자들이 들어와 또 다시 손가락이 잘리고, 팔 다리를 다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투쟁하고 있는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노래 '이씨 니가 시키는대로 내가 나갈 줄 아나'를 불러 이주노동자들의 마음을 대변했다. 그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열심히 일만 한 우리를 추방하려고 하는 논리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이냐"고 물었다.

▲ 이주노동자 시위자가 샤멀 타파 지부장의 사진이 든 광고판을 들고 집회에 참가하고 있다.
ⓒ 전민성
한편 민주노동당 여수지부장을 통해 현재 여수 외국인보호소에 있는 샤멀 타파 지부장의 편지가 전달됐다.

샤멀 타파(31세) 약력

1994년 네팔 연수생 1호로 입국
2001년 7월 평등노조 이주지부 안양 분회장
2001년 네팔 이주노동자 연합(United Nepalese Migrant Association) 사무국장
2003년 7월 평등노조 이주지부 비상대책위 위원장
2003년 11월 강제추방 저지, 미등록 이주노동자 전면합법화를 위한 농성투쟁단 공동대표
“사랑하는 동지들, 멀리 여수보호소에서 투쟁으로 인사드립니다. 항상 같이 있고 싶지만, 어제 일이 그렇게 되어 동지들에게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몸은 멀리 있지만, 저는 제가 동지들의 마음 속에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동지들도 내 마음속에 있습니다.

동지들 투쟁 위해 저는 얼마든지 버텨낼 수 있습니다. 조금만 더 버텨내면 승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한국 노동자들 우리가 해방시킵시다. 이젠 숨지 말고, 당당하게 투쟁하며 살아야 합니다. 화성외국인보호소에 있는 깨비, 헉 동지와 함께 투쟁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철의 노동자'처럼 강한 노동자가 됩시다.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 잘 챙기시고 항상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사랑합니다.

-여수 보호소에서 샤멀타파”


▲ 명동성당 투쟁단의 마문씨가 집회대열 앞에서 '표적연행한 동지들을 모두 구출하자'고 외치고 있다.
ⓒ 전민성
약 50여명의 한국인 참가자들이 함께 한 이 날 규탄집회는 한 시간 반 가량 진행되었고, 이주노동자들은 버스로 명동성당으로 돌아갔다.

▲ 휠체어를 탄 시위참가자가 집회에 참석하고 있다.
ⓒ 전민성

▲ 한 시위 참가자가 표적 연행된 샤멀 타파(여수)와 케비, 헉(화성) 동지들의 사진이 든 광고판을 들고 있다.
ⓒ 전민성

▲ 전투경찰 너머로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이 장갑을 끼고, 시위자들을 연행할 준비를 하고 있다.
ⓒ 전민성


“샤멀 타파 지부장, 꼭 다시 만났으면...”
명동성당 투쟁단 소하나(31)씨 인터뷰

▲ 소하나씨가 출입국사무소 앞 집회를 위해 떠나기 전 명동성당에서 웃음을 지어 보이고 있다.
ⓒ전민성
“저와는 동갑이에요. 오빠가 저 보다 한 달 먼저 태어났어요.”

“샤멀 타파 동지는 오빠처럼, 가족처럼 마음이 크고 착해요. 저는 남자친구가 있지만, 어떤 때는 사랑하는 사람보다도 더 친했어요.”

오후 출입국관리소 앞 규탄대회가 예정된 날 아침,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인도네시아에서 온 소하나씨를 만났다.

“오빠는 한 번도 반말을 쓰지 않았어요. 1년간 지부장 하면서 욕을 들어도, 남들에게는 말을 못해요. 몸이 아파도 남들에게 말을 안해요. 자기는 아파도 말 안하고 즐겁게, ‘힘 내, 걱정하지 말고’라고 말하며 저에게 힘을 주었어요.”

소하나씨의 목소리에는 연행되어간 샤멀 파타 지부장에 대한 안타까움이 가득 배어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여수 외국인보호소에 있는 샤멀 타파 지부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기 위해 소하나씨는 천막으로 뛰어갔고, 금세 눈시울이 붉어졌다.

“몸 아팠잖아요. 몸은 괜찮아요?”
“약 필요하면 준비할게요.”

전화통화를 마친 소하나씨는 지부장이 보호소에 갇혀 있으면서도 "자신의 건강부터 물어봤다"며 "아프면 꼭 약 먹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소하나씨는 1996년 2월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서 6년을 지냈다. 1년마다 계약을 하면서 처음 3년은 가리봉동에서 빨대 만드는 플라스틱 사출 공장에서 일했는데, 기본급 22만 8천원에, 주·야간 (아침 6, 7시부터 밤 9시까지)으로 일해 50~60만원을 벌었다. 몸이 너무 힘들고 지쳐갔다.

소하나씨는 본국으로 돌아갔다가 1999년에 다시 연수생으로 들어와 구로공단에서 스타킹 봉제일을 하며 3년을 더 있었다. 60~70만원을 받았지만 매일 아침 10시~밤 10까지 계속되는 고된 일이었다. 소하나씨는 미싱일을 하면서 거칠어지고 상처 난 손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일하며 두 달에 한 번씩 고국에 있는 부모님께 돈을 부쳤지만, 6년간 모은 돈이 하나도 없어요.”

산업연수생이라는 신분 때문에 매달 월급에서 적립금이란 명목으로 14만원씩 빠졌고, 중소기업협동조합은 관리비 명목으로 매달 2만4천원씩 떼어갔다. 의료보험비도 매달 1만원씩 내야했다. 더구나 두 번째 산업연수생으로 들어왔을 때는 혜택도 받지 못하는 국민연금을 다달이 2만원씩 내야했다.

결국 지치고 부당함을 견디다 못해 두번째 산업연수생 기간 3년이 끝나갈 무렵 근무지를 이탈 해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되었다. 그러나 산업연수생 신분에서 벗어나 전처럼 심하게 일하지 않아도 되자 아프던 몸은 좋아졌고, 얼굴도 좋아졌다.

“샤멀 지부장은 2002년 1월 동대문에 있는 평등노조 이주노동자 지부 사무실에서 일주일에 두 번씩 모임을 하면서 알게 되었어요. 오빠를 꼭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소하나씨는 인터뷰가 끝날 때까지 샤멀 지부장에 향한 안타까움을 강조했다. / 전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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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동네의 성미산이 벌목되는 것을 목격하고 기사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2005년 이주노동자방송국 설립에 참여한 후 3년간 이주노동자 관련 기사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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