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여러분은 쓸모없이 방치된 건물의 존폐를 결정해야 할 처지가 된다면 어떻게 할까? 깨끗이 밀어내 부지를 새롭게 활용한다면 한번의 고민으로 끝나겠지만, 이를 재활용한다는 결정이 내려진다면 고민은 점점 커질 것이다.
더욱이 이 건물들이 공장이나 창고, 역전처럼 어둡고 무거운 느낌의 효용가치가 떨어지는 건물이라면 어떻게 용도변경을 해야 할지 막막한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다.
20세기 현대미술의 전시장으로 대표되는 '테이트 모던'은 2000년 5월 개관 당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모았다. 보수적인 영국에 국제적 규모의 현대미술관이 들어서는 것에 대한 관심도 있었지만, 미술관 건물의 내력과 변모에 대한 호기심도 컸기 때문이다.
런던 템즈강 서남쪽에 위치한 이 건물은 원래 화력 발전소였다. 영국의 명물인 빨간 공중전화 부스를 디자인한 자일스 길버트 스콧경이 1947년 설계한 것으로, 1963년 가동에 들어가 1981년 문을 닫은 후 방치된 채 음울하게 서 있었다. 그 뒤 낙후된 도시의 전형으로 보이던 이 지역은 정체된 후 쇠퇴해 가는 영국 사회의 단면처럼 비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발전소에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다.
1994년 미술관 건립을 위한 국제건축현상설계가 개최된다. 여기에서 새로운 전시공간을 찾던 테이트 재단과 도시의 균형발전을 모색하던 정부의 요구를 골고루 수용한 좋은 아이디어가 제출된 것이다.
현상설계에 참여한 세계 각지의 148개 업체 중 스위스의 쟈크 헤르조그와 피에르 드 므롱은 새로운 건물대신 기존 발전소의 외형 및 골격은 그대로 유지한 채 내부만 고친 설계안을 제시하여 수주에 성공했다.
길버트 스콧경의 건축물을 예술로 인정하며 보존하길 원하는 영국인들의 마음과 대중들의 접근성이 용이한 입지선정이 잘 맞아떨어진 것이다. 여기에 상대적으로 낙후된 이 지역의 발전과 넓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이점은 덤으로 주어졌다.
이 건물은 밖에서 볼 때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은 없다. 묵직한 벽돌 외관은 손질만하고 건물 지붕 위에 긴 반투명 유리 구조물을 새로 얹었다. 이 유리는 건물 내부에 자연광을 들이는 역할을 한다. 서쪽 벽 입구는 거대한 터빈 홀로 바로 입장할 수 있다.
과거 보일러와 터빈들이 들어찼던 거대한 홀은 광장과 전시실, 미술전문 서점, 카페로 대체 되었다. 버려진 공장 지대로 지칭되던 주위환경도 신생 갤러리와 상가의 형성으로 활기를 찾고 있다.
이제 '테이트 모던'은 20세기 초현실주의와 팝아트 작가 등의 대표적 전시장일 뿐만 영국의 신문화를 선도하는 대표 명소가 되었다. 새로운 시도를 하는 동시대 젊은 예술인들을 후원하고 선보이는 역할을 하며, 이런 활동들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성과 등은 책으로 엮어 발행한다. 버려졌던 발전소건물이 현대예술의 원동력을 생산하는 신생기지로 변모한 것이다.
너무도 유명한 프랑스의 오르세미술관 역시 재활용된 건물의 대표사례다.
1871년 파리코뮌 때 화재로 손실된 오르세궁 부지를 오를레앙 철도회사가 인수받아 파리시내 열차종착역과 호텔로 개조한다.
2년 동안의 공사 기간을 거쳐 화려한 외관으로 1900년 개관된 역은 1939년 철도 기술의 발달로 폐쇄되었다. 이후 수용소와 영화촬영장으로 쓰이기도 하였으나 19세기말 타락한 취향의 상징물로 취급되며, 오랫동안 방치된다. 그리고 세느 강변 재개발계획에 의해 사라질 위기에도 직면했다.
하지만 1973년부터 시작된 장기간의 구상과 실행으로 1986년 미술관으로 재탄생했다. 그 사이 여러 번의 정권교체와 변화가 있었지만, 이 실행계획만큼은 계속 이어져 19세기 예술의 보고를 간직하는 중요한 문화공간이 되었다.
아직도 커다란 시계를 그대로 지닌 이 미술관은 철로와 육교 및 플랫폼이 있었던 중앙홀과 철로가 있던 축을 따라 양쪽에 테라스를 설치하여 만든 전시실이 역전의 느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작품을 보는 재미만큼이나 인상적이다.
오후 5시 40분부터 마감안내 방송을 내보내며, 셔터를 내리는 직원들만 없었다면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천장 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부드러운 햇살을 받으며 하염없이 앉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3층으로 된 전시실에서는 미술 책에서 주로 보았던 밀레의 <이삭줍기>와 <만종>은 물론 모네, 드가, 르느와르, 세잔으로 대표되는 인상주의 작품을 볼 수 있다.
이제 더 이상 미술관은 예술작품을 전시하기 위한 공간만으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내는 살아있는 미술관이 되기 위해 문턱을 낮추고 활짝 개방된 모습을 우리주변에서도 얼른 보고 싶다.
덧붙이는 글 | 2003년 6월부터 9월까지의 여행기록 중 미술관 방문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