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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태안 본당 아무개라고 말하고 "저를 기억하시겠습니까?"하고 여쭈니, 신부님은 깜짝 놀라시고는 "지요하는 몰라도 막시모는 안다"고 하시면서 큰소리로 웃으셨다.
신부님이 근 50년 세월 저편의 나를 쉽게 기억하시는 것은, 내가 태안교회 최초의 미사복사(미사 때 제대 주위에서 사제를 도와 드리는 일, 또는 사람)였기 때문일 터였다.
신부님은 그 옛날 우리 태안 공소에 오실 때 처음에는 오토바이 뒷자리에 내 또래 아이를 한 명 태워오곤 했다. 미사복사였다. 상고머리를 한 그 아이는 예쁘게 생긴 데다가 옷차림도 깔끔했다. 나는 그 아이가 몹시 부러웠다. 나와는 격이 다른 아이로만 느껴졌다. 그러다가 한 번은 미사 때 그 아이가 구멍난 양말을 신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속으로 웃지 않을 수 없었고, 그때부터는 그 아이도 나와 똑같은 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느 날 신부님은 복사(오늘날의 사무장)님에게 지시하여 나에게 미사복사 연습을 시키도록 했다. 초등학교 5학년 시절이었다.
나는 우선 라틴어 미사 경문을 외워야 했다. 그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이라서 사제는 지금처럼 신자들을 마주보는 형태가 아닌, 신자들을 등지고 선 형태로 미사를 지내던 시절이었다. 지금보다 미사복사가 하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사제와 복사는 라틴어 암송으로 미사 경문을 주고받고, 신자들은 따로 우리말로 미사 경문을 양편이 주고받으며 미사를 지내던 시절이었다.
라틴어 발음이 여간 어렵지 않았다. 기리에(자비송), 글로리아(대영광송), 상뚜스(감사송), 아뉴스데이(하느님의 어린양)은 물론이고, '고죄경(고백기도)'과 '예물준비기도'까지 모두 라틴어로 외워야 했다.
미사 때 실수도 없지 않았다. 한 번은 '주님의 기도'에서 실수를 했다. 신부님이 거의 암송을 한 다음 내가 마지막 구절 "셋 이베라 노쓰와 말로(악에서 구하소서)"를 해야 하는데, 그만 깜박 정신을 놓은 바람에 "아멘"을 했다. 그러자 신부님은 몸을 이동해야 하는데도 한참이나 가만히 서 계셨다. 겨우 사정을 알아차리고 얼른 "셋 이베라 노쓰와 말로"를 하니 신부님은 그제야 몸을 움직였다.
순간적인 기억의 파도 속에서 "저를 쉽게 기억해 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말씀을 드리니, 신부님은 종종 내 소식을 듣고 계셨다고 했다. 가끔 교회 신문과 <대전주보>와 인터넷 상에서 내 글을 읽기도 하셨다고 했다.
"참으로 죄송스럽고 면목이 없습니다. 대전주보와 가톨릭신문 등에서 사제 이동 상황을 접할 때마다 신부님 함자를 찾아보곤 했고, 신부님 계신 곳들을 대체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전화 한번 드리지를 못해서 정말로 죄만스럽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1990년과 지난해 1월 우리 본당 출신 사제도 탄생하는 대전교구 서품식에 참석했을 때, 그리고 지난해 가을 대전교구 부교구장 유흥식 주교님의 서품식에서도 오 신부님을 먼발치에서 볼 수 있었지만 서품식이 끝난 후 신부님을 찾아뵙는 일을 포기하곤 했다.
진심으로 사죄를 드렸다.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내처 안부 한번 여쭙지 않고 있다가 본당 '40년사' 편찬 사업에 당면하여 신부님의 글이 아쉬워지니 그 필요에 의해서 겨우 전화를 드리는 소행은 참으로 면구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신부님은 나를 쉽게 기억하신 그 반가움 때문인지 궁금하신 것이 많은 것 같았다. 여러 가지를 물으셔서 내 선친께서 18년 전에 작고하신 것도, 내가 마흔의 나이로 결혼하여 고등학생 딸과 중학생 아들을 두고 있는 것도, 내 모친께서 팔순을 넘긴 연세에도 정정하게 사시는 것 등을 두루 아시게 되었다. 그리하여 내 어머니와도 한참이나 통화를 하셨다.
신부님은 내게 무슨 일을 하며 사느냐고 물으셨다. 어줍잖게나마 작가 명색을 걸치고 자유롭게 산다고 말씀드리니, 글을 써서 생활이 되느냐고 물으셨다. 유명작가는 아니어도 이렇게 저렇게 수입이 아주 없지는 않고, 베스트셀러는 되지 않았어도 책도 몇 권 있고,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와 함께 욕심 내지 않고 하느님 길을 따라 나름대로 열심히 산다고 말씀드리니, 하느님께 많이 감사하며 살아야 할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다.
내가 오늘 갑자기 전화를 드리게 된 까닭을 말씀드리며 일전에 보내 드린 원고 청탁서를 보셨느냐고 여쭈니, 옛날 태안 공소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어서 글을 쓸 것 같지가 않다며 재미있는 말씀을 하셨다.
"집안이 망하려면 울타리부터 망가지고, 사람이 망하려면 머리부터 멍청해진다더니, 내가 지금 그 식이야. 머리가 아주 텅 비어버려서 글 쓰는 일 못해."
그러면서도 신부님은 중증장애인들을 돌보는 일 틈틈이 중요한 일 하나를 하신다고 했다. 옛날 박해시대부터 일제시대까지 한국에서 활동하신 파리외방선교회 신부님들이 주교님들께 보낸 편지들을 최대한 찾고 모아서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을 컴퓨터로 하고 있는데 눈을 감을 때까지 다 마칠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시면 신부님, 제가 제안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제가 빠른 시일 내에 신부님을 찾아뵙고 말씀을 들은 후에 제가 대필을 하는 식으로 글을 쓰겠습니다. 그리고 그 원고를 신부님께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 글을 신부님께서 보시고 수정이나 첨삭을 하신 다음 제게 돌려보내 주시면 그대로 저희 본당 '40년사'에 싣겠습니다."
그렇게 하기로 합의를 한 후에 나는 신부님께서도 언제든지 이곳으로 한번 '추억여행'을 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말씀을 드렸다.
"50년 전 추억의 길을 한번 밟아보시지요. 우리 본당 40주년 기념 절정 행사가 있는 9월에 오셔도 좋고, 꽃피는 봄철에 오셔도 좋고요. 신부님께서 오시면 제가 바닷가로 모시고 가서 싱싱한 생선회를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이런 내 말에 신부님은 "나에게서 글 받아내려고, 날 매수하겠다는 얘기로구만."하며 큰소리로 웃으셨다.
"예, 공개적으로 신부님께 뇌물을 쓰고 싶습니다."
나도 기분 좋은 소리로 웃었다.
신부님과 통화를 끝내고 송수화기를 내려놓은 다음에도 나는 상념으로나마 추억 여행을 계속했다. 어머니가 기꺼이 동반을 해주셨다. 신부님으로부터 나누어 받은 감미롭고도 아련한 기운이 우리 집 거실을 한결 훈훈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프랑스인 노 사제 오일복 신부님은 신앙이라는 가장 고귀한 보화로 내 삶의 기초를 잘 닦아주신 분이었다. 내 소년 시절의 상당 부분을 지금도 좋은 추억거리로 장식해 주고 있는 분이었다.
1950년대 초 우리나라가 전쟁의 참혹한 상처와 궁핍 속에서 어렵게 살아갈 때 이 나라에 찾아와서 하느님 복음을 전하는 일 외로도 '가톨릭구제회'를 통해 구호 사업에도 열정을 다하신 분이었다.
한국 땅에서 청춘과 장년의 세월까지 다 바치고, 사목 일선에서 은퇴하신 이후에도 한국을 떠나지 않으시고, 80대 노인이 되신 지금에는 중증장애인들과 함께 살아가시는 오일복 요한 신부님, 그 분 역시 내가 평생 동안 감사하며 살아야 할 내 인생의 은인이시다.
벽안의 노 사제 오일복 요한 신부님의 만수무강을 진심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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