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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에서는 혼삿집을 일러 대삿집이라고 부릅니다. 혼사도 대사도 순수 우리말이 아니고 한자말이니 사(事)자 밑에 사이시옷을 붙이는 것이 옳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혼삿집 대삿집이라고 적는 것이 처갓집 외갓집처럼 더 말도 쉽고 정감이 가는 듯싶습니다.
지난 20일에는 꽤 오랜만에 대삿집을 갔습니다. 어느 친구의 여혼(女婚)이 있어 간 것인데, 결혼 예식장엘 간 것이 아니고 그 친구의 집엘 간 것이니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대삿집엘' 간 것이지요.
그 친구로부터 대사 기별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며칠 전 초등학교 동창회에 갔다가 그 친구의 여혼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친구는 동창회에 나오지 않았고, 전언에 의하면 동창들에게는 개별적인 청첩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그 친구는 나보다 나이가 네 살이나 많아 올해 환갑을 먹게 된 처지이지만, 내가 이름과 얼굴을 익히 기억하고 있는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와 내가 초등학교 시절 같은 반이었던 덕일 듯싶습니다. 옛날 우리 초등학생 시절에는 학년이 바뀌어도 반 편성을 새로 하지 않아서, 그 친구와 나는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줄곧 4반이었던 거지요.
나는 아직도 얼굴만 알고 이름은 모르는 동창들이 많은데, 그건 초등학생 시절 학년이 바뀔 때 반 편성을 다시 하지 않은 탓도 클 것 같습니다. 물론 동창들에 대한 내 무성의 탓이기도 할 테고….
아무튼 6년 동안 같은 반이었던 만큼 초등학생 시절의 내 추억 속에 분명하게 존재하는 사람인지라, 나는 기별이 없었다고 해도 그의 혼사 소식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달력 장에 표시까지 해놓았다가 놓치지 않고 일을 물었는데, 그 친구가 읍내 음식점이 아닌 시골 자기 집에서 대사를 치른다는 사실 때문에 내가 더욱 일 묻는 일에 신경을 썼는지도 모릅니다.
(충청도 서산·태안 지방에서는 애경사에 부조하는 일을 '일 묻다', 또는 '일 물다'로 표현합니다. 모두 품앗이와 관계되는 말로서 '일 묻다'는 '나중에 내가 일 받을 것을 장만해 놓는다'는 뜻이고, '일 물다'는 '부조하는 일을 치르다'라는 뜻입니다.)
정말이지 나는 그 친구가 시골 자기 집에서 대사를 치른다는 사실에 흥미를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식이야 일요일 신랑 동네의 결혼 예식장에서 하겠지만, 잔치는 자기 집에서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시골에서도 보기가 힘든 그 '전통 혼례잔치'는 또한가지 내 향수를 자극하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한국 땅에서 한국을 그리워하고, 시골에서 시골을 그리워하는 나로서는 정말 집에서 치르는 그 혼례잔치를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겨울방학이 끝나 아내가 학교 출근을 해서 부부동반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 적이 아쉬웠습니다. 처음에는 운동 삼아 옛날처럼 걸어서 갈까 했으나, 시오리 길이 만만찮아서 보다는 송암리 어디에 그 친구 집이 있는지를 모르니 물어물어 찾아가야 할 텐데 요즘 농촌에 길을 물을 만한 사람이 흔한 것도 아니고…. 자칫 괜한 고생을 하게 될 것 같아서 차를 가지고 가기로 했습니다.
요즘은 농촌에도 구석구석 길이 훤하고 포장이 잘 되어 있어서 차 운행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으나, 역시 사람 찾기 힘든 가운데서도 세 번이나 길을 물어서 겨우 그 친구 집을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완전히 시오리 길이었습니다. 옛날 그 시절에 어떻게 이곳에서 학교를 다녔는지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잔치 자리에서 만난 친구들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옛날에는 별로 먼 줄을 몰랐다느니, 늦게 나선 탓에 마라송(마라톤)을 한 날도 많다느니, 그래도 학교에 지각 한번 하지 않았다느니, 지각은 읍내 애들이 맡아 놓고 했다느니, 여기보다 더 먼 곳에서 학교 다닌 애들도 많았다느니, 여러 가지 얘기가 잔칫상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마당가에 마련한 차일 안에서 잔칫상을 받았습니다. 처음엔 낯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상을 받았지만 곧 친숙한 사이처럼 음식을 나누며 정답게 어울릴 수 있었습니다.
혼주인 그 동창친구는 바깥에서 들여온 주문 음식은 하나도 없고, 모든 음식을 집에서 손수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집에서 대사를 치르게 되면 전 삼일 후삼일 엿새 동안은 수고를 해야 하고 특히 여자들 고생이 크지만, 그래도 농촌에서는 품앗이꾼들이 있어서 할만하다고 하며 웃었습니다.
잔치 비용도 음식점에서 하는 것보다 훨씬 덜 든다고 했습니다. 음식점 절반 정도 드는 비용으로 오시는 손님들에게 실컷 잡숫게 하고, 동네 사람들은 두 번씩 먹을 수도 있고, 하루종일 잔치를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며 또 웃더군요.
음식점 잔치와는 정말 비교할 수 없는 풍경이고 분위기였습니다. 음식점 잔치는 사람들이 일시에 몰리니 복잡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빨리 먹고 일찍 일어서 주는 것도 일 추어주는 거라는 생각이 출썩거리니, 도무지 여유라는 것이 없어서 잔치 아닌 잔치인 셈이었습니다.
또 밥그릇 수를 적어서 비용 계산을 하는 경우에는 부부동반을 하는 것도 눈치 보이기 십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 음식점 잔치와는 완전히 다른 전통 혼례잔치는 우선 여유를 되찾고 누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상 앞에 앉아 세월아 네월아 하는 것이 오히려 보기 좋은 모습일 수도 있었습니다. 마당 한 옆에서는 윷판도 벌어지고, 놀랍게도 한가롭게 앉아 고누를 두는 사람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건강 문제와 차 운전을 생각해서 술을 마시지 못하는 것이 섭섭했지만(한 모금 맛을 보니 동동주 맛이 썩 좋은데…), 그래도 한껏 즐거운 기분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옛날 생각이 절로 떠오르더군요.
옛날 고등학생 시절부터 친구들과 어울려 잔칫집 다니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학교에서 좀 껄렁껄렁하게 노는 축이었던 우리는 특히 가을에는 잔칫집 다니기에 바빴습니다. 인근 삼동네의 대삿집들을 며칠 전부터 훤히 꿰고 산 덕에 하루에 두 집을 간 날도 있었지요. 삼동네의 잔칫집을 거지들이 제일 먼저 알고 온다더니, 우리가 완전히 그 꼴이었지요.
대여섯 명씩 떼로 몰려다니는, 조금은 '깡끼'도 있어 보이는 고등학생들을 잔칫집마다 환대를 해주었습니다. 우리는 걸신들린 거지들처럼 국수도 두어 그릇씩 우악스럽게 먹고, 떡 접시 고기 접시가 비워지기라도 하면 큰소리로 더 갖다달라고 하거나 직접 과방에 가서 얻어오기도 했습니다. 완전히 염치고 뭐고 따지지를 않았지요.
나는 배부르게 먹기만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눈치껏 떡이며 과줄이며 물기 없는 것들을 주머니에 넣곤 했습니다. 나만 맛있는 것들을 배부르게 잘 먹고 빈손으로 집에 들어가는 것이 내 양심에는 허락되지 않는 탓이었습니다.
요즘처럼 간식거리가 흔치 않았던 시절이었지요. 간식거리라곤 고작 누릉지나 고구마인데, 그것마저도 귀하던 때였지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노상 바깥에서 사시는 고로 집에는 동생들만 아웅다웅하며 심심하게 놀고 있었지요.
대삿집에서 주머니에 가득 넣어온 것들을 꺼내 놓으면 나는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오빠요, 형이었습니다. 주머니 속의 티끌이 떡에 묻은 것도 상관하지 않고 이것저것을 맛있게 잘도 먹는 동생들을 보면 흐뭇한 마음 한량 없었지요.
이태 전이었던가, 한번은 세 동생과 자리를 함께 한 적이 있었지요(두 동생은 미국에서 살고 있고). 이런저런 화제가 만발하던 끝에 내가 고등학생 시절부터 대삿집들을 다니며 음식들을 주머니에 넣고 와서 동생들에게 먹인 이야기가 누이동생 입에서 나왔습니다. 그 얘기로 한참 웃음바다가 되던 중에 어머니가 이런 말을 하시더군요.
"애들만 먹은 게 아녀. 나두 많이 먹었다니께."
그런 즐거운 추억들을 떠올린 끝에 나는 내게 또 한번 술을 권하는 친구(혼주의 이웃으로 잔치 일을 보아주는 또 한 명의 동창)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술을 뭇 마셔. 성인병두 있구 차 운전두 헤야니께. 내가 술을 뭇 마시는 대신 이 맛좋은 동동주를 한 병 가져가면 안 될라나? 집이 갖구 가서, 뒷동에서 사는 내 동생에게 주구 싶어서 말여."
"그려? 알었어. 내가 갖다 주께."
그리고 잠시 후 그 친구는 동동주가 담긴 맥주병에 하나 가져다 주었습니다. 나는 그 술병을 받아들고 몸을 일으켰습니다.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고 술병을 들고 그 대삿집을 떠나오는데, 성큼 다가온 봄기운이 내 몸을 더욱 훈훈하게 감싸주는 것 같더군요. 참 좋은 날이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jiyoha@net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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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mh@com.n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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