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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네 가족이 대문 앞에서 웃고 있다.
향유네 가족이 대문 앞에서 웃고 있다. ⓒ 이우성
그들이 어디에 있건 향기는 넓게 퍼지는 법. 동갑내기 박종관, 김현(32세)씨 내외는 세 살 된 향유와 함께 상주 모서 석산1리에 아름다운 삶의 향기를 품으며 산다.

귀농 7년째, 돌아보면 왜 눈물짓지 않은 세월이 없었겠는가. 시작은 미약했지만 그들을 감싸고 있는 삶의 향기가 곧 세상을 아름답게 할 것임을 알기에 오늘 그들의 희망이 아름답게만 보인다. 그들은 그리 창대한 미래를 꿈꾸는 것은 아니다. 소박하지만 평화롭게 사는 길, 그 길을 통해 그들이 만나고자 하는 미래의 희망은 어떤 색깔일까.

겨우내 박종관씨는 한옥 집짓기 목수 일을 위해 풍기, 봉화 현장을 다녔다. 10월 중순에 합류하여 이듬해 2월까지 일하면 500만원 가까이 목돈을 마련할 수 있다. 생활비를 버는 것이 제일 큰 목적이지만 언젠가는 짓게 될 자신의 집을 위해 더할 수 없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겨울에만 좀 떨어져 있기로 했다. 전국에 다섯 채 이상 자신의 손으로 집을 지어보았더니 자신감도 생겼다.

그는 포도밭 1500평을 평당 1000원꼴로 빌려 임대농으로 포도농사를 짓고 있다. 이곳에 처음 올 때는 450평 규모였는데 작년에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지금의 면적으로 늘였던 것.

그들은 대학교 동기생이다. 대전에 있는 침례신학대학을 다니다가 욕심없어 보이고 성실한 면에 서로 끌려 사귀게 되었다. 부인 김현씨는 그때 이미 박종관씨의 향기에 취한 듯하다. 고민을 함께 들어주다가 그의 삶과 꿈에 취해 어린 아이들을 돌보는 자신의 꿈을 접었다. 그러나 자신의 선택이 지금은 한없이 기쁘다.

박종관씨는 22살 여름에 큰 경험을 하게 된다. 제도와 형식에 얽매인 종교적 위선에 자괴감에 빠져 방황하고 있을 무렵, 남원의 동광원공동체를 찾았다가 그곳에서 김복관, 오재길 선생 같은 정농회 원로 농부 몇 분을 만나게 된다. 묵묵히 자신의 땅에서 생명을 일구며 하느님과 세상을 섬기며 사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고 그 자신도 역시 그런 삶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리하여 정농회에서 귀농운동본부를 소개받아 귀농학교도 수료했다.

귀농교육을 마치자 막연했던 귀농에 대한 꿈이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IMF가 터져 부모님 사업이 어려워져 집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통장에는 단돈 20만원. 막막하던 차에 정농회 어른인 김천 덕천포도원 김성순 선생 댁을 찾았다.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했더니 김 선생께서 자신의 포도원에 일할 사람이 필요하니 같이 일해보자고 제안했다. 농사경험도 없고 기반이나 연고도 없는 상황에서 더 생각할 처지도 아니었다. 졸업식 다음날 바로 김천으로 내려갔다.

‘평화의 마을’대전보육원에서 보육사로 일하던 김현씨도 직장을 접고 함께 내려갔다. 98년 2월이었다. 김 선생께서 결혼식을 치르라고 내준 300만원으로 식도 올리고 마을 빈집을 빌려 신혼방도 꾸몄다. 내려온 지 한 달도 안된 상황에서 전폭적으로 신뢰를 보낸 김 선생 식구들이 박종관씨는 지금도 한없이 고맙다.

밑바닥에서부터 공부한다는 생각으로 참 열심히 일했다. 첫해는 일주일 내내 김 선생 포도밭과 가공공장에서 일했다. 이듬해는 근처에 600평 포도밭을 빌려 주말에는 자신의 농사를 지으면서 주중에만 김 선생 댁 일을 했다. 그리고 삼년째 되던 해에는 1000평으로 자신의 경작지를 키우고 월요일에서 목요일까지만 김 선생 댁에서 일을 했다.

달밤에 일해도 힘든 줄을 몰랐다. 그러나 비가 많이 와서 작황이 좋지 못했다. 더구나 판로도 없었다. 급기야 트럭에 포도를 싣고 김천시에 나가 팔아보기도 했으나 한 상자도 못 팔고 돌아왔다. 결국 포도즙으로 가공했는데 아름아름 직거래되어 다행히도 전량 다 팔려 400만원 정도 수입을 올렸다.

3년 덕천포도원에서 신세를 지고 이젠 완전 독립하겠다는 결심을 굳힌다. 제2의 귀농이었다. 경제적인 것은 그리 늘지 않았지만 농사 경험은 자신감이 생겼다. 특히 덕천포도원은 일찍부터 가공일까지 해서 주스와 포도주 가공 일을 몸으로 습득할 수 있었던 것이 큰 자산이었다.

4년째 상주 모서에 있는 김 선생 포도밭 2400평과 논 1300평을 임차해서 완전 독립된 농사를 시작했다. 생산되는 포도 전량을 포도즙 원료로 납품 받아 준다는 조건이었으니 김 선생의 큰 배려가 오히려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근처에 살집이 없어 아는 분에게 부탁해 컨테이너를 들이다가 사기를 당하고 말았다. 부도가 난 회사였던 것이다. 영농철은 다가오고 이주해야 할 상황은 급박하고 그때 생각만 하면 참으로 아득하다. 때마침 농장에서 좀 떨어져 있는 곳에 있는 빈집을 내부 수리만 간단히 하고 짐을 옮겼다. 설상가상으로 그해는 몹시 가물었다. 논물이 없어 농사를 거의 망쳤다. 농사 규모가 크다고 수입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 소중히 깨달았다.

그해 향유가 태어났다. 조산원에서 부부가 함께 지켜보며 향유를 맞았고 탯줄은 박씨가 직접 잘라주었다. 김현씨는 그때부터 민족생활의학과 자연치유에 눈떠 책을 뒤져 공부하고 모유 수유와 냉온욕으로 향유를 키워 큰 병치레 없이 향유를 키우고 있다.

2002년 450평, 2003년에는 1500평에 알차게 포도농사를 지었다. 생과는 정농회 생협과 예장생협으로 납품하고 남은 것은 주스를 짰다. 집에서 알뜰 작업을 해서 담근 포도주는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 2002년엔 800만원, 작년엔 1300만원 수입을 올렸다.

박종관씨는 고향이 서울이고 김현씨는 단양이다. 둘다 농사는 한번도 지어본 적이 없었다. 부모님들도 마찬가지. 귀농을 결심했을 때 다행히 양가 부모님들의 반대는 없었다. 그들의 선택을 인정하고 도와주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묵묵히 지켜봐 주었다. 그것이 한없이 고맙다.

지금 두 사람은 시간이 자유로운 것도 그렇지만 늘 기도하면서 하늘을 바라보면서 사니까 제대로 신앙인의 길을 가는 것 같아 더할 나위 없이 좋단다. 뭐니뭐니해도 제일 좋은 점은 삶이 풍요로워진 것이라고 부부는 입을 모은다. 최고의 먹을거리를 나누어 먹는 삶이 더없이 좋다는 것. 수확철 아는 분들과 함께 포도를 거두어 나누면 모두들 쌀이나 사과, 숯 등으로 풍성히 돌아온다.

박종관씨는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에서 무농약 인증을 받았다. 덕천포도원에 있을 때부터 농약치는 법을 배우지 못해 농약을 전혀 치지 않는다. 그러나 무농약을 하다보니 나무의 수세가 자꾸 떨어져 걱정이다. 퇴비는 김천 유기축사에서 축분을 얻어와 쌀겨와 함께 발효시켜 쓴다. 토종닭 계분도 함께 넣는다. 평당 2kg 정도 넣는다. 초생재배는 기본. 일년에 4차례 풀을 베어준다. 영양제는 목초액, 포도식초, 쑥·아카시아·미나리 효소, 키토산을 주기적으로 준다.

보르도액과 유황합제를 주기적으로 주지만 갈반병을 잡는 데는 한계가 있다. 잎을 싱싱하게 만드는 것이 제일 중요한데 항상 일찍 잎이 떨어져 가슴이 아프다. 그래서 생각을 고쳐먹은 것이 방제에는 한계가 있으니 수량을 줄이자는 것. 남들보다 반밖에 수확이 안 되었지만 일찍 딴만큼 저장양분이 나무에 축적되니 나무에게는 부담이 덜한 것 같아 한편으로 안심이다.

이들 부부는 7년째 농사를 짓고 있지만 빚은 하나도 없다. 기반 없이 시작한 농사라 남들보다 더 많이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 이들 삶의 철학이다. 다만 가공품에 대한 규제가 많아 제일 아쉽게 여기는 대목이다. 포도주와 포도즙은 농가 소득 비율이 제일 높은데 가내수공업법이나 주세법으로 규제가 많아 판매가 쉽지 않다. 고유의 맛이 살아있는 포도주가 많이 나올 수 있도록 소규모 전통주 가공에 대한 규제를 풀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향유네 포도즙은 60도로 저온 가열하여 만든다. 색깔이 우러날 정도로만 끓여 냉각 살균 처리한다. 착즙 방식에 따라 즙의 맑기가 다르다. 향유네는 가열 후 위에 맑은 것만 쓰기 때문에 색깔과 맛이 매우 좋다고 정평이 나 있다. 알코올 도수 11도의 포도주는 산화처리를 전혀 하지 않는데 봄이 되면 숙성되어 도수가 올라간다.

둘 다 술을 못 먹어 술 맛 감별하다가 취하기도 한다고. 작년에 처음으로 포도주를 담갔는데 맛이 깔끔하고 디자인도 세련되었다며 인기리에 팔려 300병 모두 팔렸다. 처음에는 팩이 터지기도 하고 우여곡절이 많았으나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익혀 집에서만 가공하고 있다.

지금 박종관씨 부부는 새로운 앞날에 대한 준비로 부산하다.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어울려 각자의 직거래 소비자를 공유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대안적인 삶을 살고 싶은데 아직은 꿈만 같다. 최근에는 영구 정착할 곳을 찾기 위해 구도자의 심정으로 이곳저곳을 다시 돌아보고 있다. 상주 화북이 일교차도 크고 포도 키우기에 좋은 조건이어서 마음에 두고 있다. 2~3년 내에 이동할 생각이다.

풍물 가락을 워낙 좋아하고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해서 사는 것에 신명이 난 농부.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의 삶인가를 끊임없이 공부하는 젊은 부부, 그들의 향기가 오래도록 이 땅에 머물 것을 믿어도 좋다. 맑고 깊으면 무엇이든 아름다운 법.

덧붙이는 글 | 아름다운 젊은 농부입니다. 모두들 농촌을 떠나는데 이들은 왜 땅을 찾아, 흙을 찾아 돌아올까요. 한-칠레 FTA로 더욱 어려운 포도농가에 한줄기 희망의 빛으로 이 농부의 삶이 활활 타올랐으면 합니다.

<흙살림신문>에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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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한그루 심는 마음으로 세상을 산다면 얼마나 큰 축복일까요? 세월이 지날수록 자신의 품을 넓혀 넓게 드리워진 그늘로 세상을 안을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낌없이 자신을 다 드러내 보여주는 나무의 철학을 닮고 싶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산다면 또 세상은 얼마나 따뜻해 질까요? 그렇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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