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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7일 양천구 신월동에 위치한 신원 초등학교에서 각 학급별 '회장' 선거가 치러졌다. 사진은 회장으로 출마한 김태종 어린이의 후보 연설 모습이다.
ⓒ 김진석
"'회장'은 리더십이 필요하고 반 친구들과도 사이좋게 지내야 돼요. 항상 친구들을 즐겁게 해줘야 하며 장애가 있거나 약하다고 해서 친구들을 놀리거나 차별해서도 안 돼요."

회장으로 선출된 초등학교 5학년 한예송(12)양은 '회장'을 위와 같이 정의했다. 지난 10일 서울 신월3동에 자리한 신원초등학교 학생들은 2004년 1학기 학급 임원을 선출했다. 과거 '반장 선거'라 불리던 이 제도는 일제의 잔재라는 지적 아래 '회장 선거'로 바뀌면서 그 내용을 달리했다.

과거 반장 선거는 '성적'(학급 성적 5등 이내)과 '치맛바람'으로 학생들을 재단해 선생님이 몇몇 소수의 학생들에게만 임원 자격을 부여했다. 그에 반해 회장 선거는 임원 후보부터 반 학생들이 직접 선출해 회장(남1·여1)과 부회장(남1·여1)을 뽑는다.

신원초등학교 저학년(2-3학년) 학생들은 출석 번호 순으로 매주 월요일마다 회장과 부회장이 교체돼 누구나 한번씩 학급 임원을 경험한다. 본격적으로 직접 선거가 치러지는 건 고학년(4-6학년)때 부터이다.

학생들은 자신이 원하는 입후보자를 직접 선정해 무기명 비밀 투표로 임원을 선출한다. 즉, 입후보자(남, 여 각 5명) 선정 투표, 회장 투표, 부회장 투표까지 무려 '세번'의 투표를 거쳐서 한 반을 대표하는 임원이 탄생한다.

단, 임원 선거일을 기준으로 3개월 이상 해당 학교에 재적하지 못한 학생들은 입후보자 자격에서 제외된다. 이는 국회의원 입후보 자격 중 해당 지역에 일정 기간 거주해야 되는 조항을 근거로 적용한 기준이다.

▲ "아저씨 보면 안돼요!" 한 어린이가 팔과 몸으로 가리며 투표를 하고 있다
ⓒ 김진석

33명의 학급 인원 중 19명이 입후보자로 선출

33명의 학생이 출석한 신원초 5학년 7반.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며 한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그들만의 임원 선거가 시작됐다. 전학 온 지 3개월이 안돼 입후보 자격에서 제외된 박지윤군과 양아름양은 검표원을 맡았다.

나머지 31명 중 투표를 통해 입후보 자격으로 선정된 아이들은 무려 19명. 8표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한예송 외 18명의 입후보자들은 골고루 표를 나눠가졌다. 입후보자들로 선정된 아이들의 반응도 가지가지.

'한 번 즘 해보고 싶었다' '재미있을 것 같다'라고 기대를 표하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방과 후 남아서 일을 하는 게 신경 쓰인다' '친구들과 노는 시간을 뺏기는 게 싫다'며 사퇴하려는 아이들도 있었다.

"내 짝이라서, 어제 나한테 사탕을 사줘서, 혹은 내가 좋아하는 친구여서, 또 얼굴이 예쁘다고 임원을 찍어주면 안 돼요! 정말 잘 할 수 있는 아이를 뽑아 주세요!"

담임 선생님 장세형(36)씨의 당부가 이어지자 곧 학생들은 임원 선출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담임 선생님의 도장이 찍힌 무기명 투표 용지를 손으로 가린 채 꼭꼭 이름을 눌러쓰다 곧 지워 버리기를 여러 번. 그래도 결정이 안 나면 은근슬쩍 짝의 투표 용지를 훔쳐보거나 친구와 상의를 하는 등 제각기 고민에 빠져들었다.

"네가 어떻게 책임지고 맡을 건데?"

"제가 회장이 되면 학급 성적을 올려 친구들과 즐겁게 지내고 친구들을 재미있게 해주며 공부도 열심히 독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우리 반의 예절과 환경을 책임지고 맡겠습니다!"

"사퇴하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이 올라왔습니다!"

▲ 신원 초등학교 5학년 7반 담임 장세형 선생님
ⓒ 김진석
입후보자로 선정된 학생들의 소견 발표가 이어졌다. 이를 듣는 아이들은 "어떻게 책임을 지고 맡을 것이냐?"라는 돌발 질문을 던지는가 하면 "목소리가 너무 작아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며 따끔한 질책도 마다하지 않았다.

소견 발표가 끝나자 회장을 뽑기 위해 여러 번 눌러 접은 귀중한 투표 용지가 모아졌다. 본격적인 개표가 시작되자 분위기는 한층 고조됐다. 1차 입후보자 선출 투표와 마찬가지로 2차 회장 선거도 미세한 차이를 보이며 끝을 예상할 수 없었다.

개표 과정을 지켜보는 아이들의 눈은 정확하고 진지했다. 칠판에 표수 기록을 빼먹은 기록자의 실수를 곧바로 지적하고 33표가 맞는지 일일이 세어 보기도 했다.

자기가 뽑아준 후보가 되지 않자 겸연쩍어 하고, 밀어준 후보가 당선되자 자기 일처럼 좋아하며, 회장에서 떨어진 걸 못내 아쉬워하는 아이들의 표정은 그들의 속내와 정확히 일치했다.

1차 입후보 투표시 1표 차이로 막판 1위로 역전한 김태종이 10표, 독보적으로 1차 투표 때부터 가장 많은 표를 얻었던 한예송이 13표로 회장에 선출됐다. 비슷한 과정을 거쳐 부회장까지 선출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2시간.

후보로 선출돼 얼굴이 빨개져 버린 아이들의 떨림도 가라앉고, 나름의 이유로 제각기 다른 후보를 밀었던 아이들의 상기된 목소리도 제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어른들은 높은 자리에 오르면 뭐든 다 해도 되는 걸로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아요!"

"5학년 가운데 우리 반을 가장 예의바르고 질서 있는 반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1차 입후보자 선정 투표시 회장으로 뽑혔던 김태종과 접전을 치렀던 부회장 허남진의 선출 소감이다. 그는 "아깝게 회장이 못 돼 아쉽긴 하지만, 부회장이라도 뽑아준 친구들이 고맙다"며 "회장을 도와 반을 위해 열심히 최선을 다하겠다"고 감회를 밝혔다.

또 허군은 국회의원을 뽑을 수 있는 유권자가 된다면 "우선 싸우지 않는 착한 사람, 그 다음엔 한번 한다고 했으면 끝까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을 국회의원으로 뽑을 것이다"며 "어른 정치인들이 싸우지 말고 우리 나라를 위해 일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남자 회장과 부회장은 모두 임원으로서 '신인'이다. 그에 반해 여자 회장과 부회장은 모두 4학년 때 투표를 통해 한번씩 임원으로 선출됐던 경력이 있었다. 1차 입후보자 선정 투표부터 표몰이를 했던 한예송양은 "내가 주먹을 잘 쓴다는 이상한 소문 때문에 회장이 된 것 같다"며 씩씩하게 웃었다.

사연인 즉, 힘이 없거나 아픈 친구들이 힘 센 아이들한데 당하는 걸 못 참아 그간 대신 싸워준 점이 친구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은 비결이라고 자평한다. 한양은 "후보들이 너무 많아 회장까지 될지는 몰랐다. 4학년 때도 해봤지만 회장으로 활동하는 것이 적성에 맞고 너무 재미있다"며 회장 선출에 대한 설렘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여자 경찰이 돼 나라를 지키고 싶다는 한양은 "국회의원들이 돈을 자꾸만 뒤로 빼돌려 어른들을 서로 싸우고 화내게 만드는 것 같다"며 "국회의원들은 높은 자리에 오르면 뭐든지 다 해도 되는 걸로 잘못 알고 있는 것 같다"고 야무지게 말했다.

ⓒ 김진석

"회장은 학급을 위한 '봉사자'일 뿐"

"여러분, 투표할 때 선생님이 공정했나요?"

담임 선생님 장세형씨의 물음에 아이들은 힘차게 "예"라고 답했다. 사전 선거 운동을 막기 위해 장 선생님은 임원 선출 공지를 투표 전날인 9일에야 학생들에게 알렸다. 선생님은 학급 선거에서 철저하게 제3자로 배제된다.

장씨는 "아이들 눈은 대개 정확하다, 아이들을 믿기에 이번 선거 결과에도 만족한다"며 "간혹 임원이 잘못 선출됐을 때에도 아이들이 먼저 알아채고는 뽑힌 임원을 무시한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회장은 예전과 달리 모든 학생들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며 "임원이 모든 아이들과 특별히 차별되는 게 없으며 학급을 대표해 여러 일을 대신하는 봉사자일 뿐이다"고 덧붙였다.

장씨는 "당리당략만을 따지며 심지어 정해진 규칙마저도 개인의 욕심을 위해 바꿔 버리기까지 하는 것"이 바로 어른들과 아이들을 구분하는 선거 문화라며 "욕심 없고 순진한 아이들을 통해 그들이 뭔가 느꼈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신원초등학교 5학년 7반의 2004년 1학기 학급 임원 선출이 아무 탈(?) 없이 끝났다. 후보에서 떨어졌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학생도 없었고 자신이 밀어준 후보자가 되지 않았다고 시비를 거는 학생도 없었다.

5학년 7반 학생들은 서로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믿었다. 그들은 친구들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며 헐뜯거나 의심하지도 않았다. 열두 살짜리들의 학급 임원 선거는 규칙을 정확히 준수하며 단 한 번의 시비 없이 그렇게 무사히 끝났다.

▲ 선거를 끝내고 신원 초등학교 5학년 7반의 기념사진을 찍었다
ⓒ 김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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