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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의 대통령이 망명을 한 것인가, 아니면 납치를 당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분분하다. 아이티의 아리스티드 대통령은 8일 자신이 체류하고 있는,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외무부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자신은 납치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신은 창이 가려진 비행기에 태워져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끌려왔고, 자신은 여전히 선거에 의해 선출된 법적인 대통령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미군을 포함한 다국적군들은 이례적으로 빠른 속도로 아이티의 수도에 진입하고 있다. 현재 아이티에 들어와 있는 미군병력은 약 1500명 규모에 이른다고 한다. 미군만이 아니다. 미국의 전통적인 우방인 캐나다는 물론 프랑스와 칠레의 군대도 이미 아이티에 도착하였다.

그들의 목적은 아이티의 치안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다. 아리스티드 대통령이 아이티를 떠나기 전날 이미 대통령 궁을 미 해병대가 둘러싸고 있었고, 그런 상황에서 벌어진 미국과 프랑스 대사와의 회담에서 아이티를 떠날 것을 강요받았다고 아리스티드 대통령이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티의 수도는 현지에서 사용하는 스페인어 발음으로는 ‘뿌에르또 쁘린시뻬’이다. 이곳에서는 아리스티드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시위가 아직도 일어나고 있다. 미군 병사들은 대통령 궁 주위에 배치했던 중화기를 치우는 등 가능하면 진압군의 이미지를 풍기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미군이 아이티에 진입한 목적은 치안유지라고 하지만 아리스티드 대통령 자신이 망명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고, 미군에 대한 반대 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자들이 아리스티드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자들인 것을 감안하면 아이티의 현 상황은 이라크와 상당히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라크 전에 대해선 오랫동안 강경하게 반대의사를 밝혀왔던 프랑스가 아이티 사태에 대해서는 이례적으로 빨리 파병의사를 밝힌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가 이라크 전에서 배운 교훈을 철저히 지키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이라크 전 정부와 맺은 협상 등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후세인 전 대통령이 실각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후세인 역시 이라크 침공이 시작되기 직전에 프랑스에 상당한 이권을 보장해주는 협약들을 체결했다. 프랑스의 전쟁반대 노력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이 일방적으로 힘을 행사하려는 의지는 예상보다 훨씬 더 강했다. 덕분에 이라크 전을 강경하게 반대한 프랑스는 뒤늦게 입장을 바꾸었지만, 이라크에서 얻는 전리품 배분에서는 철저하게 소외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 학습효과가 바로 이번의 아이티 사태에 대한 프랑스의 즉각적인 개입의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 아리스티드 대통령이 아이티를 떠나기 전날 밤 미국과 프랑스의 관계자들과 함께 회담을 했었다는 사실은 프랑스가 이번 사태에 상당히 깊이 개입되어 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두 번째 이라크에 대한 침공은 전 세계에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은 영향을 주었다. 미국이 일방적인 힘의 행사를 통해서라도 자국의 이해를 관철하려 한다는 명백한 제국주의적 의지를 알 수 있었다. 또 미국에 등을 돌리지 않으려는 국가들은 미국의 의지에 순응하는 것이 이익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 같다. 이번 프랑스의 행보가 바로 그런 깨달음의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미국은 더 이상 자신들의 이익을 절대로 부합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아랍의 국민들은 물론이고 동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회교도들, 신자유주의의 엄청난 폐혜를 입은 남미의 국민들은 이제 미국이 주도하는 경제, 사회 정책에 대한 거의 무조건적인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현재 중동과 남미를 연결하면서 다시 예전의 비동맹국가들이 뭉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나, 칸쿤에서 열린 WTO 회의의 결과 도출을 방해한 주도 세력이 된 G21국가들의 존재는 결국 이런 자국 국민들의 절대적 지지에 힘입은 것이다.

이제껏 미국의 고립주의로 잘못 이해되어 왔던 아메리카대륙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를 선언한 먼로독트린 이래로 미국은 중남미의 국가들, 특히 카리브 해 국가들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여 왔다. 특히 쿠바혁명이 일어나고 미사일 사태가 발생한 이후로는 카리브와 중미국가들에 대해서는 구소련조차도 묵시적으로 미국의 기득권을 인정해 왔다. 쿠바가 볼리비아 등 기타 라틴 아메리카 국가에 혁명을 수출하려 할 때 구소련은 은밀하게 반대압력을 행사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파나마 침공, 그레나다 침공, 니카라구아 이란-콘트라 게이트, 멀리는 칠레의 인민연합정부에 대한 전복과 최근에는 베네수엘라의 쿠데타와 내정개입에 이르기까지 유럽국가들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의 아이티 사태에는 프랑스가 주도적으로 참여하기까지에 이른 것이다. 최근 아이티 사태에 대한 각국의 반응은 그대로 현재 세계의 정치지형을 그대로 보여준다.

남미에서는 홀로 민중소요가 일어나지 않고 있는 칠레만이 아이티에 군대를 파병했다. 미국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에 놓여 감히 반발을 하지 못하는 중미에서는 니카라구아가 미국의 요청이 있을 때에는 군대를 파병하겠다고 나섰다. NAFTA 국가이지만 이라크 전에 대해서 강하게 반대의사를 밝혔던 멕시코는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세계의 다른 나라들도 역시 미국의 앞마당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아이티는 독립과정에서부터 시작하여 같은 섬을 양분하고 있는 도미티카 공화국과 수차례에 분쟁을 겪는 등, 세계적으로 가난한 국가 중 하나다. 그 아이티를 개혁하고자 해방신학을 추종한 아리스티드 대통령이 1990년 선거에서 대통령이 되었다. 그 이전에 권력을 잡고 있던 사람들은 상당수가 플로리다로 망명을 갔다.

쿠바혁명을 피해 망명한 쿠바인들이 플로리다를 장악하고 쿠바정부가 전복될 경우를 대비해 ‘예비정부’를 만들어 놓고 있는 것과 유사한 상황인 것이다.

미국과 프랑스에 의해 급조된 아이티 ‘현인위원회’에 의해 아리스티드 이전에 국무총리였던 사람이 다시 아이티의 국무총리로 선임되었다고 한다. 아이티에 진주한 국가들은 치안을 회복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실질적으로 아이티의 헌정질서는 완전히 무너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세계는 침묵하고 있다.

이라크 전 이후에 세계는 저마다 다른 교훈을 배웠다. 그리고 앞으로 세계를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가는 결국 새로운 교훈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실천하는가에 달려있을 것이다. 아이티에서 우리는 매우 슬프고 실망스러운 그 무엇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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