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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감독이 베를린 영화제의 감독상을 받았지요. 이로써 세계 3대 영화제의 반열에 한국 감독 세 분이 나란히 이름을 올렸네요.

축하할 일입니다만, 문득 궁금해집니다. 일단 국제적 예술로 공인된 한국의 대표적인 3대 영화를 '취화선'(2002년), '오아시스'(2002년), '사마리아(2004년)'라고 해두지요. 그럼 해외에서는 한국의 임권택(36년생), 이창동(54년생), 김기덕 (60년생) 감독을 어찌 이해하고 있을까요. 얼마나 다르게 볼는지요.

1996년 '악어'로 첫 선을 보인 김기덕 감독은 동년배의 신세대 감독들과 더불어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전령처럼 다가왔지요. 홍상수 감독(61년생)의 1996년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허진호 감독(63년생)의 1998년 데뷔작 '8월의 크리스마스'와 함께 선배 세대의 영화 문법과 분명한 선을 긋고 등장했으니까요. 그러나 이들의 영화는 어찌나 확연하게 차이가 나던지 아주 일관되게 다르더군요.

또한 김기덕 감독은 한때 가수 박진영이 페미니스트로 오해받던 시절부터 여성주의 진영에서 줄기차게 몰매를 맞았던 남성이기도 했지요. 그의 9번째 작품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이후 비판의 강도는 훨씬 줄어든 듯 것 같고, '영화가 따뜻해졌다 너그러워졌다 변했다'는 소리들도 덩달아 듣지만, 그런다고 '김기덕 알레르기'를 일으켰던 우리의 감성이 변모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렇듯 김기덕 감독은 늘 비교의 한 복판에 있었더군요. 당연히 문제적 인물이 되고 맙니다. 데뷔 이래 9년째 10편의 작품을 찍어내면서 한 번도 거르지 않고 평단과 관객으로부터 트러블 메이커로 자리를 잡아온 이력도 번번이 재조명을 받지요. 김기덕 감독, 당신의 기만적 전략입니까 치명적 한계입니까. 어느새 우리는 그렇게 캐묻고 있었나 봅니다.

특히 그의 7번째 작품 '나쁜 남자'는 예외적인 흥행과 함께 최고의 논란을 불러일으켰지요. 온통 '나쁜 남자'를 둘러싼 볼썽사나운 이야기였습니다. 그는 상처를 받았고 겁이 나서 인터뷰를 거절하고 있었나 보더군요. 당시에 그를 유일하게 인터뷰했던 엮은이는 "지지자들과 반대 진영의 글 184편을 프린트했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김기덕(의 영화들)에 관한 글들은 그를 옹호하건 아니면 그 반대로 비판하건 항상 비유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는 동물로 불렸으며, 괴물 취급을 당하고 있었으며, 정신병에 걸린 환자처럼 대우받았다."

내가 그랬던가요. 당신은 그랬습니까.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한 편이라도 보았다면 그때의 자신의 감정을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장면에서 께름칙했고 어떤 대사에서 불쾌했으며 누구의 시선에 분노했는지.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당신의 대답과 대조해보세요.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이제 나와 당신의 심리적 방어 기제를 유린하고 무의식의 억압 덩어리를 드러내는 묘한 주문이 될 테니까요.

"김기덕이 불편한 것은 그가 괴물이거나, 동물이거나, 정신병자여서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오직 그만이 죄의식을 붙들고 싸우고 있기 때문에 그 사실을 환기해야 한다는 사실이 괴로운 것이다."

엮은이의 이 말은 바로 나의 위선과 오류를 스스로 들춰내게끔 작동된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과 당신의 관계를 묻고 있습니다. 임권택과 이창동도, 홍상수와 허진호도, 그 외의 여성주의 영화들도 그토록 죄의식에 몸들 바를 몰라 시종일관 울부짖지는 않았다는 뜻이겠지요. 당신은 동의하시겠어요.

그가 옳았고 당신이 틀렸다는 소리가 아니지요. 말은 바로 하지요.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당대 한국 영화 관객들의 보편화된 취향을 우롱하고 배반합니다. 대중영화로도 예술영화로도. 이리 보면 재미없고 저리 보면 촌스럽고. 허나 김기덕 감독 본인은 개의치 않는 것 같군요. "그의 삶의 경험이 가져다 준 것"이기에 "그는 우리들이 문화적으로 체험하지 못한 영화"일지라도 계속 "만들고 있"을 뿐이니까요.

책은 여러 필진과 관련 인터뷰를 통해 5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글로 다양한 접근을 내놓고 있지만,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핵심에 대해서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분석에 공감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제가 임의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계급의 추락. 둘째, 육체의 상처. 셋째, 종교의 구원. 그의 영화 전편에 걸쳐 등장하는 인물들의 불행과 인연은 불문율처럼 이 세 가지 화두를 건드리고 있습니다. 돌아보니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라는 자축의 환호성이 커질수록 이런 주제는 가급적 안 다루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여간해선 스크린에서 보기 힘들어진 것은 분명하네요.

그런 판국에 계급의 추락이라니요.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에 인상적으로 등장하는 우편배달부의 아이 납치와 살인에도 계급의 문제는 중산층 가족의 위기를 증폭시키는 틈새로서 치고 빠지는 충격적 사건이지요. 이미 바닥에 추락한 계급의 비명이 성가시게 메아리치는 정도이지, 김기덕 감독처럼 계급의 추락을 영화의 뼈대 삼아 내내 울림을 만들지는 않거든요.

육체의 상처라니 이건 또 뭡니까.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에 나오듯 두 남녀의 엉덩이에 남은 뒤틀린 탐닉의 매질 자국인가요, 아비가 딸의 눈을 멀게 하는 '서편제'식의 제의적 희생으로 얻는 예술적 초탈의 생채기인가요. 이런 수준이 아니지요. 김기덕 감독에게 육체의 상처는 관계의 시작이고 심화이며 전환이고 결론입니다. 참 지독하지요.

더욱이 종교의 구원이라니요. 누가 요즘 영화에서 구원을 찾나요. 심지어 기독교 영화라는 말까지 들리던데, 이거 미친 짓 아닙니까. 결국 내 탓이요 하라는 거 아닌가요. 내 탓이요 해서 남는 게 뭔가요. 어떤 죄가 더 나쁜지 가리고 덜 죄지은 놈은 그래도 행복하게 살아가야 이야기가 되지요. 김기덕 감독처럼 얽히고 설킨 원죄를 찾자면 끝이 없다니까요.

우리는 이렇게 타박하고 외면하면서 김기덕 감독을 시대착오의 어린 왕자로 분칠해서 저 구석에 치워두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끝없이 추락하는 계급과 영원히 상처받는 육체와 구원을 위한 종교라면 더 이상 대면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한국 사회에서, 아니 최소한 한국 영화에서 굳이 자기 자신을 까발리는 일을 누군들 원하겠습니까.

해서 김기덕 감독과 그의 영화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엮은이는 "대답하는 대신 질문을 사랑하는 방법"이 중요하다고 나직이 실토하는 수밖에 달리 수단을 찾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주인공들이 빠져든 사건에 대해서 항상 우유부단하기 때문이다. 사태는 점점 나빠지는데도 불구하고 수수방관한다. 그것만이 김기덕이 자기의 고통을 영화로 말할 줄 아는 유일한 기술이기 때문이다."

김기덕 감독은 쉼 없이 달려왔습니다. 있을 수 없는 작업 일정으로 영화를 생산했고요. 모두 저예산 제작이었지요. 그렇게 자신의 몸을 혹사하며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새 세계적 감독으로 자리를 잡았고, 여유로워졌다며 근작의 영화에 대한 시선도 조금씩 너그러워진 것 같네요. 정말 변화한 걸까요. 우리가 조금 편하게 볼 수 있을 만큼 그의 영화가 변화했다는 뜻일까요.

그 전에 비디오 가게에 가서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빌려보고 한번은 그의 질문을 사랑해볼 일입니다.

김기덕, 야생 혹은 속죄양

강한섭.정성일 외 지음, 행복한책읽기(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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