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고 춘 식(서울 한성여자중학교 교장)


당신들은 누구인가
절망에서 희망을 자아올리는 당신들은 누구인가
답 하나 없는 상황에서
수많은 답을 이끌어내는 당신들은 누구신가

13일 밤, 여섯시 정각
나는 광화문 지하도를 빠져나와
종각 옆 길,
경찰 버스로 좁아진 길,
그 인파에 몸을 맡기면서도
나는 게릴라 콘서트의 주인공처럼 가슴이 떨렸다
내 눈가리개를 떼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까
속으로 숫자를 세면서 불안하였다
과연 ‘몇 만 명’이 모일 것인가
종로로 가는 길목 하나는 막을 수 있을까

아, 그런데 이미 그대들은 거대한 파도가 되어
불의(不義)를 향하여 장하게 으르렁대고 있었다

아, 얼마나 미안한 일이냐
바보 같이 불신의 끈에 묶여
확신 없이 엉거주춤했던 발걸음
미적미적 꼬리 내리는 데 익숙한 마음
스스로 불이 되지 못하는 나 자신
나는 나를 마구 비웃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대들은
나를 비웃을 시간도 주지 않았다
촛불을 나누어 주면서 웃는
한 아줌마의 미소 하나로
나는 나를 비웃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대들이 나를 받아주었으므로
그대들 안에 내가 있는 것만으로
나는 자랑스러웠다

이어지는 함성들
함성이 이리도 아름다운 것인가
진실의 힘은 이리도 찬란한 것인가

그대들은 단 하룻만에
이미 ‘통곡(慟哭)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절규(絶叫)중학교’를 졸업하였다
‘분노(忿怒)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대들의 목소리는 점잖은 꾸짖음이었다
정의와 민주와 진실의 무게를 실어
역사에 기록될 말들을 골라 말하는
여유까지 가졌다

자랑스러운 그대들이여!
촛불을 나누어주면서
그대들은 나눌수록 많아지는
오묘한 기적(奇蹟)을 나에게 가르친다
그 기적은 쌓이고 쌓여
광화문(光化門)은 이제
‘광화문(光火門)’이 되었다

광화문 이 곳은
스스로를 태워 빛과 온기를 내는
그대들로 하여
나라와 겨레와 그 역사의
식은 가슴을 따뜻이 데워주고
밝은 빛을 비춰주는
성스러운 자리가 되었다

아, 자랑스러운 그대들이여!
온 나라, 온 겨레의 치욕을
순식간에 자신감과 희망으로 바꿔 놓은
그대들이여!

자랑스럽구나!
참으로 자랑스럽구나!
아, 이 땅이 자랑스럽구나!

그대들이여!!

2004. 3. 13.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김병기 대필) 한성여자중학교 교장입니다. 한겨레신문에 '시조'를 연재하기도 했답니다. 이 분은 최근 서승목 교장선생님의 사망 사건과 관련 교장단이 서울시청 앞에서 시위를 열려고 하자 이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진 교장으로서 입장을 밝히기 위해 기자회원으로 등록했습니다. 앞으로도 교육 관련 글을 계속 싣겠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