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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22일 일본제국주의는 강압으로 한일합방조약을 체결해 이 땅의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일본 제국주의는 무단통치를 통해 조선의 경제를 수탈해 갔다. 하지만 물질만 수탈해 가지는 않았다. 그 수탈은 사람에게까지 이어졌다. 일본 군인이, 경찰이, 일본 민간인이, 그리고 일본 앞잡이가 된 조선인이 사냥개로 그 수탈에 나섰다. 수많은 이들이 징병과 징용으로 전쟁터에 끌려갔고, 그때 우리의 여성들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

그와 같은 처절한 삶을 살아온,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의 한 분 이야기가 책으로 엮어져 나왔다. 정신대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의 <버려진 조선의 처녀들>(아름다운 사람들, 2004)이 그 책인데, 여기에는 이남이 할머니, 이름하여 '훈 할머니'의 질곡의 삶이 그려져 있다.

우선, 이 책 서두에는 정신대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에서 이 책을 남긴 이유가 소개돼 있다.

"힘없는 나라와 민족의 일원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그야말로 소설과 같은 인생을 살아가신 정신대 할머니들의 일대기는 우리 현대사의 축소판이다. 할머니가 가신 후 우리 회원들은 고민을 하다가 할머니의 삶은 우리 민족의 죄를 대속한 삶이었다는 깨달음에서 돌아가신 훈 할머니의 일대기를 기록으로 남기기로 결의하였다."(발간사)

이 책은 네 꼭지를 이루고 있는데, 첫 번째는 이남이 할머니께서 일본위안부로 끌려가기까지의 어린 시절의 삶, 두 번째는 이남이 할머니를 애타게 기다리고 또 찾아 헤매는 어머니와 남동생의 모습, 세 번째는 55년만에 고국 땅을 밟아 친척들을 만나기까지의 여정, 그리고 마지막 꼭지에서는 고국으로 영구귀국하는 할머니의 모습과 죽음을 담아내고 있다.

이남이 할머니의 어린 시절을 잠깐 되돌아보면, 여느 시골 사람들의 삶과 그리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이 엇비슷한 삶을 살았으니 말이다.

"엿을 고아 팔며 고물장사 하는 아버지와 보따리 방물장사를 하는 어머니. 이남이네는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남에게 빌리면서 살지는 않았다. … 일본 제국주의가 창씨개명을 강요해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성을 '기와리'로 바꾸었다. …이남이 위로 덕이 언니, 남동생 태숙, 막내 순이가 있었다."

그렇게 아등바등 살면서도 나름대로의 행복을 맛보고 있었지만, 일본제국주의는 그 집안의 행복과 그 동네의 행복, 그리고 우리나라 곳곳의 행복을 모두 앗아갔다.

"1942년. 열 여섯 나이처럼 봄이 왔다. 하지만 그 봄은 따뜻하지도 설레지도 않았다.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에서 인간사냥을 벌였다. …여기 저기서 여자들이 두세 명씩 이남이처럼 끌려 왔다. …이들은 다 어디서 온 것일까. 집에서 영문도 모른 채 낯선 사람에게 끌려온 이남이, 들판에서 땅을 뚫고 나온 쑥을 캐다 잡혀온 이남이, … 며칠 굶주린 배 먹을 거로 유괴 당한 이남이…."

그 이후, 이남이 할머니는 마산에서 배를 타고 타이완으로, 싱가포르로, 사이공으로, 그리고 캄보디아에서의 50여년의 삶을 살기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그녀는 이를 악물며 버텨냈다.

"마산에서 닷새를 지낸 다음 날 아침, 작은 배를 탔다. … 이제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깊은 물, 허허바다였다.… 배는 타이완에서 멈추었다. … 다음날 배는 싱가포르로 향했다. … 타이완을 출발한 배가 멈춘 곳은 싱가포르였다. 이남이를 포함해 아홉 명의 조선 여자들이 내렸다."

"이남이가 가두어진 방은 2층이었다. 방은 크기가 두세 평쯤은 되었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오로지 침대만 하나 있었다. 침대는 지친 몸을 편안히 누이는 잠자리가 아니다. 침대는 고문대였다. 그 방은 인간을 죽이는 방이었다."

"임신 9개월인 그 여자가 있는 방문 앞에도 일본군인들은 여전히 길게 줄을 섰다. 이남이는 임신 9개월의 그 여자가 뭉텅뭉텅 쏟아내는 피를 보았다."


1945년 여름이 오기 전, 이남이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 온 지 4년이 되었다. 그때 이남이 할머니는 일본군 제 2사단 소속 장군인 다다쿠마를 만나게 됐는데, 그 다다쿠마의 꼬임에 의해 이남이 할머니는 한국에 돌아오는 발목을 결국 잡히게 된다.

"1953년 11월, 캄보디아. 80년이라는 프랑스식민통치가 끝났다. 프랑스 사람들이 다 간 후 다다쿠마는 혼자 캄보디아를 떠났다. 이남이는 그 사실도 몰랐다. 다다쿠마는 일본제국주의가 끌고 온 이남이를 캄보디아에 계속 있게 한 사람이다. 고향에 가려할 때 못 가게 길 막은 사람이다."

그 사이 이남이 할머니의 어머니는 1972년 눈을 감았고, 동생 이태숙도 KBS가 방영한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에 수 차례 나갔지만, 결국 누나를 그리워하다 92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이제는, 시부모와 남편 옆에서 줄곧 이남이 할머니의 얘기를 귀담아들은 올케 조선애만 세상에 남은 것이었다. 세월이 더 흘러 올케마저 세상을 떠났다면 아무도 이남이 할머니를 기억해주지 못했을 텐데, 1997년 8월 29일, 이남이 할머니는 이순이씨와 조선애씨와 만났다. 그때 이남이 할머니는 그런 말밖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다다쿠마가 정말 밉다. 그를 만나 화를 내고 싶다. 짐승만도 못한 삶이었다. 일본은 내게 너무 나쁜 짓을 했다. 다다쿠마도 자기 혼자 살려고 떠났다. 다시 태어난다면 남자가 되고 싶다."

그 날 할머니는 77년 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던 자신만의 나라를 찾게 되었으리라. 그러나 이남이 할머니, '훈 할머니'가 찾아야 할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으리라. 아직도 아시아 곳곳에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버려진 이들을 찾아야 하는 몫이 남아 있었으리라. 그러나 이남이 할머니는 50여년만에 대한민국 국적을 되찾은 후, 얼마 지나지 않은 2001년 2월 15일 눈을 감았다.

그렇다면 이남이 할머니, '훈 할머니'가 떠나면서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이 땅에는 현재 대구지역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8분, 경북에는 13분이 생존해 계신다고 한다. 이 분들은 모두 70대 중반을 넘긴 고령인 까닭에, 언제 이 땅을 떠날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렇기에 이 분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일본군, 일본 정부의 가해 진상을 세계에 널리 알려 규명해야 할 것이고, 이분들의 짓밟힌 명예를 하루 속히 되찾아야만 할 것이다.

버려진 조선의 처녀들 - 훈 할머니 편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지음, 아름다운사람들(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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