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실미도>에 이어 <태극기 휘날리며>도 꿈의 관객인 1000만 명을 돌파했다. 특히 <태극기 휘날리며>는 39일만의 1000만 돌파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연유야 어찌되었건 한국 영화사의 한 획을 그을 만한 중대 사건이자 '겹경사'이다.
그러나 국민들로부터 흥행성적 별 다섯 개의 만점을 받은 이 영화들에 대해 필자가 매긴 점수는 별로 후하지 않다. 영화에 문외한인 필자의 깜냥으로 영화 전반을 재단하기는 무리이지만, 한두 가지 인상비평을 이 글의 논리 전개의 '장치'로 삼으려 한다.
사실과 허구의 모호한 경계선에 있는 영화 <실미도>
<실미도> 흥행의 기폭장치는 사실과 허구의 모호한 경계선에 있다. <실미도>는 한반도의 냉전이 극에 달했던 30여 년 전에 실존했던 사건과 그 실화를 토대로 한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사건의 실체적 맥락은 이른바 북파공작 부대인 '684 부대'의 훈련병들이 약속 불이행과 처우에 불만을 품고 일부 기간병을 살해하고 실미도를 탈출해 민간인을 인질로 난동을 일으켰다가 진압군과의 교전과정에서 대다수가 사망하고 나머지 생존자는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당한 어두운 현대사의 비극이다.
그런데 영화 <실미도>는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부대원(훈련병)의 일부를 사형수나 무기수로 설정했고, 특히 이 영화의 극적 전개의 결정적 모티브에 해당하는 정부 당국(중앙정보부)의 '부대 해산 지시'를 이 '위험한 살인병기'들에 대한 '사살 명령'으로 등치시켰다.
그러나 684부대의 훈련병들이 영화에서 설정한 사형수나 무기수 등 범죄자가 아니라 모집책들이 '감언이설'로 꾄 일반인이었다는 사실은, 1971년 실미도 난동사건의 수사를 맡았던 김중권 당시 공군 감찰관(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증언 등으로 이미 확인되었다.
또 영화의 극적 전개의 결정적 모티브로 삼은 '부대 해산=사살' 등식은 전적으로 허구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800만 명이 확인한 진실, 이제 당신이 볼 차례"라는 과장광고
더욱이 이 영화의 제작사는 이처럼 이 사건의 실체적 맥락을 흐트러뜨림으로써 허구와 사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데서 더 나아가 "800만 명이 확인한 '진실' 이제 당신이 볼 차례입니다"라는 과장광고 문구를 통해 성인들은 물론 겨울방학을 맞은 수많은 고등학생들에게 허구를 진실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바로 그 점이 필자가 이 영화가 차라리 '국내용'이기를 바라는 이유이다. 영화 <실미도>가 일본, 동남아 등지에 한국 영화 사상 최고의 가격으로 수출되었다는 소식이 낭보 아닌 비보로 들리는 것이다.
그래도 대강이나마 우리 현대사의 맥락을 이해하는 청소년들도 허구를 진실로 가장한 모티브와 허구를 진실로 착각하게 하는 광고에 넘어가는 판인데, 하물며 1·21사태는 뭔지, 실미도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 등 아무런 물정 모르는 외국인들이 이 영화를 통해 "한국인 1000만 명이 확인한 진실"과 맞닥뜨릴 때 대한민국의 '국가신인도'는 어떻게 될까.
제작비 147억원, 동원된 엑스트라 숫자만 2만5천명에 이르는 말 그대로 '블록버스터' 대작인 <태극기 휘날리며>는 그런 점에서 천만다행이다. 6·25 한국전쟁이라는 누구나 다 아는 소재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허구를 진실로 가장할 여지가 처음부터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태극기 휘날리며>에 대해서는 '한국판 라이언 일병 구하기' 이상의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혹평도 있고, 또 실제로 영화구성이나 카메라워크와 그 효과, 영화음악 등에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 따라 잡기'가 역력하게 드러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할리우드 대작 전쟁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10분의 1밖에 안되는 '저예산'으로 그만한 수준의 전쟁영화를 만든 것은, 분명히 한국 영화의 전쟁영상미학(?)을 한 수준 높인 것으로 큰 박수를 받을 만하다.
<태극기...> 시나리오 단계부터 '좌우합작' 고증, 의도적 이념 배제
그럼에도 관객 1000만 명이 든 대성공작치고는 영 실망스럽다. 우선 이 영화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단지 "우리는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야 한다"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일 뿐이다. 그래서 기억에 남는 대사 하나를 찾을 수가 없다. 이 영화에는 치열한 전투의 스펙터클만 있지 정작 '한국전쟁'은 없는 것이다.
한국전쟁의 역사·사회적 맥락을 배제한 채 '전쟁 스펙터클'만을 화면 가득히 채운 <태극기 휘날리며>는 전후 세대가 만든 첫 전쟁영화답게 이념은 관심 밖이며, 가족애와 형제애가 모든 대의명분을 압도한다.
한 영화평론가는 이를 "순진해 보이지만 한국의 모든 세대, 아마도 해외관객까지 편히 수용할 만한 영리한 설정이다"고 날카롭게 비판했지만, 실로 '순진해 보이지만 영리한' 이런 의도적 배제와 장치 때문에 '39일만의 1000만 동원'이라는 경악할 관객몰이에 성공한 것이다.
한쪽에선 이 영화를 보고서 이라크 파병 반대의 명분을 찾았다고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같은 영화를 보고서 새삼 국가안보의 중요성을 실감했다고 하는 것도 이념 배제라는 의도적인 장치 때문이다. 그래서 비유컨대 진보적 시민단체인 '참여연대'도, 보수적 관변단체인 '자유총연맹'도 이 영화에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강제규 감독은 시나리오 집필 단계에서부터 <전쟁과 사회>의 필자인 김동춘 교수(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같은 진보 성향 학자와 한국전쟁사 연구에 정통한 김행복 박사(국방부 군사편찬 연구소 전사부장) 같은 보수 성향 학자를 나란히 자문위원으로 영입해 '균형 있는(?)' 고증으로 중립성을 꾀했다.
그 결과 이 영화는 전전 세대와 전후 세대를 모두 만족시키는, 형제애는 '절대선'이고 전쟁은 '절대악'이라는 비교 불가능한 명제로 한국전쟁이라는 소재를 탈역사화한 '전쟁 영웅담'에 머물고 있다.
"'실미도 684부대'랑 '태극기 깃발부대'랑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그 대립하는 선악의 접점에 '진태'(장동건)가 있다. 진태는 그 절대선과 절대악의 경계를 종횡무진으로 넘나들면서도 상처 하나 입지 않은 채 총탄이 빗발치는 적진을 반복해서 뚫고 나간다. 단지 자신의 사명은 동생 진석(원빈)을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라는 맹목으로 오로지 가족 공동체에만 헌신하는 '무뇌아'인 진태에게 '적진'은 때로는 인민군이고 때로는 국군이다.
그래서 자신과 가족의 전부인 사랑하는 동생이 국군의 손에 죽었다고 믿는 순간, 최고의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전쟁영웅' 진태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인민군에 가담해 '깃발부대' 부대장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그가 증오하는 것은 국가도 이념도 아닌, '동생을 죽인 자'일 뿐이었다.
동생이 죽었다고 생각해 전쟁이라는 '절대악'에 영혼을 팔아버린 채 증오와 광기로 살육을 일삼으며 인민군의 전쟁영웅이 된 깃발부대장 '리진태 소좌'의 총부리를 적(국군)에서 아군(인민군) 쪽으로 되돌린 것 또한 형제애라는 '절대선'이다. 그는 동생이 살아있음을 확인한 마지막 순간에 다시 아군(인민군)에게 총부리를 돌리고, 동생을 살리기 위해 아군의 총에 맞아 숨진다.
사실 다큐멘터리영화가 아닌 바에야 모든 극영화는 허구이다. 그러나 그 허구에도 이해타당성은 있어야 한다. 이 영화를 본 순진한 청소년들이 인터넷 지식사이트에 "'실미도 684부대'랑 '태극기 깃발부대'랑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라고 묻고 있는 현실이 타당성이 결여된 허구의 부작용이 아니면 무엇일까.
<태극기 휘날리며>의 편리한 이분법은 탄핵 정국의 일부 '노빠'(노무현 오빠부대)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양비론'과 '중간층'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친노'냐 '반노'냐는 이분법으로 '우리편'과 '적'을 가른다.
일부 노빠들은 그들이 어느 편에 있었건 현재에 친노면 과거를 불문하고 '우리편'으로 싸고돌고, 과거에 노무현을 지지했던 같은 편이더라도 현재에 반노면 '적'으로 간주해 인격살인의 '총질'을 해댄다. 진태가 구두닦이 시절에 친동생처럼 데리고 있었는데 전쟁이 나서 자신이 국군에 끌려오듯 인민군에 끌려와 '붉은 옷'을 입고 있는 한동네 꼬맹이에게 맹목의 총질을 해대듯이.
일부'노빠'와 장동건
지난 1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노 대통령 지지자들의 탄핵 반대 집회에서 일부 참가자들은, 당초 민주당의 탄핵 추진 당론에 반대했으나 11일 노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선거법 위반에 대해 사과를 거부하자 탄핵 지지로 돌아선 추미애 의원을 지칭해 입에 담지 못할 욕을 구호삼아 외쳤다. 이 불미스런 사건을 가장 도드라지게 보도한 언론도 이들이 가장 경계하는 <조선일보>라는 사실을 이들이 알까.
추미애가 누구인가. 불법대선자금 때문에 '희망'의 이미지는 퇴색했지만, 그래도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의 '히트 상품'인 '희망돼지 모금운동'을 성공시킨 주인공 아닌가. 당시 민주당은 대중적 인기가 높은 유력한 '차기 주자'인 정동영·추미애 의원을 선대위와는 별도로 움직인 국민참여운동본부(국참)의 본부장으로 내세웠고, 차기 주자의 경쟁심리까지도 감안한 이 '투톱'은 각각 돼지아빠·돼지엄마라는 별명을 얻으면서 희망돼지 분양을 성공시켰다.
그때 전국 투어 지원유세를 취재한 기자들 사이에서는 이런 우스갯소리가 나왔다. 추미애는 '노무현 선거운동'을 하는데, 정동영은 '정동영 선거운동'을 한다고. 그도 그럴 것이 추미애 의원은 1시간 지원유세를 하면 50분은 노무현 후보에 할애하고 그 10분의 1인 5분을 "저 추미애는∼"이라고 자신을 홍보하는 데 쓰는 데 반해, 정동영 의원은 그 반대로 50분을 "나 정동영은∼"에 할애할 때가 많았다. 즉 정동영 본부장은 국참 본부장으로 노무현 후보를 지원하는 전국 투어의 기회에 차기 주자로서 '예비 대통령 선거운동'을 한 것이다.
그런데 추 의원의 이런 헌신은 온데 간데 없고 다만 분당에 반대해 민주당에 남은 것만으로, 또 탄핵에 찬성했다는 이유만으로 '적'으로 간주된 것이다. 일부 극렬 노무현 지지자들의 이런 맹목성과 이성의 결여야말로 노무현 대통령을 망치는 길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후단협 철새들 vs 독수리 5형제... 김문수·이재오 vs 김원웅의 차이점은?
일부 '노빠'들은 지난 대선에서 승리한 노무현 대통령이 '민주당 후보'로서가 아니라 '국민 후보'로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고 주장한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도 이런 논리에 동의했다. 그리고 그런 내심은 민주당의 분당과 열린우리당 창당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잔민당', 즉 '잔류민주당' 의원들과 당을 함께 할 수 없는 근거로 이념·노선이나 정강정책의 차이보다는 '후단협'(후보단일화협의회)의 존재를 든다. 지지도가 떨어졌다고 국민경선을 통해 선출한 후보를 흔들어댄 이들과 어떻게 당을 함께 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후단협 회원 중에는 지금 민주당(유용태·최명헌 의원 등)뿐만 아니라 한나라당(강성구·김원길 의원 등)에 가 있는 사람도 있고, 또 열린우리당(김덕배·김명섭 의원 등)에도 있다. 그런데 일부 극렬 노무현 지지자들에게는 후단협 출신 중에서도 특히 민주당에 있는 후단협 출신만 '죽일 놈'이다. 말하자면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운 격이다.
지난 대선 이후 한나라당을 탈당했다가 열린우리당에 합류한 김영춘·김부겸·안영근·이부영·이우재 의원으로 상징되는 이른바 '독수리 5형제'들은 민자당 활동 등으로 길게는 10년 넘게 '반노' 진영에 섰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총선시민연대가 발표한 1차 낙선자 명단에도 제외되는 '특혜'를 누려 논란이 일었는데, 그 사유는 '한나라당 시절 당 쇄신과 개혁을 위해 애쓴 점'이었다. 그러나 이부영 의원은 97년 대선에서는 물론 지난 2002년 대선에서도 국가정보원의 도청 의혹을 제기하는 등 이회창 후보의 당선을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더 코미디 같은 현실은 공화당 사무처 직원 출신으로 민정당, 꼬마민주당, 한나라당을 거쳐 개혁당으로 '극과 극'을 달리다가 열린우리당으로 말을 옮겨 탄 김원웅 의원은 낙천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다. 새로운 정치를 내걸고 개혁당을 창당했으나, 결과적으로 이를 '노무현 전위부대'로 이용한 김원웅 개혁당 대표는 결국 옷을 바꿔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노빠'들에게는 둘도 없는 '우리편'이 되었다.
정말 극과 극은 통하는 것일까. 이들이 민중당 사무총장과 민중당 노동위원장 출신으로 지난 선거에서는 각각 '반노의 선봉장'과 '저격수' 역할을 한 이재오·김문수 한나라당 의원과 뭐가 다를까.
정치인이 극에서 극으로 변신하는 데는 최소한의 설명과 반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맹목적인 지지자들이 이들의 과거를 묻지 않았듯, '노빠'들에게도 과거는 불문이고 지금 당장 '친노'면 우리편이고 '반노'면 총부리를 겨눠야 하는 적인 것이다. 그 점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을 공유하는 열린우리당 일부 인사들의 인식도 일부 '노빠'들의 인식과 다를 바 없다.
관객이 많이 몰리는 영화라고 해서 '좋은 영화'는 아니다. 여론의 압도적 지지를 받는다고 해서 '절대선'은 아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