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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위길로서는 섭섭함을 감출 수 없었지만 여칠량의 진심을 모르는 것도 아니기에 마음을 다시 고쳐먹게 되었다.

'그래. 어쩌면 포교야말로 내가 가야할 천직일는지 모르지.'

백위길은 방안에 들어서 세간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28세가 되도록 혼인도 하지 못하고 홀로 살아온 처지에 세간이라고는 그릇 몇 개와 옷가지 정도밖에 없었다.

돌이켜보면 백위길은 8남매 중 막내로서 20살에 부모를 여의고 형들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립해 보겠다고 무작정 한양으로 상경한 후 7년을 보냈다. 출세를 해서 제대로 대접 좀 받아 보겠노라고 없는 형편에 배를 곯아가며 활 질을 배운 후 무술시험을 보아 군관이 되었지만 자리가 없다는 이유로 군역이 감면되는 가솔군관으로 머물렀을 뿐이었는데, 이렇게 뒤늦게나마, 어쩌면 자신의 인생을 바꿀지 모르는 빌미가 될지는 몰랐었다.

'인생지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하지 않았던가.'

다음날, 백위길은 새벽밥을 지어먹고서는 여칠량에게 인사를 한 후 사대문을 들어서 박춘호를 만나 자신이 살집을 안내 받았다.

"허! 오랜만에 신출내기가 들어왔구먼!"

다른 포교들의 비아냥거림인지 환영인지 모를 소리들을 맞이하며 백위길은 아직은 어색한 포교의 복색을 입고 통부를 받아들었다.

"이 통부를 잃어버리면 포교로서 끝장이 나는 것은 물론 사헌부로 이송되어 치도곤을 당할걸세 어디 그뿐인가? 포도대장 나으리까지 욕을 보이는 셈이 되니 이를 목숨처럼 여기게나."

박춘호는 이렇게 주의를 주며 통부를 전달했고 이를 지켜보는 다른 포교들이 한마디씩 던졌다.

"거 신출내기의 신고도 받지 않고 통부부터 주는 법이 어디 있소이까?"

"맞소! 포도청에 새 사람이 들어 온 것도 오래간만인데 한번 거 하게 놀아봅시다!"

"허...... 이 사람들이......"

박춘호는 포교들의 반응에 뭔가 못 마땅한 눈치였지만 그렇다고 쓸데없는 짓을 하지 말라고 만류하는 표정도 아니었다. 백위길은 잠시 당황해 하다가 눈치를 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럼 오늘 저녁에 이 신출내기가 거하게 내겠습니다."

"좋지! 좋아!"

"에이! 난 오늘 순라를 돌아야 하는데!"

그 날 저녁, 백위길은 예닐곱 명의 포교들과 왁자하게 어울려 인근 술집으로 향해 막걸리 사발을 돌렸다.

"어이 이 사람아! 자넨 팔자 확 핀 거야! 포교를 보고 무지한 인간들이 뒤에서 손가락질한다지만 어디 포교 만한 자리가 있는가? 보람도 있고, 때론 재미도 보고 그런 걸세! 허허허허!"

아까 전의 못 마땅한 눈치와는 달리 박춘호는 술에 취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흥겨워했다. 다만 이순보가 가끔씩 기분 나쁜 웃음을 짓는 것이 백위길로서는 마음에 거슬렸다. 막걸리 두 동이가 다 비워져 갈 무렵 이순보가 벌떡 일어서더니 소리쳤다.

"아 여기서 언제까지 막걸리만 비워댈 것이오! 이젠 기방(妓房)으로 갑시다!"

이순보가 느닷없이 소리치자 그 동안 술에 취해 호탕하게 웃던 박춘호의 표정이 싹 변하기 시작했다.

"맞소! 오래간만에 다방골 기방에서 한바탕 놀아봅시다!"

"거 이월이 엉덩짝 주물러 본 지도 오래간만이구먼!"

포교들은 신이 난다는 듯 너도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발걸음을 옮기려는 태세였고 아직까지 기방이 뭔지도 모르는 백위길은 어찌해야 되냐는 듯이 포장인 박춘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박춘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뜻밖의 말을 했다.

"그만 놀고 가지 뭘 기방에까지 간다고 그러느냐?"

"박포장은 기방에 가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지만 우린 안 그렇네."

이순보의 말에 박춘호는 술이 확 깬 듯한 표정을 지은 뒤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서둘러 일어나 자리를 떠나 버렸다.

"그래 갈 사람은 가게나! 그래도 신참은 끝까지 자리를 지켜야겠지?"

덩달아 포교들도 기방에 간다는 말에 흥겨워하니 백위길은 박춘호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대답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어서 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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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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