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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열린우리당 지지율이 천정부지로 올라가 당원들이 표정관리에 들어갔다는 뉴스를 접했다. 같은 날 호주노동당의 지지율이 마침내 집권당인 자유-국민 연합당의 지지율을 넘어섰다는 뉴스도 함께 들었다.

그러나 두 정당의 상한가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리다. 우리당의 지지율은 대통령 탄핵에 대한 후폭풍이 불러온 결과물이다. 반면에 호주노동당의 경우는 불과 석 달 전에 당수직에 오른 마크 레이섬(42)이라는 야당 지도자가 온몸으로 부딪치며 만들어낸 눈물겨운 지지율이기 때문이다.

▲ 픽업 차량의 짐 칸에 몸을 싣고 농촌 지역을 누비고 다니는 마크 레이섬
ⓒ 로야랑가 로컬 페이퍼

신물나도록 겪은 가난의 체험

그는 도회의 그늘진 곳을 찾아다니며 '개혁을 통한 희망'을 설파했다. 픽업차량의 짐칸에 몸을 싣고 농촌지역을 누비고 다니면서 최근 미국과 맺은 자유무역협정(FTA)의 문제점을 설명했다.

레이섬 당수는 정당 지지율이 의사당 안에서만 창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자신이 노동자 계층이 사는 시드니 서부출신으로 정부임대주택에서 태어나 성장하면서 신물나도록 겪은 가난의 쓰라림을 통해 터득한 진리였다.

그는 "도박중독자였던 아버지가 어릴 때 집을 나가 편모 슬하에서 고생하며 자랐지만, 꿈을 잃지 않고 대학원까지 진학하여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했다. 노동당이 집권하면, 첫 업무로 건강정책과 교육정책부터 바꾸겠다. 가난의 대물림은 절대로 허용할 수 없다"며 노동계층의 적극적인 지지를 호소했다.

호주는 신자유주의 신봉자인 보수 정객 존 하워드 총리의 장기집권으로 계층간 격차가 커져 몸살을 앓고 있다. 이런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어낸 마크 레이섬은 그 틈새를 주도면밀하게 공략했다. 그는 변화를 갈망하는 노동계층의 바람을 외면해온 노동당 선배들에게 도전장을 내밀어 예상 밖의 승리를 이끌어내 역대 최연소 당수가 됐다.

레이섬 당수는 대 정부 질문에서 아주 꼼꼼하게 따져 묻는 전문가 스타일의 정책통이다. 그러나 장관의 답변이 성에 차지 않으면 욕설에 가까운 언어를 사용해서 의사당을 뜨겁게 달구어 놓는 거친 매너의 정치인이다.

멜버른의 일류 사립학교와 영국의 유수한 대학에서 공부한 '멜버른 보이'들이 주축인 보수집권당과 호주노동조합(ACTU) 의장 출신의 노동귀족들이 주축을 이루는 노동당이 여야를 구성하고 있는 의사당에서 마크 레이섬은 당연히 '왕따'감이다.

그러나 의사당 밖에서는 정반대다. 기존의 정치인들과는 달리 거친 언행을 보이는 레이섬에 대해 국민들은 한동안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투박함 속에 개혁의 확고한 신념과 인간적인 진실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알고 국민들은 그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레이섬의 '감성 정치'

마크 레이섬 노동당 당수는 개성이 넘치는 '이미지'를 적절하게 활용하여 크게 성공한 정치인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하루가 멀다하고 자신의 독특한 이미지를 선보이는 '이미지 정치'로 국민정서에 호소하고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그는 총리직에 올라도 오페라 하우스 건너편에 위치한 총리의 시드니 관저인 킬리빌리 하우스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의사당 근처에 위치한 캔베라의 총리 관저인 로지 하나만 사용해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

레이섬 당수는 그 공약을 발표하면서 "난들 왜 가족들과 함께 그곳에 사는 것이 싫겠는가? 다만 집 없는 서민들을 생각하면 불공평하다는 생각 때문이다"라며 국민정서를 자극하는 듯한 발언을 덧붙였다. 킬리빌리 하우스는 시드니 하버 중턱에 위치한 아름답기 그지없는 저택이다.

그 다음의 약속은 더욱 더 자기 희생적이다. 의원들에게 지급하는 고액의 퇴직연금을 서민들 수준으로 삭감하겠다는 것이다. 여야를 불문하고, 의원들은 크게 당혹스러웠지만 아무도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의원은 없었다. 이 또한 이성보다는 감성이 더 크게 작용한 레이섬의 결정이다. 그 제안은 이미 집권당에 의해 채택됐다.

3월 23일 레이섬 당수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서 노동당이 집권하면 이라크에 파병된 호주 군인들을 크리스마스 이전에 철수시키겠다는 공약을 발표했다. 최근 스페인에서 발생한 기차테러 사건과 호주를 포함한 파병국가를 공격하겠다는 테러단체의 협박에 잔뜩 긴장하고 있는 국민들의 정서를 읽어내고 내린 결단이다.

레이섬 당수는 개인적인 약점이 많은 정치인이다. 총리직을 바라보는 사람답지 않게 이혼한 경력이 있다. 호주에서 이혼경력을 가진 정치인이 총리에 오른 예는 아직 없다. 택시를 타고 귀가하다가 택시기사와 싸워 팔을 부러뜨린 일도 있다.

또 대중연설을 할 때 웅변조로 말하지 않고 대화하듯이 말해 행사장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능력도 약하다. 당수가 되기 전의 일이지만, 이라크 전쟁과 관련하여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을 아주 원색적으로 비난한 것도 정치 지도자로서 큰 약점이다.

그러나 이런 레이섬의 약점을 더는 거론하는 사람이 없다. 그가 스스로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것도 나의 삶이다"하고 당당하게 말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런 약점을 털어놓음으로써 번쩍거리는 이력을 자랑하는 보수정당의 '멜버른 보이스'에게 주눅들었던 서민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간다.

그는 지난 3월 14일에 방영된 채널 9의 <60분>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가끔씩 나쁜 사람(bad boy)이기도 했던 자신의 과거사를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그 프로그램이 방영된 후에 그의 지지도가 크게 올라간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치밀하게 계획된 정치행위?

그러나 레이섬 당수의 투박한 행동과 잊을 만하면 터지는 '말 사고'들이 고도로 치밀하게 계획된 정치행위일 가능성이 있다며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반복해서 주입하는 민중적 언행 또한 '포퓰리즘'의 한 방편일 수도 있다는 비판이다.

그 근거로 레이섬 비판자들은 다음과 같은 예를 거론했다. 2004년 2월 29일자 <더 썬데이 텔레그래프>는 레이섬 당수가 보디랭귀지 전문가인 앤드류 브라이언트의 이런저런 자문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인터뷰나 연설을 하면서 눈맞춤을 정확하게 고정시키고, 말을 하면서 고개를 계속 끄덕이는 것은 빌 클린턴 대통령이 르윈스키와의 관계를 증언할 때의 모습을 연상시키므로 삼가고, 감자를 썰 때처럼 오른손을 계속해서 내려치는 것은 흑백논리에 빠졌다는 것을 암시하므로 절대 금물이라는 등의 교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보도대로 레이섬이 교정을 받아서 변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가 초기 모습과는 많이 달라진 것은 사실이다. 이렇게 변한 레이섬에 대한 반응은 엇갈렸다. 세련된 모습으로 변해 한 정당의 리더다워졌다는 사람들도 있고, 그 전 모습이 훨씬 인간적이고 진실해 보였다는 사람들도 있다.

'괴짜' 레이섬 당수 또 사고 치다

3월 22일 의사당에서 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알렉산더 다우너 외무장관을 상대로 대정부 질문을 하던 마크 레이섬이 '썩어문드러진 기생충 같은 치욕덩어리'라고 장관에게 쏘아붙인 것. 다우너 장관은 호주의 대표적인 엘리트 귀족출신이다.

여당 의석은 벌떼처럼 일어났고, 닐 앤드류 국회의장은 발언을 취소하라고 소리질렀다. 바로 그때 마크 레이섬 특유의 행동이 나타났다. 여당의원들의 항의와 의장의 지시를 못 들은 척 시치미를 떼면서 책상에 놓인 서류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과연 '엽기 당수'다운 처신이었다.

존 하워드 수상은 의사진행발언을 통해서 레이섬 당수가 얼굴이 벌개질 정도로 자제력을 잃었고 저열한 언사를 동원해서 동료의원이자 외무장관인 다우너 장관에게 모욕을 주었다고 길게 공박했다. 그가 국가지도자로서의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 23일 <디 오스트레일리안>에 실린 여론조사 결과
그 다음날인 3월 23일 호주 유일의 전국 일간지 <디 오스트레일리안>에서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야당인 호주노동당의 지지율(55%)이 집권여당인 자유-국민 연합당의 지지율(45%)을 10%나 앞섰다. 한동안 이어지던 양 정당간의 시소게임을 마침내 평정한 것이다.

그야말로 '마침내'다. 레이섬이 당수직에 오르기 전인 석 달 전까지 노동당의 지지율은 형편 없었기 때문이다. 이 현상은 지난 10년 가까이 이어졌는데 어떤 때는 연합당에 더블 스코어로 졌다. 당연한 결과지만 노동당은 총선에서 연전연패 할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 책임제 국가도 마찬가지지만 내각책임제 국가에선 야당 리더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 야당은 집권에 대비해서 그림자 내각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국정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것 못지 않게 더 나은 정책대안을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레이섬 당수가 내놓는 정책대안은 늘 같다. 노동자 계층 중심의 개혁을 하자는 것. 그들이 절대 다수일 뿐 아니라 너무 오랫동안 홀대받았다는 것이다. 레이섬 당수는 연설을 마치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를 하곤 한다.

"나는 내가 어느 곳에서 왔는지 절대 잊지 않는다."

이런 추세라면 레이섬 당수의 노동당이 집권에 성공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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