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대 총선 후보등록 개시일인 3월 31일 <중앙일보>는 전국 243개 지역구를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그동안 몇몇 언론사들이 여론조사 기관에 의뢰해 전국 단위의 정당 지지도나 표본 지역구를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를 해왔지만, 전국 243개 전 지역구를 대상으로 한 후보 지지도 조사결과는 처음이었다.
이날 <중앙일보> 1면에 실린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본제는 '한나라 6·열린우리 144…혼전 91곳'이고 부제는 '오차범위 넘는 우세지역…민주는 0'이다.
반세기 동안 반독재민주화 투쟁의 빛나는 전통을 자랑스러워하는 민주당 선배 당원들이 보면 만우절 신문이 아닌가 하며 제 눈을 의심할 정도다. 그러나 어찌하랴. 땅을 치고 통곡할 엄연한 현실인 것을.
4월 2일부터 본격적인 선거운동이 시작되고 '길고 짧은 것은 재봐야 한다'고 말하지만, 14일간의 법정선거기간은 지지세를 회복하기에 한나라당에는 너무 짧고 민주당에는 어쩌면 너무 잔인할 만큼 긴 것 같다. 결국 현재의 '탄핵 후폭풍'을 잠재울 만한 큰 변수는 없다는 것이 대다수 여론조사 전문가들의 견해이고 보면 이 구도의 근본을 흔드는 변화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우세지역 0'으로 상징되는 민주당의 극적 몰락
그런 측면에서 보면, 16대 국회에서 의석수가 재적의원의 2/3에 육박한 거대야당 한나라당의 세력 감소는 어느 정도 예상되어 왔지만, 의석수 70석으로 원내 제2당인 민주당이 처한 '우세지역 0'의 판세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극적 몰락이다.
민주당 몰락의 직접적 근인(近因)은 국민경선을 통해 자기당의 대통령후보로 선출한 대통령의 탄핵을 주도한 결정적 패착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민주당 몰락의 원인(遠因)은 민주당의 분당에서 찾을 수 있다.
지난해 노무현 대통령의 탈당과 분당이라는 시련을 겪고 11월 임시전당대회에서 '민주호'의 새 선장이 된 조순형 대표는 이렇게 기염을 토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민주당은 분열의 상처를 딛고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내년 총선에서 낡은 정치와 부패원조당인 한나라당, 배신분열정당인 열린우리당을 무너뜨리고 반드시 제1당으로 승리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네달만에 민주당은 원내 교섭단체 구성을 당면 목표로 민주노동당과 제3당을 다투는 처지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 와서 민주당의 몰락이 누구의 책임인지를 따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아무리 '탄핵의 후폭풍'이 모든 가치기준을 압도한다 하더라도 50년 정통 야당이 하루아침에 몰락하게 된 인과관계와 시시비비는 가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 그런 사실관계와 인과관계를 기록하는 것은 기자의 몫일 것이다.
골육상쟁
탄핵 정국과 민주당 몰락의 상관관계를 설명해주는 핵심 키워드는 '골육상쟁'이다.
골육상쟁(骨肉相爭) 혹은 상잔(相殘)이라고도 하는 이 말은 부자(父子)나 형제 등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끼리 서로 해치며 싸우는 것이나 같은 민족끼리 해치며 싸우는 것을 지칭한다. 상상해보라. 뼈와 살이 서로 싸우니 얼마나 잔인하고 아프겠는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생생하게 묘사된 6·25의 동족상잔이 그것을 가늠케 한다. 비록 <태극기 휘날리며>에는 1차원적인 형제애가 모든 것을 압도하되 2차원적인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배려는 별로 보이지 않지만, 전쟁의 잔학상만큼은 그 어떤 영화보다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우리 민족은 유사 이래 무려 1000회에 이르는 외침(外侵) 받았고 특히 중국과 몽고에 이어 근현대사에 일본으로부터 식민 지배를 받았음에도, 일제 식민 시절을 겪은 우리나라 국민은 일본보다 북한을 더 증오한다. 그것은 외적과의 싸움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아픈 동족끼리의 골육상쟁을 겪으면서 원한과 증오가 뼈에 사무쳤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 권력을 재창출한 민주당의 분당과 대통령의 탈당 및 열린우리당의 창당은 증오와 복수로 점철된 '골육상쟁'을 예비하고 있었고, 민주당이 주도하고 한나라당이 그 복수심에 편승한 대통령 탄핵은 그 증오의 비등점이 폭발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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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분당과 우리당 창당은 처음부터 '제로섬 게임'
사실 87년 이후 직선제 대통령제 하에서 양강 구도가 정착된 한국의 정치구도에서 별다른 이념의 차이가 없이 같은 뿌리에서 태어난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골육상쟁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민주당을 탈당해 정신적 여당을 자처한 열린우리당으로서는 거대야당 한나라당과 싸우려면 우선 먼저 선거판 자체를 양당구도로 만들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제2당인 민주당부터 밟고 일어서야 했기 때문이다. 즉 열린우리당의 창당은 정치개혁과 지역구도 타파라는 대의명분에도 불구하고, 원천적으로 열린우리당이 승하면 민주당이 망하고, 민주당이 승하면 열린우리당이 망하는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이었기 때문에, 분당은 처음부터 골육상쟁을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열린우리당이 우연이건 필연이건 한나라당과 일치한 민주당의 모든 행보를 일관되게 '한-민공조'로 몰아세우고, 급기야는 지난해 12월 조순형 대표 체제가 출범한 이후 노 대통령까지 나서서 "민주당을 찍으면 한나라당을 돕는 것"이라고 결과적으로 호남 등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한-우 양당구도'를 부추긴 것도,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이 이번 총선은 고정표가 있는 한나라당보다는 민주당과의 '제로섬 게임'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또 열린우리당과 지지기반이 겹치는 민주당이 지난 2월초 정당 지지도가 10% 이하로 떨어진 가운데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에 대한 구속영장 집행을 계기로 광주에 가서 '민주당 죽이기와 불법관권선거 책동규탄대회'를 열고 지역정서를 부추기는 장외투쟁에 돌입한 것도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을 공격하는 것이 '배다른 형제'에게 '텃밭'을 빼앗기지 않을 최선의 방어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탄핵 함수의 독립변수와 종속변수
사실 탄핵 함수에서는 민주당이 독립변수이고 한나라당은 종속변수였다. 탄핵은 대통령의 탈당으로 여당도 야당도 아닌 채로 방향감각을 잃고 정체성을 상실한 민주당의 증오와 복수심에 한나라당이 편승한 것이다. 즉 복수의 칼에 편승해도 손해볼 일 없다고 판단한 한나라당이 헌정사상 첫 탄핵을 시험삼아 시도해본 것이고, 이성보다는 감정이 실린 표결이었다.
그런 면에서 조 대표가 "탄핵은 열린우리당이 주장하듯 '한-민공조'가 아니라, 민주당이 주도하고 한나라당이 따라온 '민-한공조'다"고 항변하는 것은 말인즉슨 옳다.
열린우리당 식의 단순논리라면 사실 '거부권을 행사하라'는 민주당 다수 의원들의 요청을 거부하고서 '투명성 확보'라는 명분하에 한나라당 대북송금 특검안을 수용한 것과, 민주당이 당론으로 반대한 이라크 추가 파병을 '실용주의 외교'라는 이름으로 통과시키기 위해 노 대통령이 한나라당의 협조를 구한 것도 이른바 '수구냉전세력'과의 '한-노 공조' 혹은 '한-우 공조'라는 논리가 성립할 법하다.
물론 민주당이 한나라당이 주도한 측근비리 특검법안에 찬성표를 던지고, 그전에 노 대통령이 한나라당이 발의한 대북송금 특검법안을 수용한 것을 '공조'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둘 다 억지논리다. 문제는 이런 '한-민 공조' 주장이 대중에게 일정 부분 먹혀든다는 데 민주당의 원초적 비극이 있다.
김영환 민주당 상임중앙위원은 민주당이 처한 어려움을 탄핵안 가결 이후에 '후폭풍'을 겪고서야 비로소 이렇게 토로했다.
"분당 이후 '한나라 대 민주 구도'로 포지셔닝했지만, 야당의 한계로 인해 전선을 우리당과의 대립구도로 이동했다. 그 과정에서도 우리 지지율은 어려웠다. 분당과정에서 야당으로 내몰린 상황에서 민주당 정체성 혼란은 처음부터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탄핵 이전 지지율이 12%였는데, 이걸로 총선 승리 가능한가? 노 대통령이 양강구도로 열린우리당에 힘을 모으면서 우리가 계속 어려워졌다."
처음부터 17대 총선의 정치사전에 '중간'이란 없었다
애초에 처음부터 17대 총선의 정치사전에 '중간'이란 없었다. 그것이 민주당 몰락의 원초적 비극이다. 그런 점에서 조순형 대표가 잘못한 것은 '과도한 신념'이었다.
조 대표는 탄핵안 가결 이후 책임론을 제기한 의원들에게 자신이 즐겨 읽은 존 F. 케네디의 책 <용기있는 사람들>에서 인용해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지킨 자를 위해 예약돼 있다"고 되뇌었다. 조 대표는 평소의 신념대로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지키지 않고 분연히 떨쳐 일어나 노 대통령과 '맞장'을 뜬 것이다.
그런 점에서 충돌을 향해 간 탄핵열차의 파국은 오랫동안 정치권에서 비주류로 맴돈 원칙주의자라는 공통점을 가진 노 대통령과 조순형 대표의 개인적 특성에서도 밀접한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아래 상자 기사 참조). 굳이 분류하자면, 부러질망정 타협하지 않는 조순형 의원이 민주당 대표를 맡은 것 자체가 민주당 몰락을 예비한 탄핵 파국의 근인(近因)과 원인(遠因)의 중간쯤 되는 원인(原因)이었던 셈이다.
| | 조순형 민주당 대표와 노무현 대통령의 공통점 | | | | 1955년에 <동아일보>는 '한 애국 대학생의 논산훈련소 입대'라는 기사를 내보낸 적이 있다. 6·25의 상흔이 채 아물기도 전인 당시로서는 시골 면장의 아들만 되어도 군대를 기피하고 안갈 때인데 '고관대작의 자제'로서는 처음으로 서울대 법대생이 논산훈련소에 자진 입대했기 때문이다.
그 주인공은 6·25 당시 내무부장관으로 대구 사수를 진두지휘하고 이후 이승만 대통령과의 의견 충돌로 사직하고,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 나서 55년 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출된 유석 조병옥 박사의 3남 조순형이었다. 그 이듬해 조병옥 박사는 민주당 대표에 선출된다.
이 에피소드는 민주당의 분당 및 조 대표 체제와 탄핵 파국의 함수관계를 읽을 수 있는 실마리이다. 조 대표에게서 아버지가 만든 당을 아들이 문 닫게 하는 '불효'를 기대하기는 애초부터 힘들었기 때문이다.
조순형 대표는 5선 의원이다. 그러나 81년 정계 입문 전까지만 해도 조 대표는 삼성물산에 다닌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다. 상고 출신의 평범한 조세 전문 노무현 변호사가 81년 부림사건 변론 이후 인권변호사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사회현실과 정치에 눈뜨게 되었듯이, 평범한 '삼성맨' 조순형을 정계에 입문케 한 것도 신군부의 폭압정치였다.
당시 신군부가 정치활동규제법을 제정하여 많은 민주인사들의 정치활동을 금지함으로써 가형인 조윤형 전 국회 부의장이 출마하지 못하게 되자, 조 대표는 타의에 의해 형님을 대신해 징발되어 81년 제11대 국회에 첫발을 내딛게 된다. 그후 조 대표는 84년 민추협 결성 참여, 85년 신민당 창당 발기인 참여에 이어 12대 총선에서 재선 의원이 되었다.
조 대표는 그러나 87년 6·10항쟁에 참여해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뒤에 당시 박찬종·홍사덕·이철 의원 등과 함께 후보단일화 국민협의회 공동대표를 맡아 김대중·김영삼 후보의 단일화를 추진했으나 실패하자, 통일민주당(YS)을 탈당하되 평민당(DJ) 창당에도 가담하지 않고 재야 세력과 함께 한겨레민주당 창당에 참가하게 된다. 그러나 이 '제3의 길'은 13대 총선의 3선 고지에서 낙선하는 좌절을 겪게 된다. 노무현 후보가 90년 '3당합당'에 반대해 고난의 길을 겪은 것과 비슷한다.
90년 당시에 '원외'였던 조 대표는 88년 13대 국회에 입문한 노무현 의원과 이기택 의원 등 3당합당에 합류하지 않은 몇몇 의원들과 함께 이른바 꼬마민주당을 창당하는데 참여해 1년여 동안 야당 통합 때까지 같은 당에서 처음 함께 활동했다. 그 이후 두 사람은 92년 14대 총선에 통합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노무현 의원은 낙선하고 조 대표는 3선에 성공한다.
그 이후 새정치 국민회의 창당 및 민주당의 분당으로 두 사람은 다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96년 15대 총선에서 조 대표는 국민회의 후보로 4선에 성공하지만, 노 대통령은 서울 종로로 지역구를 옮겨 출마했으나 다시 고배를 마시게 된다. 이후 노 대통령은 '통추' 활동을 하다가 97년 대선을 앞두고 국민회의에 합류했다.
5선 의원인 조 대표가 당직보다는 주로 원칙을 고집하는 원내활동으로 '미스터 클린', '쓴소리', '소신파' 같은 별명을 얻은 데 비해, 노 대통령은 원내보다는 원외에서 지역주의와 맞서 싸우면서 정치권에서 비주류로 맴돈 공통점을 갖고 있다. 따라서 부러질망정 타협하지 않는 공통의 특성에다가 뿌리가 같은 두 사람이 각각 민주당에 잔류, 탈당한 때부터 탄핵 파국의 '불씨'가 뿌려졌다는 얘기가 나온다.
열린우리당과의 총선 전 연합공천 및 합당 가능성에 대해 국민을 배신한 데 따른 '공동 심판론'과 '공멸론'으로 원칙과 소신을 피력한 조 대표나, 탈당을 해서 10석밖에 못얻더라도 전국 정당이 되는 것에 더 가치를 둔 노 대통령이나 '외곬'이기는 마찬가지인 셈이다.
조 대표는 지난해 11월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이번 분당 사태는 87년의 후보단일화 실패 못지 않게 저에게 어려운 결단과 선택을 강요했다"면서 민주당을 지키기로 결심한 까닭을 특히 "민주당을 지키면서도 신당이 추구하는 정치개혁, 국민통합과 지역구도 타파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 밝혔다. 조 대표는 더 나아가 노 대통령의 배신을 성토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민주당이 실시한 한국 정치사상 초유의 국민경선에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습니다. 민주당의 모든 인적·물적 자원, 그리고 전국 100만 당원의 헌신적 노력과 희생으로 당선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취임 7개월여 만에 당은 분당되고 9월 29일 노 대통령 자신이 탈당하여 민주당은 하루아침에 집권당에서 야당이 되었습니다.
노 대통령의 이러한 행위는 민주당에 대한 배신일 뿐만 아니라 민주당의 정강정책을 믿고 지지한 국민들에 대한 배신이며, 정당정치·책임정치의 기본을 파괴한 민주헌정에 대한 배신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이러한 정치적 배신행위는 다음 총선에서 반드시 국민의 현명하고도 준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조 대표는 '탄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 당시에 이미 '총선에서의 준엄한 심판'을 통한 사실상의 탄핵을 얘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