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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진전망대에서 바라본 진도대교, 다리 아래가 바로 울돌목이다.
ⓒ 김정은

갈매기넌 어딜 가고 물드넌 줄 모루고
사공언 어딜 가고 배뜨넌 줄 모루나
아리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에~
아리랑 음~ 아라리가 났네


걸죽한 진도 아리랑 가락이 무심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갑자기 국물 뽀얀 순대국과 진하고 텁텁한 막걸리 한사발이 생각난다.

순대국과 막걸리, 그리고 진도아리랑, 비록 첫 만남은 투박하되 만남이 잦을수록 한없이 깊어지는 맛과 멋에서 셋은 어느덧 닮아 있었다.

어깨춤 덩실거리는 흥 속에서도 마치 가슴 속 응어리를 토해내버리려는 처절한 몸부림이 느껴지는 진도아리랑, 한참 듣고 있으면 처음엔 흥겹다가 슬퍼지곤 하는 이유가 아닐까? 아리랑 가락 따라 해남~목포간 77번 국도를 달리던 자동차는 어느덧 우수영에서 방향을 틀어 아라리의 고장 진도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울돌목과 진도대교

이 아래 강로야 육로나 되거라
내발로 내가 걸어서 환고향(還故鄕)을 할란다
아리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에~
아리랑 음~ 아라리가 났네"


유배자의 안착지로서 육지와 떨어져 외부와 단절된 섬 진도는 1984년 한국 최초의 사장교인 진도대교가 준공되면서 아라리에서의 염원처럼 배가 아닌 도보로 세상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리 아래에는 예전 명량대첩을 기적적으로 성공시킨 가장 큰 공신, 울돌목이 거친 숨을 토해내고 있다. 물살이 거세 바다가 운다고 해서 울돌목, 한자로 명량이라 이름 붙여진 이곳은 백의 종군에서 풀려나 군사 120인과 병선 12척 외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던 이순신에게 도박 승률처럼 미약한 재기의 기회를 안겨주었던 불안한 기회의 바다이기도 했다.

마음의 준비를 끝내고 적을 기다리는 이순신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겨우겨우 백의종군에서 풀려나 다시 이 자리에 섰는데 내일 실패하면 끝장이라는 사면초가의 형국에서 느끼는 극도의 긴장감과 불안감, 어쩌면 약하고 불안한 인간이기에 신적인 존재의 도움을 간절히 바라는 것인지 모른다.

"조수를 타고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진을 우수영 앞바다로 옮겼다. 벽파정 뒤에 명량이 있는데 수효 작은 수군으로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모으고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모두 오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고 엄격히 약속하였다. 이날 밤 신인이 꿈에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진다'고 하였다." -난중일기 정유(Ⅱ)중 9월15일

필사즉생(必死則生)이라…. 난중일기에서 내면의 불안감을 이겨내기 위한 주문으로 사용된 이 말이 군사독재시절, 박정희 대통령의 일방적인 짝사랑 때문에 '불가능은 없다, 안되면 되게 하라'라는 불도저식 구호로 확대 재생산되고 인간적인 면모를 전혀 느낄 수 없었던 일방적인 영웅 만들기에 이유없는 반감을 갖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 이 녹진전망대에서 진도대교를 굽어보면서 자문자답해본다. 아마 이순신 장군은 일방적 짝사랑으로 인해 이상한 모습으로 영웅화되어버린 당신의 모습에 당혹스러워하지 않았을까?

백조 도래지에서 일몰을 보다

▲ 백조가 사라진 군내호의 텅빈 갯벌, 그래도 석양에 반사되는 갯벌의 모습은 여전히 아름답다
ⓒ 김정은
혹 일몰을 볼 수 있을까 하여 무조건 가까운 서쪽의 백조 도래지로 달려갔다. 달리는 내내 태양은 백조 도래지에 닿기 전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 위태위태하다.

군내호의 백조 도래지는 12월에서 2월 사이 백조가 월동하는 국내 최대의 철새서식지로 알려져 있다. 행여 무리에서 이탈한 미운 오리새끼와 말벗이나 할 수 있을까 기대하고 찾아보았지만 이미 백조가 사라진 텅 빈 갯벌, 그래도 석양에 반사되는 갯벌의 모습은 여전히 아름답다.

지난번 김제 망해사에서 바라본 낙조도 아름다웠지만 이곳 군내호 철새도래지에서 바라본 일몰 또한 나름대로의 묘미가 있었다. 그러나 일몰을 기다리는 지루함에 잠시 망상에 빠져든다.

만약 매일 이 시간, 이 순간 아무 하는 일없이 그저 일몰을 바라볼 수밖에 없어도 지금 이 느낌 그대로일까? 일몰이 낭만이 아닌 일상으로 다가올 때의 느낌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 군내호 일몰의 또다른 모습, 필터 밖과 안의 세상은 필터 두께보다 더욱 차이난다.
ⓒ 김정은

날마다 지는 해를 봐야 하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일이다.
발가락을 간질이는 모래 위에 혼자 서서
날마다 수평선을 바라봐야 하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일이다.
온몸이 물들어버린 홍시빛 해를
말없이 제 안으로 끌어당기는
일몰의 바다를 혼자서 봐야 하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일이다.
-김재진/ 몽산포

▲ 기다림을 뒤로 하고 희망을 찾아가는 어스름한 저녁길, 길은 점점 어두워지지만 가는 길은 그리 두렵지 않다.
ⓒ 김정은

어둠은 어느덧 떨어지는 해를 사정없이 삼켜버린다.
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은 왜 일몰을 보려하는 것일까?
지나가는 것의 아쉬움 때문일까? 남겨지는 것의 회한때문일까?
아니면 살아남은 자의 쾌감때문인가?
태양이 사라진 이 갯벌에서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기다림이 아름다운 세월은 갔다
길고 찬 밤을 건너가려면
그대 가슴에 먼저 불을 지피고
오지않는 사람을 찾아가야 한다
비로소 싸움이 아름다운 때가 왔다
구비구비 험한 산이 가로막아 선다면
비껴 돌아가는 길을 살피지 말라
산이 무너지게 소리라도 질러야 한다
-안도현/'기다리는 사람에게'중에서


기다림을 뒤로하고 희망을 찾아가는 어스름한 저녁 길, 길은 점점 어두워지지만 가는 길은 그리 두렵지 않다. 이제 우리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 예전 '모세'라는 유대사람이 있는 줄도 몰랐던 순진무구한 토종 뽕 할머니의 전설이 숨어있는 회동마을이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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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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