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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총선에서는 지역구 후보와 지지 정당을 각각 따로 찍는 '1인2표제'가 처음 실시된다. 비례대표 후보는 정당별 지지율에 따라 배분된다. 따라서 1인2표 방식의 정당명부제는 소수 정당의 원내 진출을 확대하는 등 정치지형에 큰 변화를 불러올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낯선 방식의 제도를 도입한 취지는 선거에서 얻은 지역구 의석수에 따라 전국구 의석을 배분하는 인물 본위의 선거에서 인물(후보)과 정당의 정강·정책을 두루 보는 선거로 바꾸려는 것이다. 또 정당명부식 1인2표제는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희박해 투표에 무관심했던 진보·소수 정당 지지자들을 투표장으로 가게 만들어 투표율을 높이는 효과도 거둘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YS가 중용한 박세일은 한나라당 2번, YS가 보복한 김종인은 민주당 2번
따라서 각 정당은 비례대표 후보로 자당의 정강·정책과 노선에 부응하는 인물을 내세운다. 그 중에서도 비례대표 1번은 그 당의 정책을 상징하는 '얼굴'이다(이번 총선에서 여성의 정치참여를 확대하려는 취지에서 한나라당·민주당·열린우리당·민주노동당 4당이 각각 여성을 비례대표 1번으로 내세움으로써 남성 비례대표들이 2번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일부당의 비례대표 순위결정 투표에서 남성 후보가 1위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아직은 남성 비례대표 2번이 각 정당·정책의 '얼굴'이라는 점에서 별다른 이의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패권주의에 맞선 유럽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요슈카 피셔 독일 외무장관의 경우가 그렇다.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택하고 있는 독일에서 지난 8년 동안 선호 정치인을 묻는 여론조사에서 한번도 '넘버 1'의 자리를 내놓은 적이 없는 피셔 외무장관이 소수정당인 녹색당 소속이면서도 가장 사랑받는 정치인이 된 제도적 배경은 바로 정당명부제다. 그는 녹색당 비례대표 후보의 상위 순번에 배치돼, 지역구 선거에서 탈락하고도 연방의회에 진출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의 경우 제1당인 한나라당의 비례대표 2번은 김영삼 정부에서 정책기획·사회복지수석을 지낸 박세일 전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이고, 제2당인 민주당의 비례대표 2번은 노태우 정부에서 경제수석·보사부장관을 지낸 김종인 박사이다.
박 교수는 우리나라 시민운동의 한 획을 그은 경실련 창립에 발기인으로 참여해 정책위원장·경제정의연구소 이사장을 역임한 대표적인 현실 참여 지식인이고, 김 박사는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출신들로 개발독재시대를 이끈 이코노미스트 집단을 지칭하는 이른바 '서강학파'의 일원이지만 분배와 복지를 중시하는 현실 참여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
YS를 둘러싼 두 사람의 상관관계도 흥미롭다. 박세일 교수는 문민정부 시절에 YS에 의해 중용되어 청와대에서 3년 동안 경제개혁을 주도한 반면에 대표적 '재벌개혁론자'인 김종인 박사는 노태우 대통령에 의해 중용되어 재벌들이 보유한 비업무용 부동산 중과세 같은 개혁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김 박사는 92년 대선 당시 김영삼 후보에게 비판적인 자세를 취해 문민정부 초기 검찰을 앞세운 사정 국면에서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에 연루돼 '정치보복성' 구속을 당한 '반YS주의자'이다.
박 교수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함께 공동 선거대책위원장을 맡고 있는 한나라당의 '총선 쌍두마차'다. 따라서 다른 비례대표 후보와 달리 엄격한 검증을 받을 수밖에 없는 비례대표 2번으로서 박세일 후보는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부동산 투기 및 탈세 의혹과 자진사퇴 요구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할 남다른 의무가 있는 것이다.
89년 경실련 창립 발기인으로 현실 참여, 문민정부 청와대수석 지내
박세일(56·서울대 국제정책대학원) 전 교수는 서울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한국산업은행 조사부에서 3년 동안 근무하다가 미국 유학을 떠나 코넬대에서 석·박사(노동경제·법경제)를 마치고 귀국해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80∼85년)을 거쳐 85년부터 95년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까지 모교인 서울대 법대 교수로 근무했다.
박 교수가 일반대중들에게 알려진 것은 89년 당시까지 '체제 밖'에서 진행돼온 사회변혁운동을 체제 내 시민운동으로 전환시켜 한국 시민운동의 한 획을 그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창립에 발기인으로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와 다른 학자들을 경실련 활동에 끌어들인 것은 서울고·서울대 동기동창인 서경석(경실련 중앙위의장·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집행위원장) 목사였다. 교수 중심의 이들 현실 참여 지식인 그룹은 경실련 창립 때부터 경실련 조직의 한 축으로서 조직의 이념적 좌표를 잡아왔다.
당시 경실련 출범에 참여한 대표적 지식인그룹은 박세일(서울대·법경제학) 이각범(한국정보통신대·사회학) 강철규(서울시립대·경제학) 김태동(성균관대·경제학) 이근식(서울시립대·경제학) 이영희(인하대·법학) 교수, 박인제·정성철 변호사 등이다.
'경제정의의 실천'을 내세운 경제학자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이 자임한 역할은 한국사회 구성원들이 경제발전의 성과를 공유할 수 있는 정의로운 경제제도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87년 6월항쟁의 성과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고 경제발전의 결과로 88년 서울올림픽을 훌륭하게 치렀지만 부동산 투기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불로소득으로 인해 다수 국민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이 최고조에 달한 시점에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을 원용해 "이제 우리 사회에는 두 개의 계급만이 존재하게 됐다. 하나는 주택 소유 계급이고 다른 하나는 무주택 계급이다"라는 경실련 선언을 통해 '부동산 문제'를 들고나선 것이다.
당시 "대다수 국민이 평생 저축해도 자기 소유의 집을 가질 수 없을 정도라면 이는 크게 잘못된 사회"라는 경실련 지식인들의 문제의식과 토지공개념을 주장한 '경실련 선언'은 집 없는 일반대중의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박세일·이각범 교수에서 강철규·김태동 이어 김병준까지 정부참여 '경실련맨'들
이들이 경실련 출범 초부터 주창해온 토지공개념 도입과 금융실명제 실시는 박세일·이각범 교수와 정성철 변호사 등의 문민정부 참여를 계기로 정책의 실현으로 반영되었다. 그리고 이들에 이어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의 제자들로서 이른바 학현(學峴)그룹과 중경회(中經會)의 멤버인 강철규(전 부방위원장)·김태동(전 정책기획위원장)·이진순(전 KDI원장·숭실대) 교수 등이 '국민의 정부'에서 DJ노믹스를 실현하는 데 참여하게 된다.
경제학자이기 이전에 윤리학자로서 "정의와 이성에 따라 노동, 생산, 교환, 분배가 이루어지는 시장구조를 만들기 위해 도덕적 엘리트가 나서야 한다"고 강조한 애덤 스미스의 도덕적 엘리트주의와 앨프리드 마셜의 '경제 기사도'(騎士道) 정신을 모토로 한 학현그룹의 현실 참여는 강철규(현 공정거래위원장)·김태동(현 금융통화위원) 등 참여정부에서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또 참여정부의 핵심 정책브레인으로 정부혁신·지방분권 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병준(국민대 행정학) 교수도 89년 경실련 창립 때부터 93년 박세일 교수가 정책위원장을 맡을 때까지 정책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경실련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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