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표지
ⓒ 야간비행
'이 짧디 짧은 단락들이 왜 이리 가슴에 남는 걸까. 밑줄 그어야 할 부분이 왜 이다지도 많은 걸까.'

처음 도서실에서 이 책을 찾는 데 어려움을 깨나 겪었다. 적잖이 두꺼운 책인데도 깨알같은 '암호명' 형태의 제목 탓에 쉽사리 눈에 띄지 않아서이다. 우여곡절 끝에 찾아낸 이 책은 이제 소장하고픈 1순위의 책이 되었다.

"온통 밑줄을 긋고 싶네"

록의 불량함과 저항성은 사회적인 것으로만 해석되었고, 거기에 힘입어 텔레비전 카메라에 침을 뱉는 밴드가 나오고 음악은 엉망이지만 밴드의 존재 이유는 멋지게 설명하는 희한한 지식인용 밴드가 양산되었다.

지식인들이 기대어 있는 것은 사실 고도의 '지적 기능 훈련'임에 지나지 않음을 드러내는 예이다.

<중략>알고 보니 대중예술 평론이란 실제 대중예술이나 대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지식인이 쓰고 역시 지식인들이 읽기 위해 만들어 낸 대중예술의 해석판 같은 것이었던 모양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역사'가 아니라 '역사책'이었던 것이다.<'지식인들, 록을 고르다'중에서>

지식인이 읽는 수많은 칼럼은 기실 그들만의 이념 잔치에 불과한 것이다.

'책상 위의 역사'를 더욱 장엄무비하고 의미심장하게 만들기 위해선 바로 지식인 자신의 '일상의 진실'을 그린 리얼리즘이 곁들여져야 한다.

먼저 책장을 넘겨 태백산맥이나 만주를 달려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뭔가를 한껏 느낀 다음, 바로 리모콘을 눌러 힘있는 강원도나 우물에 빠진 돼지에 낄낄거리며 담배연기를 길게 뿜는다. 비로소 지식인은 비분강개에다 나약한 자신을 자조하는 웃음마저 곁들인 완벽한 지성미를 갖추게 된다. 리얼리즘은 리얼하다.<'리얼리즘은 리얼하다' 중에서>


지식인의 허세를 이토록 잘 나타낸 부분이 또 있을까. 이러한 '솔직함은 곧 진실'을 꿰뚫는 단서로 자리 잡는다.

인간과 관련한 모든 것, 인간의 영혼마저 돈으로 사고 파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일은 이념이나 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가져야 할 최소한 의 존엄에 관한 문제다. 중세를 넘어서는 일이 선한 중세를 바라는 기대가 아닌 중세를 반대하는 꿈에 의해 이루어졌듯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일은 선한 자본주의를 바라는 기대가 아닌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꿈에 의해 이루어진다. 역사는 언제나 사로잡힌 현실에 반대하는 꿈을 꾸는 사람들에 의해 전진한다.<'꿈' 중에서>

그가 왜 자본주의를 경멸할는지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지식인들 해부하기

'적을 보며 비분강개하는 일보다는 우리 안의 위선을 조롱하는 일을 더 즐기는 비틀린 사람', '좌익인 듯할 뿐 좌익도 아니며 인텔리인 듯할 뿐 인텔리도 아닌 사람' 김규항. 그의 짧은 토막글들이 이토록 날이 서는 날카로움으로 번득이는 것은 그의 직설적인 말하기에서 비롯된다.

이토록 적나라한, 날 것 그대로의 비평은 난생 처음이었다. 현상 너머의 실체를 간파하는 날렵함, 자신의 거리낌없는 자유분방한 일관적 태도에 잡념 많은 나는 오랜만에 '시선집중'을 경험했다.

그에게 있어 보수란 사상이 아니라 그저 '욕망'이고 남보다 더 가진 걸 내놓지 않으려는 노력일 뿐이다. 보수를 진보와 같은 수준으로 인정하지 않는 그는 당당하게 자신을 '좌파'로 구분한다. 하지만 그는 완전한 좌파가 되지 못한 '초보 좌파'라고 덧붙인다.

그가 스스로를 초보라고 한정한 것은 '아직은 내가 제대로 좌파로 살아갈 수 있을까, 과연 나는 (글이나 말로가 아니라) 일생에 걸쳐, 일상 속에서 좌파의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인간적 소양을 가진 사람인가' 하는 질문에 답하기가 곤란해서다. 때문에 그는 스스로 'B급 좌파'라고 규정한다.

김규항의 글은 이념과 추상으로 가득한 기존의 칼럼과는 영 달랐다. 일상 속에서 부딪치는 옳고 그름의 사회적 관계를 명료하고 실천 가능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그의 '좌파적 삶'은 결코 말이나 글에 갇히지 않는, 삶 그 자체임을 수긍할 수밖에 없게 한다.

이후 김규항의 행보에 큰 기대를 걸어본다. 이 책에서 보여지는 그의 삶은 결코 B급이 아닌 A급임을 자신하기 때문이다.

B급 좌파 - 김규항 칼럼집

김규항 지음, 야간비행(2001)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