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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비탈 위로 장항리 절터가 보인다
산비탈 위로 장항리 절터가 보인다 ⓒ 우동윤

경주시 양북면 장항리에 있는 장항리 절터도 바로 그런 곳이다. 경주시내에서 감포로 가는 고개를 넘어 추령터널을 지나 조금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토함산을 향해 난 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3Km쯤 가다보면 장항리 절터에 닿는다. 입장료가 없는 곳이니 당연히 이정표도 없다. 장항 4교라는 다리를 지나면 바로 오른쪽 산비탈 위로 탑이 보이니 주의해서 봐야 한다.

정항리 절터 동서쌍탑
정항리 절터 동서쌍탑 ⓒ 우동윤

산비탈이라고 해서 겁먹을 필요는 없다. 단지 절터 바로 앞에 주차장이 없으니 조금만 숨을 고르며 걸어 올라가기만 하면 된다. 편리한 것에만 익숙해 게을러진 우리의 두 다리만 잘 다독이면 되겠다.

햇볕이 잘 드는 산중턱에 자리잡은 장항리 절터는 그리 넓지 않다. 그래서인지 다른 신라시대의 절터에서 보이는 것처럼 금당 앞 동서쌍탑의 양식이 아니라 금당과 동서쌍탑이 같은 선 위에 있다.

장항리 절터 서오층석탑
장항리 절터 서오층석탑 ⓒ 우동윤

이 곳의 백미는 뭐니뭐니해도 서오층석탑이다. 국보 236호로 지정된 이 탑의 1층에는 어깨가 떡 벌어진 인왕상이 사면에 조각돼 있다. 세월의 풍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늠름하고 강건한 표정이 그대로 살아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서오층석탑 1층에 조각된 인왕상
서오층석탑 1층에 조각된 인왕상 ⓒ 우동윤

동탑은 서오층석탑에 비해 작고 뭔가 어색하다. 기록을 보니 역시 도굴의 흔적이다. 1923년에는 사리함을 탐낸 도굴꾼들이 아예 이 탑을 폭파시켜 버렸다고 한다. 부서져 계곡 여기저기에 뒹굴던 것을 최근에 복원해 놓은 것이 지금 동탑이다. 원래는 서오층석탑과 같은 양식의 탑이라 추정된다고 하니 씁쓸함이 더하다.

입불(入佛)을 모셨던 불대좌
입불(入佛)을 모셨던 불대좌 ⓒ 우동윤

1923년이라면 일제시대인데, 그때는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지금 같지 않았고, 그나마 도굴꾼들이 설쳐댔으니 그야말로 마음만 먹으면 한몫 단단히 챙기는 것도 쉬웠을 것 같다. 특히 더한 것은 일본사람들에 의해 우리의 문화재가 연구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가슴 아픈 사실이다.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된 장항리 절터 석조여래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된 장항리 절터 석조여래 ⓒ 우동윤

금당터 위에는 부처님을 모셨던 불대좌가 남아있다. 역시 도굴꾼들에 의해 깨졌지만 원래의 모습에 최대한 가깝도록 복원해 놓았다. 불대좌만 있고 불상은 없는데 여기에 모셨던 불상은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전시장에 보관돼 있다. 역시 산산조각 난 것을 시멘트로 붙여 놓았지만 그나마 상반신 밖에 없다.

특이한 사실은 이 석불이 좌불이 아니라 입불이었다는 것인데 이 역시 기록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나 같은 사람으로서는 그저 도굴꾼의 어이없는 만행이 규탄스러울 뿐이다.

금당터
금당터 ⓒ 우동윤

장항리란 곳에 있어 지금 이 곳을 장항리 절터라고 부르는 것이지 이 절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제대로 된 이정표도 없고, 산비탈을 따라 절터까지 오르는 길도 관람객의 편의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것이다.

우연히 토함산으로 향하는 길에 이 옆을 지난다면 모르고 지나치기 쉽고 혹시 멀리 탑 같은 것이 보이더라도 가는 길이 편치 않아 그냥 지나치는 사람도 많을 것 같다. 장항리 절터는 그런 곳에 있다.

불대좌에 조각된 익살스런 사자상
불대좌에 조각된 익살스런 사자상 ⓒ 우동윤

온전한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이곳저곳에 흔적만을 남기고 있는 장항리 절터에서 뿔뿔이 흩어진 옛 영화(榮華)를 생각했다. 절은 없고 터만 남아 있는 곳에 가면 항상 무상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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