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양북면 장항리에 있는 장항리 절터도 바로 그런 곳이다. 경주시내에서 감포로 가는 고개를 넘어 추령터널을 지나 조금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토함산을 향해 난 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3Km쯤 가다보면 장항리 절터에 닿는다. 입장료가 없는 곳이니 당연히 이정표도 없다. 장항 4교라는 다리를 지나면 바로 오른쪽 산비탈 위로 탑이 보이니 주의해서 봐야 한다.
산비탈이라고 해서 겁먹을 필요는 없다. 단지 절터 바로 앞에 주차장이 없으니 조금만 숨을 고르며 걸어 올라가기만 하면 된다. 편리한 것에만 익숙해 게을러진 우리의 두 다리만 잘 다독이면 되겠다.
햇볕이 잘 드는 산중턱에 자리잡은 장항리 절터는 그리 넓지 않다. 그래서인지 다른 신라시대의 절터에서 보이는 것처럼 금당 앞 동서쌍탑의 양식이 아니라 금당과 동서쌍탑이 같은 선 위에 있다.
이 곳의 백미는 뭐니뭐니해도 서오층석탑이다. 국보 236호로 지정된 이 탑의 1층에는 어깨가 떡 벌어진 인왕상이 사면에 조각돼 있다. 세월의 풍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늠름하고 강건한 표정이 그대로 살아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동탑은 서오층석탑에 비해 작고 뭔가 어색하다. 기록을 보니 역시 도굴의 흔적이다. 1923년에는 사리함을 탐낸 도굴꾼들이 아예 이 탑을 폭파시켜 버렸다고 한다. 부서져 계곡 여기저기에 뒹굴던 것을 최근에 복원해 놓은 것이 지금 동탑이다. 원래는 서오층석탑과 같은 양식의 탑이라 추정된다고 하니 씁쓸함이 더하다.
1923년이라면 일제시대인데, 그때는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지금 같지 않았고, 그나마 도굴꾼들이 설쳐댔으니 그야말로 마음만 먹으면 한몫 단단히 챙기는 것도 쉬웠을 것 같다. 특히 더한 것은 일본사람들에 의해 우리의 문화재가 연구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가슴 아픈 사실이다.
금당터 위에는 부처님을 모셨던 불대좌가 남아있다. 역시 도굴꾼들에 의해 깨졌지만 원래의 모습에 최대한 가깝도록 복원해 놓았다. 불대좌만 있고 불상은 없는데 여기에 모셨던 불상은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전시장에 보관돼 있다. 역시 산산조각 난 것을 시멘트로 붙여 놓았지만 그나마 상반신 밖에 없다.
특이한 사실은 이 석불이 좌불이 아니라 입불이었다는 것인데 이 역시 기록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나 같은 사람으로서는 그저 도굴꾼의 어이없는 만행이 규탄스러울 뿐이다.
장항리란 곳에 있어 지금 이 곳을 장항리 절터라고 부르는 것이지 이 절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제대로 된 이정표도 없고, 산비탈을 따라 절터까지 오르는 길도 관람객의 편의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것이다.
우연히 토함산으로 향하는 길에 이 옆을 지난다면 모르고 지나치기 쉽고 혹시 멀리 탑 같은 것이 보이더라도 가는 길이 편치 않아 그냥 지나치는 사람도 많을 것 같다. 장항리 절터는 그런 곳에 있다.
온전한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이곳저곳에 흔적만을 남기고 있는 장항리 절터에서 뿔뿔이 흩어진 옛 영화(榮華)를 생각했다. 절은 없고 터만 남아 있는 곳에 가면 항상 무상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