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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시 성황동 딸아이의 원룸에서 4월 15일을 맞았다. 잠에서 깨어난 시각은 5시 40분. 간밤에 12시가 넘어 잠자리에 들었으니 다섯 시간은 숙면을 한 셈이다.
이부자리를 개어 이불장 안에 넣었다. 세수부터 하고, 잠옷을 벗어 가방에 넣고, 옷을 입었다. 그러고 나니 벽에 걸린 시계가 맑은 음악으로 여섯 시를 알리며 녹음된 두 남녀의 고운 목소리가 '삼종기도'를 시작했다. 우리 성당 신부님의 부탁으로 수녀님이 마련하여 딸아이에게 선물한 '기도시계'였다.
나는 방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 기도에 동참했다. 기도는 삼종기도 다음에 '아침기도'로 이어졌다. 잠을 깬 아내도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아서 기도에 동참했다. 딸아이는 몸을 한번 뒤척이기는 했지만 계속 잠을 자고 싶은 눈치였다.
기도시계 안의 녹음된 기도가 끝난 후에도 나는 잠시 동안 더 혼자 묵상기도를 했다. 오늘 실시되는 우리 대한민국의 제17대 총선을 하느님께서 돌보아주시기를 빌었다. 투표를 포기하는 국민들이 제발 많지 않기를, 국민 모두가 깊은 뜻을 갖고 투표에 참여하기를 간절히 빌었다.
기도하면서 딸아이를 생각했다. 집에서 아직 꿈나라에 가 있을 아들 녀석도 생각했다. 그 아이들에게는 좀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간절했다. 그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는 지금과 같은 세상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었다.
저 반민족 친일세력으로부터 유래한 오랜 반민주 독재권력의 주구들이 계속적으로 설치며 부정부패 속에서 나라를 농단하는 문제 때문에, 그리고 자신의 깨어 있음 때문에 고민을 해야 하는 상황은 생각만으로도 괴로운 일이었다. 내 아이들에게는 그런 괴로움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기도를 마친 다음, 좀더 늦잠을 자고 싶어하는 딸아이를 그대로 두고 우리 부부는 딸아이의 원룸을 나왔다. 딸아이를 그대로 두고 우리 부부만, 또는 나 혼자만 빠져 나와 태안으로 돌아가곤 한 것이 벌써 한두 번이 아니건만, 침대에 혼자 남아 있는 딸아이가 가엾어지는 것은 여전한 심사였다.
7시 40분쯤 태안 집에 도착했다. 아침을 먹고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을 했다. 특히 '가톨릭 굿 뉴스' 게시판에 올라 있는 내 글에 대한 별난 천주교 신자들의 꽤 많은 비난과 야유, 조롱의 댓글들을 가져다가 내 홈피 게시판에 올려놓는 일을 했다.
9시 30분 서울 MBC 문화방송 라디오 오전 11시 10분 프로인 '변창립의 세상 속으로'의 담당 PD에게서 전화가 왔다. 일단 전화 대담에 관한 사항들을 논의한 다음 5분쯤 후에 다시 전화를 연결하고 정식으로 변창립 아나운서와 10분쯤 대담 녹음을 했다.
지난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부터 지금까지 시행된 62번의 각종 선거, 대통령을 비롯하여 나라와 지역의 일꾼들을 국민이 직접 뽑은 56번의 선거, 1948년 생인 내가 69년 삼선개헌 국민투표부터 오늘까지 치른 29번의 선거, 이번 제17대 총선에 참여하면 서른 번째 투표가 된다는 것을 얘기했다.
그리고 대선과 총선에서 내 표가 몇 번 승표(勝票)가 되고 사표(死票)가 되었는가를 소개했다. 아울러 이번 총선에서는 내 표가 반드시 승표가 되기를 바라는 소망과 확신을 피력했다.
또 내가 1996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한 번도 지지 않은 사람>에서 다룬 한 노인에 대한 얘기를 소개했다. 그가 평생 동안 모든 선거에서 이미 대세를 업고 있거나 승리 가능성이 큰 후보에게 표를 주어 모두 성공(?)을 거둔 이야기였다. 실제로 존재하는 그 노인의 이야기가 소설에서는 어떤 결말로 처리되었는지를 소개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한 번도 지지 않은 사람>이라는 소설을 쓴 의도, 즉 그 소설의 주제를 설명했다. 국민 주권의 가장 확실한 표시인 '한 표'의 신성함과 중요성, 그리고 국민 개개인의 깊은 생각과 고민에 의한 표가 우리나라의 진정한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녹음은 잘 된 것 같았고, 담당 PD로부터 "말씀을 잘해 주셔서 고맙다"는 말을 들었지만 우리 가족은 MBC 라디오의 그 프로 방송을 들을 수가 없었다. 서울 MBC의 전파임에도 이곳 태안에서는 전파가 잘 잡히지 않는 까닭이었다.
성당에 가서 레지오 모임을 마치고 방송을 들으려고 서둘러 오신 어머니도 방송을 들을 수 없어 실망하시는 표정이었다. 우선 12시 안에 투표를 하기로 하고 아들 녀석까지 모두 집을 나섰다. 투표소인 태안초등학교로 가는 차안에서 어머니는 성당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의 투표 예상을 이야기하며 즐거워하셨다.
태안초등학교 마당에 차를 놓고 투표 장소로 가면서, 또 투표를 하고 나오면서 여러 사람과 만나 인사를 하는 과정에서 직간접으로 투표와 관련하는 어떤 분위기를 직감하거나 간파할 수 있었다. 이상하게 즐거워지는 기분이었다.
내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사는 처제에게서, 경기도 시흥에서 사시는 고등학교 시절 은사님에게서, 그리고 서울의 한 분 선배 작가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MBC 라디오 방송을 잘 들었다는 얘기였다.
처제는 내가 군더더기 하나 없이, 좋은 목소리와 정확한 발음으로 말을 너무 잘해서 감탄했노라고 했다. 처음에는 어떤 성우가 말을 하는 줄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처제는, 동서와 안양의 작은처남 내외까지도 모두 내가 바라는 대로 투표를 했노라고 했다. 그들은 지난 대선 때까지만 해도 나와는 반대되는 성향이었는데….
70대 노인이신 내 고교 시절의 은사님께는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의 노인 폄하 발언을 너무 마음에 두시지 말아 달라고 부탁 드렸다. 선생님은 자신은 그렇게 속 좁은 늙은이가 아니라고 하시며 껄껄 웃으셨다.
어머니가 중국음식점에 가서 점심을 먹자고 하셨다. 모두 적극 찬동했다. 가족 모두 뭔가 기분을 좀 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우선 감기에 걸린 아내를 내과의원 앞에 내려주고 아들녀석과 함께 운동기구 가게로 갔다. 아들녀석의 공기 빠진 농구공에 공기를 넣는데, 왠지 내 마음속에 어떤 긴장감과 기대 같은 것이 좀더 빵빵하게 차 오르는 느낌이었다. 공기가 채워진 공을 바닥에 퉁겨 보며 아들녀석은 환성을 질렀다. 나는 그 공기의 탄력을 오감으로 느끼며 제발 오늘을 기해 우리나라가 이런 농구공과 같은 탄력을 갖게 되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다시 내과의원으로 가서 아내와 어머니를 태우고 단골 중국음식점으로 갔다. 어머니와 나는 자장면, 감기 걸린 아내는 따끈한 짬뽕, 아들녀석은 볶음밥을 시켰는데, 내가 아우라고 부르는 중국음식점 주인이 특별 서비스라며 탕수육을 가져왔다. 탕수육을 먹으며 나는 말했다.
"우리에게는 오늘이 축제 날이구, 잔칫날이여. 아직 결과는 물르지먼…. 이따 저녁에 제대로 잔치를 해야 헐지두 물르지먼…."
"꼭 그렇게 될 거예요."
아내가 기분 좋게 화답을 해주었다.
"오늘, 우리에게 뭔가 좀더 기념이 될 만헌 일이 읎을까?"
식사를 마치고 중국음식점을 나오면서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아내가 말했다.
"오늘 당신 휴대폰을 바꾸는 일을 허는 게 어떨까요?"
"내 휴대폰을?"
내 휴대폰은 너무 구식이고 고물이었다. 딸아이가 냉장고라고 부르는 물건이었다. 오래 전부터 바꿀 생각을 해오면서도 막상은 실행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까? 그것두 뭔가 뜻이 있을 것 같긴 헌디…."
"오늘 휴대폰 바꿔요. 2004년 4월 15일, 제17대 총선 기념으로…."
"이따 저녁때 어느 정도 개표 상황을 지켜보구 나서 휴대폰을 새루 장만허는 것이 더 좋지 않을라나?"
"아니에요. 지금 당장 실행하는 것이 좋을 거예요."
나는 잠시 후에 차에 오르며 말했다.
"그려. 2004년 4월 15일, 오늘 내 휴대폰을 바꾸자. 새 세상을 위하여!"
일단 태안중학교에 들러 농구장 근처에 아들녀석을 내려주고, 집에 가서 어머니를 내려드린 다음 우리 부부는 휴대폰 대리점으로 갔다.
문을 열어놓고 있는 휴대폰 대리점에는 한 명의 남자 직원과 세 명의 여직원이 있었다. 젊은 친구들이었다. 물어보니 아직 투표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반드시 투표를 하라고 했고, 꼭 투표를 하기로 그들의 약속을 받아냈다.
그리고 나는 구식 고물 휴대폰을 그들에게 주고, 보상비 3만원을 받고 새 휴대폰을 장만했다. 직원 아가씨에게서 확인을 해보니, 공교롭게도 4년만에 휴대폰을 교체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새 휴대폰에 입을 맞추며, 앞으로 새 휴대폰으로 좋은 소식들을 많이 듣게 되기를 가슴 뜨겁게 바라고 기대하고, 또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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