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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글 <충청도, '진짜' 자존심을 세우다>라는 글에서 나는 경상도와 전라도 그리고 충청도 지역감정의 성격을 규정하는 용어를 사용했다. 경상도는 차별적 패권적 지역주의, 전라도는 저항적 반발적 지역주의, 충청도는 파생적 지역주의라고 했던 표현이 그것이다.

이 용어들은 일단 해당 지역주의의 태생 성격과 결부된다. 지역주의의 발생 요인을 고찰하는 가운데서 얻게 된 용어들이므로 지역주의의 전개 과정과 현재 시점에서 분석 파악해 볼 수 있는 전체적인 모습과 결부시킬 경우, 어떤 용어는 부적절한 것이 될 수도 있다. 그 점을 나는 인정한다.

충청도의 신지역감정, 파생적 지역주의는 10년도 못 넘기고 이제 거의 소멸되었으므로 다시 거론하지 않기로 한다. 이번 17대 총선에서 나타난 표심의 작용만을 놓고 볼 때 고장에 따라서는 지역주의의 잔존을 느낄 수도 있으나 발전을 지향하는 시간의 흐름은 부정적인 것일 수밖에 없는 지역주의의 존재를 더욱 허용치 않을 것으로 믿는다.

전라도의 저항적 반발적 지역주의는 발생 초기에는 그 용어가 적절한 것이었을지 모르나 현 단계에서는 옳은 용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호남의 민심이나 정치의식을 말함에 있어 지역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과연 온당한 일일지 적이 의문이고, 그만큼 주저하게 된다.

선거를 통해 명확히 나타난 그동안의 호남 민심의 전개 과정과 오늘의 상황을 진지한 성찰의 눈으로 살피면 지역주의라는 용어가 얼마나 진실을 왜곡하는 위험하고 부당한 것인가를 절감하게 된다.

하지만 이번 총선에서도 확연하게 나타난 경상도 민심의 판이함은 또 한번 비교 관점의 여지를 성립시키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경상도의 그런 민심에 대해서는 지역주의라는 용어 외에 다른 표현을 찾을 길이 없다. 따라서 경상도의 지역주의를 말하자면 표현의 효율성 차원에서 호남에 관해서도 같은 용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똑같이 상대적 관점으로 지역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더라도, 영남과 호남의 그것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우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단도직입적으로, 영남의 패권적 지역주의는 오랫동안 이 땅에 독재권력의 유지를 가능케 하면서 민주 발전을 저해하고 수구세력을 옹호하는 쪽으로 기여해온 반면 호남의 지역주의는 나라의 민주화를 돕고 변화와 개혁을 추동하는 쪽으로 기여를 해왔다.

그것은 누가 보더라도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우선은 그것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것을 인정하는 자세는 우리나라의 지역주의 문제를 제대로 보고 해결의 길을 찾게 하는 중요한 단초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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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의 지역주의는 박정희의 18년을 비롯하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으로 이어진 도합 36년의 세월 속에서 많은 타성을 안게 되었다. 패권적 성격으로부터 말미암은 갖가지 타성들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은 수구적인 사고방식이다. 오랫동안 독재권력을 비호하다보니 비민주적인 것들을 억지로 합리화하려는 습성이 내재화되고 말았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정치판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갖가지 양태로 나타난다.

주지하다시피 호남의 지역주의는 김대중이라는 인물과 불가분의 관련을 맺는다. 그는 우리나라의 수많은 정변과 민주화 과정에서 갖은 고초를 다 겪은 사람이다. 호남인들은 김대중이라는 인물의 수난을 통해 그것의 근원적인 이유들을 알게 되었다. 김대중의 수난과 지역 차별의 갖가지 체감 속에서 도리어 민주주의를 확실하게 학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영남의 지역주의에는 분명히 가해자의 심리가 존재한다. 반면 호남의 지역주의에는 피해자의 눈물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1980년 광주의 비극도 엄존한다.

여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피해자의 눈물에 대한 성찰이다. 그 눈물은 광주라는, 또는 호남이라는 특정 지역만의 것일 수 없다. 그것은 우리 대한민국 전체의 비극이요, 눈물이다. 그 눈물을 국민 모두의 것으로 공유하려 할 때 우리는 참된 국민이 될 수 있다.

이번 17대 총선 결과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지역주의의 심화 현상을 말한다. 나도 그런 논의에 이미 가담을 한 처지이지만, 나는 호남의 표심에 대해서는 지역주의라는 잣대를 함부로 들이댈 수도 없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을 지낸 소설가 이문열씨는 19일 CBS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총선 결과와 관련, 지역주의 문제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어제 (KBS) 토론을 보니까 자꾸 지역감정을 경상도만 말하는데 대단히 웃기는 말이다. 사실은 경상도는 열린우리당에 대해 소위 싹쓸이했다고 하는 경북조차도 20% 이상을 줬다. 그러나 호남의 경우에는 (한나라당에) 3% 미만을 줬다."


영·호남의 지역주의를 말하는 방식이 매우 천박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게 양당의 득표율로 나타난 단순 수치만을 가지고 호남에도 지역주의의 잣대를 손쉽게 들이대는 태도에는 호남의 민심에 대한 깊은 성찰이나 폭넓은 사유의 자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세상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전후좌우의 맥락을 헤아리며 진지하고 철저한 고뇌를 앞세워야 하는 소설가로서 너무 안이하고 무책임한 태도가 아닐까 싶다.

많은 사람들이 호남의 열린우리당 싹쓸이 현상을 개탄한다. 곧바로 지역주의의 고착화 현상으로 연결시키며, 지역주의를 극복하려면 호남에서도 한나라당 당선자들이 나와야 하지 않느냐는 말들을 한다. 심지어는 호남의 표심을 일컬어 '맹목'이라는 단어까지 사용한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호남인들에게 너무도 가혹한 단순 논법이다. 일방적이고 자기 편의적인 생각일 뿐이다. 오늘의 한나라당은 영남 지역당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고, 또 그런 만큼 호남에 대해서는 가해자의 속성을 안고 있지 않을 수 없다. 가해자일 수밖에 없는 독재권력의 주구들이 오늘날에도 한나라당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사실, 그런 한나라당의 속성에 질끈 눈을 감으라는 무리한 요구에 지나지 않는다.

호남인들은 한나라당의 속성에 눈을 감지 않으면서 호남을 절대적인 텃밭으로 삼은 민주당도 선택하지 않았다. 그들은 호남정서에 호소하는 민주당을 과감히 버리면서 열린우리당을 선택했다. 세상을 옳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정치세력이라는 판단에 의한 선택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지역주의의 연장이 아니다. 오랜 세월 지역 차별의 눈물 속에서 스스로 키워온 슬기와 정치의식이 자연스럽게 발휘된 결과로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차별과 수난 속에서 민주주의를 확실하게 학습해온 결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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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맹목'이라는 단어는 결코 호남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본다. 한나라당이 호남의 눈물을 대한민국 전체의 눈물로 파악하고 공유하며, 가해자의 속성을 지닐 수밖에 없는 영남 지역당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진심으로 환골탈태를 한다면, 그리하여 민주주의 확장에 기여할 수 있는 확실한 인물들을 내세운다면 호남에서도 얼마든지 당선자를 낼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한나라당의 환골탈태가 가시화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들은 '탄핵 역풍'이라는 사상 초유의 위기 국면에서 당을 살려낼 수 있는 방안으로 박근혜를 선택했다. 그것은 일시적으로 상당한 효과를 보았지만 한편으로는 영남 지역당의 이미지를 더욱 확실히 하는 결과를 낳았다.

민주국가에서 '연좌제'라는 것은 불필요한 것이지만, 박근혜 대표는 아버지 박정희의 유산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그 유산의 정당성 여부를 따지는 것 자체부터 그에게는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데, 그가 그 유산을 어떻게 떠안고 갈지는 두고 볼 일이다. 다만, 박근혜 대표가 안고 있는 박정희의 유·무형의 유산은 우리 국민들에게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님을 여기에서 분명히 말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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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오래 전부터 내 성향을 분명히 했지만, 또 한번 많은 비난을 각오하면서 나는 오늘 이 글을 쓴다. 비록 지역은 다르지만 나는 저 1980년의 광주의 피와 눈물을 대한민국 전체의 피와 눈물로 파악하고 또 공유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런 마음 자세가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잘 알고 있다.

나는 고장의 명산 백화산을 거의 매일 오르는데, 어제는 일부러 '갑오동학혁명군추모탑'이 있는 코스를 택했다. 또 한번 동학혁명군 추모탑 앞에서 묵념을 하고 잠시 그 앞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내가 살고 있는 고장에서 100여 년 전 동학의 북접군(北接軍)이 기포를 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자랑스럽게 느껴지면서도, 당시의 참혹한 사회상과 동학군의 치열한 전투와 패퇴, 그 후의 처참한 상황을 상상하면 눈물을 머금지 않을 수 없다.

우리 고장의 100여 년 전 동학군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전북 지방의 남접(南接) 동학군과 전봉준 장군을 생각한다. 그곳 지방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인다. 그러다보면 옛날 고등학생 시절에 처음 들었던 일제시대의 광주학생의거도 떠올리게 된다. 80년 광주민주화 운동 이전부터 나는 일제에 항거한 광주학생의거로 말미암아 광주에 대한 일종의 동경과 선망을 가져왔다.

그리고 80년 광주민주화운동 이후부터는 광주에 대한 일종의 정신적 채무감 같은 것을 늘 가슴에 지니고 살아왔다.

하지만 나는 결코 광주와 호남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19일, '4·19혁명기념일'을 지내면서 다시 마산을 생각했다. 나는 경남 마산에서 4·19혁명이 처음 촉발되었다는 사실을 중학생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산에 대해서도 일종의 향수와 정다움 같은 것을 늘 안고 살아왔다. 내 바로 아래 누이가 마산 사람인 남편과 쉽게 사귈 수 있었던 것도 마산이라는 동네에 대한 내 선망이 작용한 덕이었다.

또 나는 1979년의 '부마항쟁'도 잊지 않는다. 박정희의 '유신'이라는 이름의 철권독재에 저항했던, 그리하여 '10·26사건'을 유인한 '부마항쟁'을 떠올리면 나는 다시금 부산과 마산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을 갖게 된다.

그런데 4·19혁명의 시초와 부마항쟁을 일으켰던 정의롭고, 심지 곧은 부산 마산 사람들이 정치권력의 지역감정 조장에 의해 패권적 심리만을 갖게 되고 동족 호남인들의 눈물을 공유하지 못하는 현상이 못내 가슴 아프다. 지역주의에 충실하는 것은 4·19혁명과 부마항쟁이 구현한 민주 정신과 너무도 거리가 멀다.

우리는 오늘 지역주의 문제를 풀어가는 한 가지 방안으로 일제와 불의와 독재에 항거했던 광주학생의거, 4·19혁명, 부마항쟁, 광주민주화운동 등 자랑스러운 역사를 적극적으로 상기해야 한다. 그리고 지역을 초월하는 그 숭고한 민족 민주정신의 공통성 안에서 민족의 모든 기쁨과 눈물을 함께 나누며 공유해야 한다.

끝으로, 충청도에서 나타난 이번 총선의 지역주의 극복 결과를 놓고 굳이 평가절하를 위해 자꾸만 억지로 '행정수도 건설' 건을 결부시키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협소한 시야로 세상을 보는 것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그런 낮은 인식의 눈으로 충청도인들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 그건 한마디로 충청도인들을 모욕하는 말이다.

사람에게는 기본적인 양심이라는 게 있다. 양심은 정의감을 낳는다.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가지게 된 정의감에다가 지역주의의 어리석음을 깨달은 분별력이 합세하여 이번의 총선 결과를 낳은 것이다. 행정수도 건설 건이 부분적으로 전혀 없지만 않겠지만, 그것이 절대로 큰 변수는 아니었다.

지역주의를 극복한 충청도의 모습에서 모종의 당혹스러움이나 질시를 느낀다면 더불어 부러움과 함께 교훈을 얻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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