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노래한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서 또 이런 말을 들려준다.
“옛말에 이르기를 거문고는 음악(樂)의 으뜸이라. 군자가 항시 사용하여 곁에서 떠나지 않는다 하였다. 나는 군자는 못되었지만 거문고를 가지고 줄도 갖추지 않고서 어루만지며 즐겼는데 어떤 사람이 이것을 보고 웃고는 줄을 갖추어 주었다. 나는 사양하지 않고 받아서 길게 혹은 짧게 타며 즐겨 놀았다. 옛날 진나라 도연명(陶淵明)은 줄이 없는 거문고로만 자신의 뜻을 밝혔는데, 나는 이 보잘 것 없는 거문고를 가지고 그 소리를 내려 하니 어찌 옛 사람만 하겠는가?”
옛 선비들은 거문고를 벗하여 살았단다. 그만큼 거문고가 우리 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거문고가 어떤 악기인지, 어떤 소리가 나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런 요즘, 거문고 연주에 한평생을 바친 거문고의 명인이 거문고 산조 음반을 발매해 눈길을 끈다.
신쾌동류 거문고 산조의 맥을 잇는 명인 김영재(57)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원장이 최근 산조 전 바탕을 녹음한 음반 <신쾌동류 거문고 산조>를 신나라 음반을 통해 선보인 것.
거문고 산조란 무엇인가?
먼저 ‘산조(散調)’란 장구 반주에 맞추어 다른 악기를 독주 형태로 연주하는 것을 말하는데 4∼6개의 악장을 구분해 느린 장단에서 빠른 장단 순서로 연주하는 국악의 한 장르이다. 또 산조 중 거문고산조(散調)는 중요무형문화재 16호로 지정된 거문고로 연주하는 민속 기악 독주곡이다.
고구려의 왕산악이 처음 만들었다고 알려진 거문고는 우리 민족 고유의 현악기로 ‘현금(玄琴)’이라고도 한다. 길이 1.5m, 폭 25㎝ 정도 되는 나무통에 명주실로 꼰 6개의 줄을 매어 연주하는 악기이다. 거문고 머리를 무릎 위에 놓고 왼손가락으로는 괘(줄받침)를 짚어 운율을 맞추며 오른손으로는 가느다란 대나무로 만든 술대를 쥐고 줄을 쳐서 소리를 낸다.
거문고산조는 고종 33년(1896) 백낙준에 의해 처음으로 연주되었으나, 거문고의 품위를 손상시킨다는 시샘이 있어 잠시 주춤하다 개화기에 들어서면서 점차 꽃을 피우게 됐다. 일반적으로 진양조(느린 장단), 중모리(보통 장단), 중중모리(조금 빠른 장단), 엇모리(산조나 판소리에 쓰이며, 2박과 3박이 뒤섞인 빠른 10박 장단), 자진모리(빠른 장단) 등 5개의 장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거문고산조는 담담하고, 웅장하며, 막힘이 없는 남성적인 절제미가 돋보이는 음악으로, 우조(羽調:꿋꿋하고 중후한 느낌)와 계면조(界面調:슬프고 애절한 느낌, 서양의 단조와 비슷)를 섞은 빠르고 느린 리듬이 희노애락의 감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백낙준에게서 비롯된 거문고산조는 신쾌동, 김종기, 박석기 등의 명인을 거쳐 현재 김영재, 원광호가 이어가고 있다.
김영재의 음악세계
CD를 넣고 산조를 듣는다. “두둥 둥” 호쾌하고 장중한 소리가 흐른다. 무언가 가슴 속을 뒤흔들기 시작한다. '아! 이것이 거문고산조란 말인가?' 새삼 거문고산조의 매력을 깨닫고 흥분을 감출 수가 없다.
이번에 거문고산조 음반을 낸 김영재는 국악예술학교(중학교 과정)에 입학하면서 신쾌동을 만나고 그 문하에서 거문고를 배워 일가를 이룬 명인이다. 김영재의 거문고 학습과정을 들어보면 쉽게 명인이 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는 신쾌동 선생의 무릎 앞에서 구음으로 지시를 받으며, 전통적인 학습방법으로 하나하나 익혔으며, 그것은 국악예술학교 시절부터 선생이 세상을 뜰 때까지 끊임없이 이어졌다.
신쾌동은 196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 16호 거문고산조의 기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고, 김영재는 신쾌동의 첫 전수자이자 첫 이수자였으며, 1977년 신쾌동이 세상을 뜨자 1988년 신쾌동을 잇는 기예능보유자 후보가 되었다.
그동안 신쾌동류 거문고산조의 수많은 공연을 하고, 교육자로서 수많은 제자를 길러온 김영재는 지금을 절정기로 보고, 그동안 해온 신쾌동류 거문고산조 연마작업을 기록하는 음반을 취입했다. 신나라에서 나온 이 음반은 대체로 평조와 우조가 많으며, 힘이 있고, 선이 굵은 가락들로 짜여져 있다. 깊이가 있고, 호쾌한 연주라는 평을 듣는다.
김영재 선생을 만나 몇 가지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다.
- 거문고를 하게 된 사연은?
“어렸을 때부터 풍물굿을 좋아하고, 풍물패를 따라다니기도 했습니다. 처음엔 일반 중학교에 들어갔는데, 적성이 안 맞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때 마침 신문에 국악 장학생을 뽑는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국악예술학교에 들어가게 되었고, 신쾌동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그후 신 선생님께 매료돼 제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된 것이지요.”
- 거문고 음악의 특징이 있다면?
“거문고는 선율도 있지만 특이하게 화성이 있습니다. 거문고는 주로 유현(遊絃:거문고의 둘째 줄을 말하는데 가장 가늘다)과 대현(大絃:거문고의 셋째 줄이며, 가장 굵다)의 두 줄로 연주하는데 소리가 깊고, 남성답습니다. 화려하거나 튀지 않아도 은은하고 무게가 있으며, 흥분시키지 않는 매력이 있지요.”
- 거문고를 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가끔 외국공연을 갑니다만 처음 접하는 낯선 음악인데도 외국인들은 우리 음악을 진지하게 감상하고, 높이 평가를 해줍니다. 그런데 정작 제 나라에서는 일반인들의 관심이 부족한 것을 볼 때, 외롭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 국민들이 우리 음악에 좀 더 관심을 갖고 자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사람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한복을 자주 입어야 한복이 좋다는 것을 알 수 있듯, 우리 음악도 자주 들어야 그 매력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한국인이면서 스스로에 걸맞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의식주, 보는 것, 듣는 것이 모두 서구화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상도 서구적으로 변하여 외국에 끌려 다니는 것은 물론 사회가 삭막해졌습니다. 우리 문화를 잊기는 쉬워도 다시 찾으려면 수백 년이 걸립니다. 이걸 명심해줬으면 합니다.”
-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음반 작업을 꾸준히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놓고, 나눠 가지려 합니다. 힘이 닿는 데까지 제자들을 육성하고자 합니다.”
마지막 일어서면서 그는 한 가지 당부를 덧붙였다.
"우리 사회엔 문화운동을 하는 사람이 많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대중들이 우리 문화를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우리 문화에 애정을 가질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지요.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거문고를 노래한 김영랑의 시 <거문고>를 읽어보자.
거문고
검은 벽에 기대선 채로
해가 스무 번 바뀌었는데
내 기린(麒麟)은 영영 울지를 못한다.
그 가슴을 퉁 흔들고 간 노인(老人)의 손
지금 어느 끝없는 향연에 높이 앉았으려니
땅 우의 외롱 기린이야 하마 잊어졌을라.
바깥은 거친 들 이리 떼만 몰려다니고
사람인 양 꾸민 잔나비 떼들 쏘다니어
내 기린은 맘 둘 곳 몸 둘 곳 없어지다.
문 아주 굳이 닫고 벽에 기대선 채
해가 또 한 번 바뀌거늘
이 밤도 내 기린은 맘 놓고 울들 못한다.
김영랑은 나라를 잃어버린 암울함 속에서 소리를 잃은 거문고를 통해 나라 되찾기를 소망했다. 소리를 마음껏 내면서 울지도 못한 채 벽에 기대 선 거문고를 통해,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서 암울하게 살아가는 민중들의 답답함과 슬픔 어린 마음을 드러냈다.
거문고는 바로 그런 악기이다. 그러나 일제의 속박에서 해방된 지도 어언 60년이 다가오는데 아직도 거문고가 제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은 지금 세상도 암울하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 모두 거문고산조를 듣고, 그 매력에 한껏 빠져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