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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붙잡자마자 원제를 알아 보았다. 독일어판 원제는 < Das Ganz Normale Chaos der Liebe > 그리고 영역판 원제는 < The Normal Chaos of Love >. 직역하면 '사랑의(혹은 사랑이라는) 정상적 혼란'이다.

그런데 역자는 굳이 '지독한'에다 '그러나 너무나'라는 문구까지 삽입해 개역했다. 나름의 고민 끝에 여성학과 인류학 전공자로 이뤄진 역자들이 이렇게 했을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무슨 이유였을까 하는 의문이 나를 괴롭혔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에는 정상적이라기보다는 너무나 지독한 게 숨겨져 있음을 강조하고 싶어서였을까? 그 '지독한' 건 무엇일까. 또 굳이 너무나 '정상적'이라고 하는 건 뭘까.

10년 전쯤 우리 나라를 강타한 <시네마천국>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이 영화의 마지막 5분여쯤을 주인공 토토가 혼자서 수많은 영화의 감미로운 키스신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낭만적이다 못해 차라리 애처로운 어떤 것으로 정형화되어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사랑은 그 자체로 전부가 아니다. '결혼'(또는 '동거')으로 이어지고, 가족을 이루면서 임신과 출산, '아이'의 문제가 계속해 따른다. 그러면서 낭만은 저 멀리로 증발하고 삶의 전투가 벌어진다. 이것은 나와 그(녀) 사이 둘만의 문제도 아니다. 우리의 문제이자 나아가 우리를 둘러싼 이 사회의 문제인 것이다. 심지어 사람들은 연애의 시간을 넘어 결혼을 결심하려는 단계에만 이르러도 막중한 무게를 느끼게 될 정도다.

저자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으로 치부되는 사랑이나 결혼 생활의 문제도 사실 공적인 영역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말로 글을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가족을 구성하기 위한 성·사랑·결혼·가사노동·아이 등 모든 부분에서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직시하고 사랑과 결혼 그리고 사회에 대한 변화 과정을 예측한다.

최근 유럽에서 유행하는 조크 한 마디. "여보 큰일났어요. 1층에서 당신 아이와 내 아이가 우리가 낳은 막내를 마구 때리고 있어요." - 책 표지글

사회가 점점 복잡다단화 할수록 인간의 사적인 영역으로 간주되던 사랑, 결혼은 사회적인 문제로 탈바꿈해 간다. 나는 사실 진정한 사랑은 고독을 견디고 일상의 힘겨움을 공유하며 긍정적인 생활 감정으로 발현해 가도록 노력하는 성숙한 두 인격체의 합일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결코 '충족'으로 치환될 수 없다.(41쪽)

결혼은 '미친 짓'이라고 힐난받기도 한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는 광고 카피에서도 변덕스럽고도 자연스런 감정의 움직임인 사랑을 왜 결혼이라는 제도로 구속하냐고 묻고 있다. 성적 욕구의 해결을 위해 결혼해야 한다는 생각은 이제 진부하게 들리기까지 한다. 미국의 유명한 트렌디 시트콤 <섹스 앤드 더 시티>의 모토 "누가 남편이 필요하단 거야?"처럼 말이다.

낡은 조건과 새로운 의식의 각성은 상호 충돌하게 마련이다. 급증하는 한국의 이혼율은 이를 반영하고 있다. 해석상의 이견이 있기는 하지만 통계청은 보고서 '통계로 본 세계 속의 한국'에서 한국의 1997년 이혼율이 1000명당 2건으로 전통적 이혼 대국 프랑스(1.9건) 이탈리아(0.5건)를 훨씬 웃돌고 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혼을 한다. 왜일까? 그저 관행이니까? 인간의 합리성이 아직도 결혼을 '할 만한 것'으로 보니까? 그것은 아니다. 특히 현대 한국의 여성들은 결혼이 '못할 짓'이라는 사실을 다 알고 있다.

저자들에 따르면 그것은 인간이 '정서적인 헌신'을 추구하는(48쪽)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어 저자는 가족과 결혼은 사라지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모호한 말을 던진다. 왜냐하면 "현대(의 개인화)는 여성과 남성들이 헤어지도록 몰아가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양쪽을 서로의 품안으로 다시 밀어 넣기도 한다(73쪽)"는 것이다. 그리고 "고독의 위협이야말로 결혼의 가장 믿을 만한 토대(74쪽)"라고 되뇌인다.

어쩌면 사랑이나 결혼은 섹스에 대한 생물학적 욕구보다는 정서적인 자기 안정감 또는 소속 의식의 확약처를 찾으려는 노력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사랑과 결혼보다 인간에게 우선하는 것이 '혼자 안되기'(no making loneliness) 노력인 것이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이혼한 후 남성들이 자신의 혈육에 무섭도록 집착하는 것도 그것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통계는 우리에게 출생률의 격감이란 또 다른 지표를 보여주고 있다. 이건 또 왜일까? 과거와 달리 현재 우리들의 '결혼'과 '부모되기'는 별개의 문제(187쪽)니까?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완벽한 부모가 되기 전에 아이를 갖지도, 낳지도, 이래라 저래라는 말도 하지 마라." 그렇다. 훌륭한 부모되기를 준비하면 할수록 실제 아이의 탄생은 늦어지거나 계속 미뤄지게 된다. 특히 한국의 현재 상황에서 결혼한 남성과 여성에게 가해오는 이런 막중한 하중은 '차마 아이를 어떻게 지금 가질 수 있는가?'라고 주저하게 만든다. 그건 '아이를 사랑하기 위해서 또는 사랑하기 때문에 아이를 갖지 않는'(194쪽) 경향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아울러 피임 실패의 대부분이 남성의 비협조 때문이라는 점과 반대로 출산과 양육에 대한 부담 대부분이 여성에게 족쇄가 된다는 점 때문에 '숨겨진 낙태(또는 중절)'가 발생하고 있다. 때문에 저자는 '책임의 원칙(209쪽)'이 최첨단의 과학 문명이 판치는 미래로 갈수록 더 소중한 불변의 덕목이 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제 사랑을 위해 결혼한다는 것이 더 이상 가족의 구성, 물질적 안정, 부모되기 등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모든 측면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자기 자신이 되는 것, 자기의 개인적인 길을 따라 아주 멀리까지 과감히 나가되 파트너의 끊임없는 후원과 동료애에 기댐으로써 이 두 세계가 가진 최상의 것을 얻는 것을 뜻한다."(293쪽)

책을 일독하고 나서야 나에게 물었던 질문의 대답을 내릴 수 있었다. 저자는 과거와 달리 현대의 사랑과 결혼이 가지고 있는 양가적(兩價的)인 특성을 '정상'과 '지독'이라는 단어로 극명하게 대비하고 있는 것이다.

'정상(normality)'이 '혼란(chaos)'이 되고 이혼은 또 다른 결혼을 부른다. 사랑은 모든 것을 다 던져 버릴 만큼 가혹하면서도 모든 것을 포용할 것 같은 너그러움을 가지고 있는, 도대체 풀리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다.

때문에 사랑은 무언지 꼬집어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사랑의 반대말만큼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건 '외로움' 즉, 고독의 감정이다. 사회가 무수히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결혼의 의미를 찾아낼 실마리를 대라면 인간의 고독 탈피 욕구가 아닐까? 그래서 인간은 오늘도 자신의 반쪽을 찾아 헤맨다.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 사랑, 결혼, 가족, 아이들의 새로운 미래를 향한 근원적 성찰

울리히 벡.벡-게른스하임 지음, 강수영 외 옮김, 새물결(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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