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사회>라는 저서로 유명한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그의 부인과 함께 집필한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이하 <사랑은 지독한 혼란>)은 사랑, 결혼, 가족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은 사랑이 '보편 종교'가 되어버린 시대에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사랑하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라는 깨우침을 준다. 또한 사랑, 결혼, 가족이라는 말로 찬미되고 은폐되고 신성화되는 우상들을 벗겨낸다.
산업혁명이 야기한 근대적 사랑 방식
언젠가 SBS <솔로몬의 선택>에서 '사랑 없는 결혼 생활'에 대해 아내가 남편에게 위자료를 청구하는 소송을 소개한 적이 있다. 이 소송에 대해 20대 안팎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 게스트는 사랑 없이 결혼 생활을 할 수 없으니 당연히 위자료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50대 정도로 보이는 나이든 여성 게스트는 사랑 없이도 결혼하고 함께 산다고 반박했다. 그리고 둘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전근대의 사랑·결혼 방식과 근대의 사랑·결혼 방식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게 된다.
우리 시대에는 연인의 사랑을 마치 시공을 초월한 인간의 보편성에서 비롯한 절대적인 무엇 또는 온갖 환상이 투영된 희망적인 무엇으로 찬양한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에 여러 가지 복합적인 희망을 투여하는 것은 근대적 현상이며, 우리 시대에 특유한 것이라고 <사랑은 지독한 혼란>은 설명한다. 사랑을 위한 결혼은 겨우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나서야 존재하기 시작했으며, 따라서 산업혁명의 발명품이었다는 것이다.
근대에는 사랑을 결혼의 전제조건으로 여기지만, 근대 이전에는 사랑과 결혼, 성관계는 모두 별개의 것일 수 있었다. 즉 근대 이전에는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한다는 생각이 없었으며, 그들의 결혼은 가업유지와 아이생산의 수단이었다.
즉 인류가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성관계를 맺는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산업혁명이 야기한 사회구조의 변화에 기인한 현상이다. 산업혁명이 불러일으킨 사회가 인류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사회구조를 만들어 낸 것처럼, 마찬가지로 사랑, 결혼, 가족에 대한 생각과 유형도 크게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왜 낭만적 사랑이 근대사회에서 '보편 종교'가 되었나?
근대는 사랑이 '보편 종교'가 되어버린 시대다. 우리는 매일 TV드라마에서 소설에서 가요에서 사랑에 대한 찬미가를 듣는다. 낭만적 사랑이 범람하는 시대인 것이다. 일찍이 이처럼 사랑이 찬미 받고 중요한 때는 없었다. 그렇다면 왜 근대에 들어와서야 사랑은 중요한 것이 되었을까?
근대 이전 인간의 삶은 가족, 마을 공동체, 고향, 종교로부터 사회적 지위와 성별 역할에까지 모두 여러 결속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것들은 한편으로는 개인의 선택을 엄격하게 제약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친숙함과 보호, 안정적인 자리매김과 확실한 정체성을 제공했다.
그러한 결속이 존재하는 곳에서 개인은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개인은 더 큰 단위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근대는 개인이 파편화된 시대이다. 그에게는 근대 이전의 개인에게 제공되던 안정감과 확실한 정체성이 더 이상 미리 주어져 있지 않다.
더구나 산업사회는 개인을 소외시키고 있다. 산업사회 속의 인간은 자신의 삶을 살지 않고 미리 주어진 기능을 수행한다. 일하는 동안 그들은 그들 자신의 욕구와 능력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소외 속에서 작업한다. 이러한 사회에서 개인은 홀로 외롭고 고통스럽게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서야 한다.
여기서 사랑에 대한 찬미가 생겨난다. 자기 자신의 사회적 환경을 창조하거나 찾아내야 하는 개인들에게 사랑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중심축이 된다고 이 책은 설명한다.
"우리들의 사랑법 속에는 사랑에 대한 찬미가 있다. 이러한 찬미는 우리가 일상의 생활 속에서 잃어 버렸다고 느끼는 것들을 상쇄해 주는 일종의 균형추이다. 신이나 사제나 계급 또는 이웃도 아니라면 최소한 그래도 ‘너’는 있어야 하는 것이다."(74쪽)
그래서 우리의 삶에 의미와 안전을 제공해줄 다른 준거점들이 점점 더 사라져 갈수록 우리는 더욱더 우리의 열망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쏟아 붓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오늘날 사랑에 대한 찬가가 넘쳐나는 이유다.
핵가족 등장과 함께 새로운 정체성 형성돼
한편 이는 결국 가족과 결혼을 묶어주는 것이 물질적 안정과 애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혼자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분석에는 낭만적 사랑이라는 것이 사실은 TV드라마나 영화, 또는 소설에만 존재하는 환상일 뿐이며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있다.
그리고 이는 아이에 대한 사랑에도 마찬가지라고 이 책은 설명한다.
"아이는 외로움에 대한 최후의 대안이 되고, 이제는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 사랑받을 기회를 지켜줄 수 있는 보루가 된다. 이것은 사방에 만연해 있는 실망감을 벌충하기 위해 생활에 다시 마법을 거는 사적인 방법이다."(81쪽)
이 책은 근대적 사랑 방식에 대한 근원적 성찰과 함께 가족의 변화와 새로운 정체성의 등장에 대해서도 논한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산업혁명 이후 가족의 형태는 핵가족이 '정상 가족'이 되었다.
이 책은 핵가족은 감정이 가족 영역을 점령하도록 하면서 우리가 갖고 있는 가족에 대한 근대적 이미지의 특성인 프라이버시와 친밀성을 도입했으며, 나아가 이로 인해 새로운 정체성이 출현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사람들이 점차 지향점을 상실하고 있다고 느끼게 되면서 커졌다. 가족은 내적 고향상실을 좀 더 견딜만한 것으로 보일 수 있게 만들어주는 피난처가 되었으며 낯설고 적대적인 것으로 되어가는 세계 속에서 하나의 항구가 되었다. 역사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새로운 형태의 정체성의 출현이다."(98~99쪽)
이렇게 새로운 정체성이 출현했기 때문에, '가족의 사랑이 삶의 전부'인 것도 가능해지고, '사랑 때문에 자살'하는 일도 가능해지게 되었다. 이는 모두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는 볼 수 없었던 오늘날 사회의 특이한 현상인 것이다.
새로운 생계 방식 출현과 함께 사랑 방식도 또다시 변해
근대인은 근대 이전의 사랑 방식을 대할 때 의아함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의 후손들은 근대의 사랑 방식을 대할 때 의아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에는 또 다시 사랑 방식에 변화가 오고 있다.
현대는 다시 사랑과 결혼과 성이 모두 별개의 것이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경제적 단위로서의 가족이 점점 붕괴되고 노동 시장과 개인에게 의존하는 새로운 생계 방식이 출현하고 있는 사회변화와 맞물려 있다.
이제는 사랑한다고 해서 결혼하리라 생각하는 것은 더 이상 당연하지 않으며, 또 결혼하기로 했다고 해서 당연히 아이를 낳으리라고 생각할 수도 없다. 또한 마찬가지로 결혼은 섹스와 분리될 수 있고, 섹스는 부모되기와 분리될 수 있으며, 부모되기는 이혼과 그에 따라 생기는 여러 형태들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사랑-결혼-섹스-아이'라는 하나의 도식이 더 이상 당연한 것이 아닌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랑, 결혼, 가족의 변화와 함께 이 책은 이제 모성과 임신도 이전과는 다르게 규정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제 아이들과 모성은 더 이상 자연적 운명이 아니다. 최소한 원칙상으로는 아이들은 원해서 낳는 것이고, 따라서 모성도 계획되는 것이다."(68쪽)
"임신은 더 이상 자연스런 사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임신은 예방조처와 의학적 모니터를 요구하는 문제적인 상황이다."(211쪽)
수많은 가능성 속에서 스스로 삶을 창조해야 하는 현대인의 운명
현대는 전통적인 사랑, 근대적인 사랑, 탈근대적인 사랑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동료처럼 공존하고 있다. 그리고 사랑 방식의 변화와 함께 가족의 형태도 다양하게 변하고 있다. 현대는 더 이상 핵가족이 '정상 가족'인 시대가 아니게 되었다. 현대는 다양한 가족의 형태들이 동시에 존재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수많은 차이와 다름의 공존 속에서 모든 것은 '개인의 실존적 선택'에 맡겨져 있다. 결혼을 해야 할지 안해야 할지, 동거만 할 것인지,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을 가족 안에서 할지 아니면 밖에서 할지, 그리고 이런 저런 일을 직업을 얻기 전에 할지 아니면 어느 정도 경력을 쌓은 후에 할 것인지...
이 모든 것이 이제는 더 이상 자명하지 않게 되었다. 확고한 규준들이 줄어들었고, 이제 우리는 더욱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그런 규칙들을 만들어내야 한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고,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답해야 하는 운명에 처해졌다.
그러나 어떠한 사랑 방식이나 어떠한 가족의 형태가 더 우월하다거나 더 도덕적이라거나 더 정상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다만 개인의 실존적 선택이 있을 뿐, 그 선택에 대한 근원적 우월성은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스스로 행동하고 창조함으로써 삶을 개척해야한다는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통찰은 현대 사회에 매우 적절하다. 그리고 이 점이 또한 울리히 벡의 또 다른 저서 <위험사회>와 맥락이 닿는다. 이 책은 <위험사회>의 구체적인 사례로 읽어낼 수도 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사랑하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 성찰
새로운 세대는 사랑, 결혼, 가족에 대한 '실험이 강요된 시대'에 살고 있다. 그 실험은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싶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는 고백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사랑, 결혼, 가족에 대해 근원적인 성찰을 담고 있으며, 시장경제는 궁극적으로 무자녀 사회라는 현대 사회에 대한 뛰어난 사회학적 분석을 담고 있는 <사랑은 지독한 혼란>을 새로운 삶을 개척할 용기가 있는 이들에게 권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함께 사는 여러 가지 다른 방식들을 시험해 보고 있는 중이며, 그에 따르는 고통과 노력들을 견뎌내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시험의 끝이 어떨지 또 무슨 결과를 가져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온갖 실수에도 불구하도 또다시 시도해보는 것을 단념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