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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일본은 없다>라는 꽤나 선정적인 책이 나왔었지요. 그랬더니 <일본은 있다>라는 책도 뒤따라 나오더군요. 또 '일본에서 배울 게 하나도 없다'고 하는가 하면 '일본에서 배울 게 무척 많다'는 경험담도 들려오곤 하지요. 친(親)일이 버티고 있는 동시에 들끓는 반(反)일이 있습니다. 한편에서 용(容)일을 주장하면 다른 한편에선 승(勝)일을 외치지요.

이처럼 일본은 한국인의 의식과 무의식에서 극과 극의 반응을 이끌어내는 묘한 애증의 대상으로 자리를 잡고 있지요. 기독교의 나라 한국 거리에서는 종종 '당신에게 예수는 무엇입니까?' 같은 질문을 받곤 하는데, 어쩌면 한국인에게는 '나에게 지금 일본은 무엇입니까?'라는 일상의 자문이 더욱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당신에게선 어떤 대답이 나오던가요. 이 질문은 과거 역사의 청산 문제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한-일 FTA(자유무역협정) 등 양국을 광역 경제권으로 포괄하게 될 미래의 지각 변동에 대한 준비로서도 필요합니다. 혹자는 양국의 시장을 합하면 전 세계 GDP의 17%에 해당하는 거대한 자본주의 블록이 형성된다며 흥분하기도 하더군요. 이렇듯 일본은 과거와 미래 양편에서 물밀 듯이 몰려와 한국인의 현재에 당도해 있지요.

가끔 TV를 통해 한국인 같은 유민과 일본인 같은 보아를 보지요. 이런 현상을 보며 어쩌면 양국의 대중문화 교류가 찰랑거리며 발목을 적시는 수준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곧 우리네 삶의 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다가올 가까운 미래의 일본을 떠올리면 말이지요. 그런데 생각해볼수록 일본은 저에게 어떤 실체로 다가오기보다는 유령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제가 접했던 일본에 관한 대중서를 떠올려 봅니다. 이를테면 전여옥의 <일본은 없다>와 김지룡의 <나는 일본문화가 재미있다>와 이규형의 <일본을 읽으면 돈이 보인다> 같은 책들은 저에게 어떤 일본을 전해준 걸까요. 또 이어령 교수의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나 김용운 교수의 4부작 <한국인과 일본인> 같은 다소 학구적인 책은 어떤가요. 돌아보니 그것은 전여옥이 겪은 일본이고, 김지룡이 맛본 일본이며, 이규형이 간파한 일본이고, 이어령과 김용운 각각의 일본론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더군요.

이 모든 일본은 너무나 확정적인 결론들을 지닌 채 강렬한 인상을 남겨서 저의 사고와 경험 속에 '있는 그대로 일본'을 펼쳐볼 기회를 박탈했던 것이지요. 일본의 식민주의 지배를 받았던 피해 국민의 상처받은 자존심을 달래주거나, 경제 대국이자 문화 선진국 일본에 대한 열등감을 약화시켜준 구급약이라고나 할까요. 한·일 축구 경기를 대하는 한국인의 심정과 여기에 호소하는 축구 해설과 다른 것이 없다 싶더군요. "일단 일본전은 이기고 보아야 합니다" 같은 귀에 쏙 들어오는 해설 있잖아요.

다행히도 '한국인이 바라보는 일본'이 아니라 '일본인이 알고 느끼며 호흡하는 일본'을 소개하는 책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확인하고 싶은 일본만 확대해서 강렬하게'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일본을 펼치고 담담하게' 사고하도록 열어주는 문화 사전 같은 책이지요. 의도된 질문이 없으니 유도된 답변도 없지요. 스스로 질문하고 대답해야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밥그릇이나 국그릇을 들고 먹으면 '거지처럼 들고 다니면서 먹지 말라'고 주의를 받는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밥그릇이나 국그릇을 식탁에 놓은 채 머리를 숙이고 먹으면 '개가 밥먹듯이 먹으면 안돼!'라고 꾸중을 듣는다.

이를테면 이 책은 여기까지입니다. 일본의 전통적인 식습관과 음식 문화를 살펴본 뒤에 한국과 살짝 비교하고 그치는 것이지요. 이렇게 360개 테마를 잡아서 한국일어일문학회 208명 회원이 지은이로 참가한 책이랍니다. 일본문화총서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는데 모두 6권이 나왔지요. 저는 그 중에서 일본의 전통문화를 다룬 1권 <게다도 짝이 있다>와 현대문화편 2권 <스모 남편과 벤또 부인> 두 권을 읽었답니다.

기독교 문화에서 자란 저의 경우 1권에서 소개하는 일본의 독특한 다신교 문화가 흥미를 끌더군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보면 저마다 역할과 전공이 다른 무수한 신들이 나오는데 모두 일본의 오랜 전통에서 탄생하여 지금까지도 면면히 '실존'하고 있다 생각하니 새롭더군요. 2권에서는 일본인이 사랑하는 만화 주인공들한테 관심이 갔지요. 작은 체구의 로봇 아톰, 사고뭉치 로봇 도라에몽, 평범한 아줌마 사자에상, 살인청부업자 골고13, 게으르고 도박을 즐기는 천진난만한 경찰 료쓰 간키치 등. 못 본 만화책은 곧 봐야지 싶네요.

한국인과 일본인이 부분적으로는 동일인종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은 거의 의미가 없다. 한국인도 일본인도 생물학적으로 정의된 '인종'과는 무관한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쓴 신지숙씨는 1997년에 완결된 아미노 요시히코의 '일본사회의 역사'를 인용합니다. '조몬인 자연진화설'의 일본 단일민족설과 조선 문화에 대한 우월감을 확인하려 드는 종래의 일본 역사관을 비판하면서 한반도 남부에서 온 '야요이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일본 내부의 또다른 입장이지요. 이 책은 같은 방식으로 조심스럽게나마 한국의 단일민족설과 일본에 대한 우월감을 증명하려 드는 한국인의 감성에 대해서도 슬쩍 의문을 표시하네요.

그러니까 이 책은 양국의 문화적 원형을 볼 때 공통점이 많았으나 상당히 다르게 변화를 겪어온 사회 문화적 차이가 무엇이냐고 큰 질문을 열어두고 있는 셈이지요. 한국과 일본의 순수한 민족적 원형을 따져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양국을 나누는 일사불란한 시각에서 보면 불순한 생각일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저는 이분법적 사고를 따라 선명하게 경계와 위계를 나누는 생각보다는 자꾸 연계하는 불순한 사유와 참여적 성찰을 더 사랑합니다.

저는 그 상대가 일본일지라도, 아니 일본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해야 하지 않나 생각하지요. 많은 문제가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지만 올바른 풀이를 위해서도 어제는 싸웠으나 오늘은 화해해야 할 이웃처럼 일본은 함께 살아가야 할 내 곁의 친구라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이는 국가 지도자들이 말하는 '한·일 양국의 동반자적 우호 협력 관계'와는 조금 차원이 다른 문화적 접근이지요. 내 안에 들어온 일본과 씨름하는 문제이면서 동시에 일본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노력입니다.

참고로, 이 책 1∼2권을 읽은 다음 일본문학을 다룬 3∼4권과 일본어학을 다룬 5∼6권으로 진도를 나가셔도 좋겠고, 아니면 옆길로 새서 다음 책 두 권을 탐독하시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권해봅니다. 한 권은 <일본 근대의 풍경>(유모토 고이치·그린비)으로 일본 근대화의 풍물 200개 항목을 다룬 책이고, 또 한 권은 일본을 통해 근대 문물을 받아들인 우리네 식민지 근대화의 풍경을 다룬 <모던의 유혹, 모던의 눈물>(노형석·생각의 나무)입니다.

두 권 모두 두툼한 두께와 방대한 시각 자료를 자랑하지요. 세계 열강의 꿈을 안고 넘치는 의욕과 가슴 벅찬 희열로 서구 근대화를 맹렬하게 학습하는 일본의 근대 풍경과, 나라 잃은 설움과 고된 착취의 나날 속에서 일본의 속국 신세로 근대화를 보충 학습해야 했던 조선의 한숨과 비애에 찬 근대 풍경. 두 권 책에서 고스란히 배어 나오는 이 감수성의 차이는 비단 지은이들의 것만은 아니겠지요.

바쿠후 말기와 메이지 시대는 서구를 모범으로 삼은 일본이 서양과의 접촉을 통해 근대국가를 만들어간 역사의 거대한 전환점이었다. 격변하는 사회 상황 속에서 많은 새로운 사물이나 제도가 수입되었고 또는 새로 만들어졌다. 그 대변혁은 쇄국정책이라는 폐쇄된 사회에서 해방된 에너지가 구현된 것이기도 했다." (<일본 근대의 풍경> 저자 서문)

"이 땅의 근대제도는 서구와 달리 체념과 순응 속에 도사린 반항, 공포와 증오 등의 복잡한 감정을 부추켰다. 식민모국 일본의 근대화를 따라 배우려는 풍토가 생겼지만 사람들은 오로지 근대문명의 물신성만을 새 정체성으로 익혀갔다." (<모던의 유혹, 모던의 눈물> 저자 서문)


단단한 하나의 고리로 연결되어 따로 또 같이 근대화를 소화했던 한·일 양국의 역사적 과거사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현재의 관문으로도 이어집니다. 이 문을 통과해서 꿋꿋이 걸어가다 보면 어딘가 미래의 출구로 나가야 하겠지요.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의 어려움, 제가 또는 여러분이 서 있는 이 어려움을 정직하게 가로질러서 편견 없이 일본을 만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게다도 짝이 있다 - 키워드로 읽는 일본 문화 1, 일본문화총서 001

한국일어일문학회 지음, 글로세움(북스온)(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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