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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변호사의 글이 실린 <가톨릭 다이제스트> 5월호
윤 변호사의 글이 실린 <가톨릭 다이제스트> 5월호
천주교계 여러 월간지들 중에 <가톨릭 다이제스트>라는 잡지가 있다. 1980년대 후반 한 사제가 창간하였는데 오래 운영난을 겪게 되자 신자인 윤학 변호사에게 인수를 부탁했고, 고민 끝에 잡지를 인수한 윤 변호사는 한동안은 어려움이 많았겠지만 착실하게 잡지를 키워서 지금은 운영이 잘되는 것으로 듣고 있다.

나는 그 잡지의 초창기부터 정기 구독을 하고 있다. 여러 번 글도 썼다. 그리고 손가락 꼽을 정도나마 정기 구독자를 늘리는 일도 해주었고, 고료 대신 책을 받아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식으로 홍보를 해준 일도 있다.

그러나 <가톨릭 다이제스트> 5월호 '목마름의 잔치 사랑의 잔치' 난에 실린 그의 글 <누가 진보인가, 무엇이 진보인가>는 문제가 너무 많다. 뒤늦게나마, 5월이 다 가기 전에 그의 글이 지닌 문제점들을 짚어본다.

진보에 대한 왜곡된 시선

그의 글은 처음부터 진보 세력에 대한 왜곡의 시선을 깔고 들어간다. 점심을 함께 한 'K교수'라는 사람의 입을 통해 한 대학생의 비뚤어진 가치관을 소개한다. 정상 코스로 공부를 하는 것보다 운동권에 참여하여 활동하는 것이 출세를 하는데는 지름길이라는 가설이 제시된다. 한 학생의 생각을 예로 소개하는 형식이지만, 그는 곧 그 가설을 인정하는 태도를 취한다.

"과거에는 눈앞의 현실, 소위 보수적 가치를 좇는 이들이 자신들의 입지를 더욱 튼튼히 하려고 사회정의를 파괴했다면, 이제는 개혁과 평등, 소위 진보를 외치는 이들이 '가난'에 대한 사회적 책임만을 강조하여 기득권층 때문에 가난하다는 대립구도를 조장하고 자신들의 역할을 만들어 입지를 세우는 것 아니냐며 걱정했다"며 K교수의 말을 소개함으로써 그는 그 말이 이미 실제적인 현실 상황인 것처럼 호도한다.

'가난'에 대한 사회적 책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기득권층 때문에 가난하다는 대립구도를 조장하고…"라는 것도 변화와 개혁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어느 모로는 필수적인 항목이다. 그런 '대립구도'는 이미 예전부터 기득권층에 의해 현실화되어 있었다. 진보 세력이 새롭게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마련이 되어 있었다는 얘기다.

다만 지금은 그 대립구도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이끌어 가느냐, 변화와 개혁의 실체성에 어떻게 이바지하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러려면 그 대립구도가 더욱 명확해질 필요가 있다. 하지만 현 노무현 정권에서도 그것을 기대하기는 매우 어렵다. 비록 지난 4월 총선에서 원내 다수당이 되긴 했지만 대립구도가 명확해질수록 커질 수밖에 없는 부담을 노무현 정권이 어떻게 조율하며 감당해 갈지는 참으로 미지수다.

결국 윤학 변호사의 논법은 변화와 개혁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일정 부분 필요한 기득권층과의 대립구도 자체를 기본적으로 부정하는 셈이다. 그리고 그런 시각에다가 변화와 개혁을 추구하는 진보 세력의 본질을 의심하고 폄훼하는 시선을 곁들인다. 왜곡된 가치관을 지닌 대학생의 예를 끌어들여 진보 세력은 본질적으로 순수하지 못하다는 암시를 깔고 있는 것이다.

윤학 변호사는 '가난'에 대한 사회적 책임의 실체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것 같다. 단군 이래 최대의 도둑이라고 회자되는 두 명의 군인 대통령이 재임 시절에 조성했던 천문학적인 은닉 금액, 선거를 치를 때마다 각 기업들이 정치권에 갖다 바친 엄청난 선거 자금, 그리고 그런 음성적 관행이나 구조가 우리 사회의 가난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지도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음성적 관행이나 구조를 척결하는 일도 변화와 개혁의 하나이고, 그것의 실효를 위해서는 명확한 대립구도 또한 피할 수 없는 일이니까….

자기 모순적 궤변

윤학 변호사는 몇 년 전에 비행기 안에서 만난 한 외국인 교수의 말을 소개하며 '가난'의 상관성을 설명한다. 후진국 현상 그대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가난의 이유를 '개인'에게 두지 않고 사회제도, 즉 '남 탓'으로만 돌린 까닭에 지나치게 권력 순환에 대한 욕구를 키우는 쪽으로 달려왔다는 논법이다.

그러면서 우리 역사의 맹점들을 지적한다. "고려시대에도 조선시대에도 또 최근에도 개혁을 하겠다는 정권이 수없이 들어섰으니 빈부격차도, 사회적 갈등도 줄어들어야 했다. 그러나 정권교체는 개혁을 내건 몇몇 소수에게 힘을 주었을 뿐 일상을 사는 사람들의 삶에는 변화를 가져다주지 못했다"고 질타하듯 말한다. 참으로 실소를 금할 수 없는 궤변이다.

여기에서 그의 역사에 대한 무지를 읽지 않을 수 없다. 고려시대에도 조선시대에도 개혁을 하겠다는 정권이 들어섰다면 그게 무슨 정권이었는지 묻고 싶다. 몇 번의 정변이야 있었지만 그것은 오직 지배계층 사이의 다툼이었을 뿐이다.

강고한 신분제도의 사슬 속에서 민중의 개혁 의지가 과연 어떻게 발휘될 수 있었겠는지, 유일한 민중 봉기인 조선 말의 동학혁명 농민군이 어떤 참상을 겪었는지, 그런 것들에 대한 포괄적인 시야를 지녔다면 그런 무책임한 말은 차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최근에도 개혁을 하겠다는 정권이 수없이 들어섰으니 빈부격차도, 사회적 갈등도 줄어들어야 했다"는 말은 또 무슨 뜻인가? 김영삼 정권이나 김대중 정권이 아예 개혁은 엄두도 내지 못했거나 개혁에 실패했다는 뜻인가? 개혁을 하려면 기득권층과의 대립구도를 분명히 해야 하는데, 그걸 못했다는 말인가?

기득권층과의 대립구도를 각오해야 하는 개혁이 그렇게 쉽게 빈부격차 해소와 사회적 갈등 감소를 가져올 수 있는가? 개혁을 하지 못해 빈부격차도 사회적 갈등도 줄어들지 않았다는 말은, 적어도 윤학 변호사의 성향이나 시각으로 볼 때는 어불성설 아닌가?

그런 관점들에 대한 고찰은 윤학 변호사에게 중요한 사항들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에게 더욱 중요한 사항, 그가 꼭 하고 싶은 말은 다음 사항이었을 것이다.

"가장 진보적이라는 노무현 정권에서도 실업자는 여전히 늘고 있고 사회, 경제적 약자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많아졌다는 보도가 줄을 잇는다. 노동자와 서민을 위한다는 정권에서 노동자와 서민이 '요즘 정말 살기 힘들다'고 호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조선일보>를 비롯한 수구 족벌언론들의 보도 태도나 논조를 그대로 답습하는 행태인데, 그는 바로 이 말을 하기 위해 위에 소개한 어불성설을 동원했던 것이다.

노무현 정권은 이제 겨우 1년이 지났다. 그 1년 동안에도 대통령 탄핵 등 많은 파란곡절이 있었다. 취임 직후부터 노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는 기득권 세력들이 온갖 책동을 다 부렸다. 그런 상황과 관련하여 기득권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조선일보 등 수구 족벌언론을 진보 세력이 비판하면 그것도 남 탓을 한다고 할 것인가?

놀랍게도 윤학 변호사는 어떤 경우에도 남 탓을 하지 말라고 한다. 그 어떤 비판도, 변화와 개혁을 추구하고자 하는 의지도 다 남 탓일 뿐이라고 강변한다. 그는 그 말을 이런 식으로 한다.

"요즈음 바뀌지 않아서 모든 것이 잘못되고 있다는 '바꿔! 바꿔!' 사상이 천지를 진동하고 있다. 친일세력이, 군부독재의 잔재가,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력이 남아 있어서 이 땅에 정의가 없고 빈부격차가 심하다는 것이다.

'누구 때문에' 무엇이 안 된다는 '남 탓'이 넘쳐나고 있다. 어릴 적부터 수없이 들어왔던 이런 케케묵은 이야기들이 오늘 진보의 이름으로 다시 우리 앞에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말로는 개혁하겠다면서도 정작 개혁의 방향을 제시하는 일에는 등한히 한 채 거대 야당 때문에 개혁이 안 된다며 야당을 탓했던 사람들이 여대야소가 된 이제는 다시 누구를 탓하며 대립구도를 만들어 자신들의 입지를 펴나갈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이 정도면 윤학 변호사의 궤변이 아닌가 싶다.

진보의 본질을 바로 알길

한편 윤학 변호사는 진보의 본질적 가치를 잘 알고 있다. 그는 그것을 이렇게 제시하고 있다.

"진정한 진보는 변화와 평등에 무게 중심을 둔다."

"진정한 진보는 남을 자신처럼 존중하고 배려하는 평등한 생각으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변화시킴으로써 사회를 발전시켜 나가려는 창의적인 생활태도일 것이다."


그는 또 "남을 비난하거나 편을 가르는 편협한 주장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태도는 결코 진정한 진보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오늘의 진보 세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오늘 우리사회의 진보는 실질적 평등보다는 모두가 기계적으로 평등해야 한다는 형식적 평등에 집착한다. '권력과 힘을 빼앗아와야만 행복하게 된다'며 행복의 기준을 보수적 가치에 둔다. 의견이 다른 사람의 인권은 존중하지 않고 가혹하게 비난하면서도 자신들의 인권은 무한정 존중되기를 바란다. 이런 태도는 오늘 우리 사회의 진보가 위장된 진보요 무늬만 진보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과연 그럴까? 설령 그런 사람들이나 기류가 일부 있다손 치더라도 그게 과연 진보의 본질이고 주류일 수 있을까? 그런 일부 왜곡된 기류가 진보의 본질을, 전체를 지배할 수 있을까? 그런 일부 기류가 진보의 전체인 양 그렇게 쉽게 호도와 매도를 자행할 수 있는 것일까? 그는 자신이 말한 진보의 본질이 얼마나 소중하며 우리 사회의 규범적 가치 덕목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일까?

그는 혹 조선일보 등이 왜곡하거나 과장해서 보여준 우리 사회의 가짜 진보의 기류와 실체에 대해 내심 쾌재를 부르며 그것에만 열심히 눈의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진보의 최대 가치는 기득권층의 권리와 부를 빼앗아 내 배를 불리는 것이 아니라, 기득권층이 바른 방향으로 변화하여 모든 사람이 평등한 가운데서 더불어 잘 사는 사회를 만드는 일에 협력하게 되기를 희망하고 추구하고 유도하는 것인데, 그는 진보의 그 본질적 가치가 그처럼 쉽게 훼손되거나 망각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일까?

설령 그렇다손 치더라도, 변화와 개혁을 추구하는 진보 세력의 고유 의지와 그것으로부터 말미암은 기득권층에 대한 비판을 '남 탓' 정도로 매도하는 천박한 의식 수준으로 그가 과연 진보의 일부 이탈된 모습을 비판할 수 있을까? 사회 지도급 인사이니 객관적 자격은 있다손 치더라도, 그 비판이 과연 신빙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

그는 며칠 전에 찾아간 어느 마을의 평화로운 풍경을 소개한다. 마을공동체의 생활 덕목들도 소개를 한 다음 그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끝을 맺는다.

"어릴 적 내 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이 누구 때문에 못산다며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삶 자체에 충실했더라면 그분들이 얼마나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았을까? 또 그런 분위기에서 자랐을 나의 어린 시절은…."

과연 그럴까?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런 식으로만 산다면, 그가 그 마을에서 보고 느낀 그런 평화로운 풍경들이 과연 가능할까? 자연발생적이기도 한, 세상의 변화를 갈망하고 이상을 추구하는 마음, 인간의 향상의욕이란 것이 그렇게 무가치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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